702화
문이 열리며 찬 공기와 함께 오상문이 거실로 들어오자 의자에 앉아 거실에 있는 커다란 북미왕국산 난로의 온기를 쬐던 박강현은 그런 오상문을 보며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아. 상문이. 왔나?”
그리고 오상문은 집 안의 따뜻한 공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재빠르게 문을 닫고 난로 근처로 다가와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난로의 온기를 쬐며 말했다.
“그래. 어휴. 아직 9월밖에 안 되었는데 뭐 이리 추워?”
박강현과 오상문은 조선에서 살다 조청전쟁 이후 조선이 만주 동부 지역, 즉 북방 영토를 확보하고 이곳을 개척하기 위해 각종 혜택을 약속하며 이주민을 모집하자, 가족들과 함께 북방 영토로 이주했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올해 처음으로 북방 영토의 겨울을 경험하게 되는 셈이었고.
헌데 이렇게 처음 경험하는 북방의 추위는 생각보다 매서웠다.
특히 지금은 아직 겨울의 시작이라는 입동이 오기 전인데도 말이다.
그러니 오상문은 이곳의 추위에 학을 떼며 투덜거리자 박강현은 난로 위에 얹혀 있는 주전자에서 뜨거운 보리차를 따라 오상문에게 건네며 달랬다.
“뭘 그러나. 이곳은 북방이라 겨울이 빨리 올 것이라는 것쯤은 짐작했잖아?”
“그래도 그렇지. 벌써 이렇게 추우면 한겨울엔 얼마나 추울지 두려울 정도라고.”
물론 오상문도 이 북방 영토로 이주하기 전, 이곳의 추위가 장난이 아닐 거라는 것 정도는 예상했다.
겨울이 길고, 무척 춥기로 유명한 함경도나 평안도보다 더 북쪽에 위치했으니까.
하지만 충청도 토박이였던 오상문으로서는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최근 빠르게 내려가는 기온과 매섭게 불어오는 찬 바람에 이곳의 추위를 실감할 수 있었고, 아직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지도 않은 9월이라는 중순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솔직히 오상문은 한겨울이라 할 수 있는 11월이나 12월쯤 되면 얼마나 추울지 두려울 정도라 뜨거운 물을 마시면서도 몸을 떨자 박강현이 그런 오상문을 달래듯 말했다.
“뭐 북미왕국이 사용하는 양력으론 벌써 11월이라 겨울이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잖나. 그러니 한겨울이더라도 지금보다 조금 더 춥겠지.”
“끙...정말 그럴까.”
박강현의 말에 오상문이 혹하는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박강현이 오상문이 입고 있는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북미왕국에서 보내준 그 두툼한 겨울옷도 있고, 긴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도 잘 해두었잖나.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고.”
이주민들에게 약속한 것처럼 북미왕국은 필요한 생필품을 제공해 주었고, 특히 가을이 될 때쯤에 값비싼 북미왕국의 겨울옷을 대거 나눠주었는데, 북미왕국의 추운 지역에서 주로 입는다는 이 겨울옷은 찬 공기를 막아주어 따뜻했다.
또한, 북미왕국에서는 난방을 위한 석탄 난로와 긴 겨울 동안 사용할 석탄을 지원해주었고, 혹시 이것이 부족할까 싶어 틈틈이 주변의 숲에서 땔감마저 대량으로 구해와 쌓아둔 만큼, 아무리 이곳의 겨울이 춥다 하더라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라는 박강현의 이야기에 오상문이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나름 이곳의 추위를 버틸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예상보다 훨씬 매서운 추위에 자신감을 잃었던 오상문은 이런 박강현의 말에 이곳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준비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그의 귓가에 조금은 장난스러운 박강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말이네. 한겨울이 되어 지금보다 훨씬 추워진다고 해도 어쩌겠나. 어떻게든 견뎌야지. 안 그래?”
박강현과 오상문은 가족들과 함께 이 북방 영토로 이주한 후 무척 고생했었다.
그나마 잘 개간된 밭을 받았고, 덕분에 이주한 후 당장은 씨만 뿌리면 그만이었지만, 당장 천막생활을 하다 보니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녔고, 겨울이 오기 전까지 추위를 피할 집을 지어야 했기에 밭을 돌보며 틈틈이 집, 축사, 창고를 짓느라 하루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해야만 했었으니까.
물론 그렇게 고생한 덕분에 지금은 이렇게 편히 쉴 수 있게 되었고, 이미 필요한 건물들을 대충이나마 지은 만큼, 내년엔 올해보다 훨씬 편하게 농사일만 하면 될 텐데 이를 포기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느냐는 눈빛으로 박강현이 오상문을 바라보자 오상문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건 그래. 올 한해 엄청 고생해서 기반을 만들어 뒀는데 이곳의 추위가 싫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야 없겠지. 특히, 이곳은 기후가 문제지 땅은 꽤 비옥한 편이라 수확량이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어디 그뿐인가? 이 땅들은 우리 땅이기에 소작료를 낼 필요도 없고, 거기에 세금이 없기에 그렇게 수확한 식량들을 그대로 창고에 저장할 수 있었잖나.”
