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1화
“부르셨습니까. 형님.”
“아. 왔냐.”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정평국이 들어와 정성국에게 말을 건네자 한창 보고서를 살피고 있던 정성국은 보고서를 내려놓고 오랜만에 보는 동생을 반갑게 맞이했다.
예전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함께 식사도 하며 종종 얼굴을 보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정성국도, 정평국도 맡은 업무가 많다 보니, 자주 만나진 못했기에 정성국은 커피를 내리며 정평국과 잠시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러다 정평국이 정성국이 건네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질문을 던졌다.
“헌데 갑자기 무슨 일로 절 부르신 겁니까? 혹시 제가 올린 보고서 때문에 절 부르신 겁니까?”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머릿속에서 정평국이 올린 보고서들을 떠올렸다가 최근에 정평국이 올린 보고서의 내용을 떠올리고 아는체했다.
“보고서? 아. 아국의 경제 규모가 급격히 확대되는 까닭에 화폐가 부족해질 수도 있다는 그 보고서 말이지?”
“예. 해서 슬슬 신용 화폐를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북미왕국의 경제 규모는 매년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최근 본격적으로 북미 대륙 곳곳을 개발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돈이 민간으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여기에 여성, 노인들에게도 연금을 지급하면서 북미왕국 백성들의 구매력은 더욱 커졌다.
그러다 보니 북미왕국 백성들은 소비에 그리 인색하지 않았고, 이렇게 북미왕국 백성들이 소비를 시작하는 상황에서 외국에서도 북미왕국의 각종 교역품에 열광하면서 이를 마구 사들이니 해당 산업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일부 교역품의 경우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공방을 증설하고 이렇게 늘어난 일자리를 채우고자 북미왕국에 합류했지만 그동안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생활했던, 그래서 북미왕국 경제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원주민들까지 대거 고용할 정도가 되었으니 북미왕국의 경제 규모는 미친 듯이 증가할 수밖에 없긴 했고.
이렇게 매년 경제 규모가 급격히 증가하자 당연히 화폐가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화폐가 부족하게 되면 한창 성장하는 북미왕국으로서는 매우 타격이 컸기에 정성국과 청장들은 자국 내 금광 개발뿐만 아니라 동맹국의 금, 은광 개발에도 여러모로 신경을 쓰며 화폐를 주조하는 데 필요한 귀금속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하지만, 북미은행에서는 지금처럼 계속해서 경제 규모가 급격히 커진다면 이렇게 늘어나는 귀금속 생산량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거라 여겼기에 그 대안으로 정성국이 이전에 슬쩍 언급했던 신용 화폐의 도입을 위해 준비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정평국에게 올렸었고, 정평국 역시 이 보고서의 내용에 공감하며 자신의 의견마저 첨부해 보고서를 정성국에게 올렸다.
그 후 정성국이 자신을 불렀기에 정평국은 당연히 이 신용 화폐의