박강현의 말에 오상문은 자신의 창고에 쌓여 있는 식량을 떠올리고 슬쩍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긴. 덕분에 내년 수확 때까지는 우리 가족들이 매일 배불리 먹어도 엄청 남을 정도니까...”
“그래. 해서 내년엔 이렇게 남는 식량을 활용해 더 많은 가축을 키우기로 했으니 이젠 가끔은 고기를 배불리 먹는 것도 가능할 거란 말이지. 헌데 추워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겠다고?”
조선 정부에서는 기후 때문에 이 지역 땅들을 가장 등급이 낮은 6등급으로 분류해서 이주민들에게 3결을 내어주었기에 엄청나게 넓은 땅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 이곳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땅이라 오상문이나 박강현은 땅 자체가 척박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 지역의 땅들은 비옥했고, 덕분에 엄청난 양의 작물을 수확할 수 있었고.
거기에 소작농일 때는 항상 지주에게 바쳐야 했던 소작료도, 그리고 나라에 바쳐야 하는 세금도 낼 필요가 없으니 이렇게 수확한 엄청난 양의 작물을 고스란히 손에 쥘 수 있었으며, 이 작물들이 워낙 많아 이들이 지은 창고에는 다 보관할 수 없어서 결국 남는 작물들은 원상에 판매했고, 덕분에 짭짤할 이익을 얻기도 했다.
무려 가족들이 1년 가까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식량과 종자를 따로 빼고서도 말이다.
그리고 올해 농사는 이곳에서의 첫 농사이기에 여러 작물을 심기도 했고, 비록 북미왕국의 농업연구소 관리들의 조언이 있기는 했지만,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던 것도 사실이라 내년에는 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으리라 예상했고, 이렇게 식량이 남아도니 오상문과 박강현은 올해 작물을 팔아 확보한 돈으로 내년에 양을 늘려 고기와 함께 양털을 팔아 추가로 소득을 올릴 계획까지 세웠고.
그러니 박강현은 이곳이 아무리 춥다 하더라도 절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으며, 그건 오상문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오상문을 바라보자 오상문은 그런 박강현을 보고 뒷머리를 긁적이다 말했다.
“끙...그래. 아무리 춥다고 하더라도 이 낙원을 떠날 수야 없지.”
오상문의 말에 박강현이 피식 웃었을 때, 뜨거운 물을 조금씩 식혀가며 마시던 오상문은 컵에 든 뜨거운 물을 다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쩝. 그럼 일단 더 추워지기 전에 해삼위를 방문해서 준비를 좀 해야겠는데?”
뜬금없는 오상문의 말에 박강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음? 월동준비는 다 해 뒀잖아?”
“그거 말고. 전에 해삼위를 방문했을 때 북미왕국 선원을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는데, 그 선원이 말하길, 이곳의 겨울은 무척 길고, 이런 긴 겨울을 나려면 세 가지를 꼭 준비해두라고 하더군.”
“세 가지? 그게 뭔데?”
“독한 술과 매운 고추, 그리고 지루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놀잇거리.”
박강현은 오상문의 대답에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흠. 독한 술과 매운 고추는 둘 다 먹으면 열을 내는 것들이니 한겨울에 바깥을 돌아다닐 때 확실히 도움이 되긴 하겠군. 그리고 놀잇거리는...역시 집 안에서만 틀어박혀 있어야 하니 시간을 때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거겠지?”
“그래. 워낙 추워서 바깥 활동이 어려우니 말이야. 그 친구는 최근 북미왕국에서 유행이라는 게임이라는 거나 소설책, 혹은 예전 신문들을 구해 읽는 것이 시간을 때우는데 제격이라더군.”
“예전 신문? 그거 구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나마 가까운 도시인 해삼위에서도 신문을 구하기는 쉽지 않아 서로 돌려보곤 했으니, 예전 신문을 구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박강현의 말에 오상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긴 해. 해서 어렵다 싶으면 책이나...아니면 조금 비싸더라도 북미왕국의 게임이라는 것들을 조금 사 올까 싶어. 그게 아니면 장기판이라도 사 오지 뭐.”
오상문의 대답에 박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해삼위까지는 거의 반나절을 이동해야 하는 만큼, 생각외로 무척이나 추위를 타는 오상문이 가는 것보다 자신이 직접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어 입을 열었다.
“흠. 그럼 내가 대신 갈까? 자네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서 나도 술이나 고추, 시간을 보낼 무언가를 사야 할 것 같으니까...”
박강현은 자신이 가는 김에 오상문이 사려던 것들도 사서 오겠다는 얼굴로 오상문을 바라보자, 오상문은 잠깐 고민하다 거절했다.
“에이. 계속 이곳에 살 거라면 이곳의 기후에도 익숙해져야 하니 내가 자네 집 것까지 사 오지.”
오상문의 대답에 박강현은 피식 웃었다.
“흐. 그런 생각이라면야...알겠네. 잘 부탁하네.”
* * *
“드디어 왜국과의 외교 협상이 끝났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조용한 곰이 건네준 투로시노가 올린 보고서를 받아들면서 중얼거렸다.
“흠.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왜국은 북미왕국을 방문한 뒤로, 북미왕국의 기술력이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파악하고, 조선처럼 매년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고 싶어했다.
하지만, 대규모 사절단을 맞이하는 것은 꽤 번거로운 일이었기에, 북미왕국에서는 단호히 거절했고.
해서 왜국은 차선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새한성에 상주 외교관을 파견하길 원했고, 이것까지 마다할 수는 없었던 북미왕국은 서로 간에 상주 외교관을 파견하는 문제로 협상을 시작했는데, 서로의 의견 차이가 심해 이 협상이 꽤 오랫동안 지체되었었다.
해서 정성국이 이를 언급하자 조용한 곰이 웃으며 대답했다.
“전에도 보고한 것처럼 왜국은 신하에게 전권을 내어준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쇼군이 다른 신하에게 그만한 권한을 내어준다는 것을 꺼렸다고 해야 할까요?”
이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동양에서는 필요할 때 외교 사절을 파견하지 서양처럼 외교관을 타국에 상주시키는 경우는 없으니 이해는 가지만...아무튼, 협상이 끝났다는 소리는 왜국에서 아국의 요청대로 전권 대사를 파견한다는 뜻이겠지?”
“그렇습니다. 전하. 물론 전권을 갖고 있다고 해도 새한성에 주재하는 왜국 대사가 중요한 협상을 할 수 있을 것 같지야 않습니다만...”
타국에 외교관을 비롯한 여러 인원을 상주시키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그러니 북미왕국으로서는 별다른 권한도 없는 외교관을 돈을 들여가며 왜국에 상주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고, 쓸데없는 돈을 들여가며 아무런 권한도 없는 이를 파견할 바에는 서로 상주 외교관을 파견하지 말자고 강하게 나오자 결국 막부는 북미왕국의 의견대로 서로 전권을 위임받은 외교관을 상주시키기로 합의했다.
다만 이렇게 전권을 위임받은 왜국의 외교관이 과연 유럽의 다른 전권 대사들처럼 국왕, 왜국의 경우에는 쇼군을 대리해 외교 협상을 진행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 조용한 곰이 슬쩍 입을 열자 정성국은 크게 상관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뭐 왜국과 중요한 협상을 얼마나 하겠어. 그리고 그런 중요한 협상은 에도에 주재할 아국의 대사에게 맡기면 될 테고. 아무튼, 잘 되었네. 서로 전권 대사를 파견함으로써 왜국과의 외교 문제는 에도 주재 북미왕국 대사에게 맡기면 될 테니 그만큼 투로시노의 부담이 줄어들겠지.”
왜국이 북미왕국에 외교관을 상주시키려는 목적이 북미왕국의 정보 수집에 있다면, 정성국과 외무청에서는 이 기회에 아시아 지역의 대외 무역을 총괄하는 투로시노와 포로나이 외무청의 부담을 최대한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이전에는 괜찮았지만, 북미왕국의 영향력이 점차 아시아에서 확대되면서, 자연스럽게 투로시노는 미친 듯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죠. 다만 여전히 많은 업무를 떠맡고 있는 투로시노라 청나라, 주나라, 동녕국과도 상주 외교관을 파견해 짐을 덜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정식으로 주나라, 동녕국을 하나의 나라로 인정하게 되는 셈이고, 청나라는 엄청나게 난리를 칠 거야.”
“아. 그렇긴 하겠군요. 그럼 당분간은 투로시노가 계속 고생해야겠네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쓰게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당분간은 어쩔 수 없으니 외무청에서 포로나이 외무청을 많이 지원해주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중국 대륙의 상황은 여전하고?”
“예. 여전히 청나라가 우세합니다만...주나라는 사천성의 험난한 지형을 이용해 청나라의 사천 공략을 잘 막아내고 있습니다.”
사천성의 험난한 지형은 유명했기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의 다시 입을 열었다.
“해서 청나라는 방향을 바꿔 호남성과 강서성, 복건성에 집중할 생각인 것 같고, 이번에 유럽 세력이 다시 화약 무기를 동녕국에게 넘겼기에...조만간 커다란 전투가 발생할 테고, 그 결과에 따라 중국 대륙의 판도가 정해질 거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투로시노는 이 전투에서 청나라가 패전한다면, 아국이 개입해 삼국을 중재할 수 있으리라고 하더군요.”
“역시 지금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청나라가 다시 꺾여야 협상이 가능하단 건가.”
“투로시노는 그렇다고 판단하더군요. 해서 뒤로 동녕국이나 주나라에 무기를 지원하는 것도...”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지켜보도록 하지. 어차피 신식 소총을 넘겨줄 수는 없으니 조선에서 무기를 구매해야 하는데, 그러면 결국은 알려질 위험이 있으니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대신 중국 대륙에서 전쟁이 시작되면 정황을 상세히 파악해 보고하라고 전하고.”
“그리하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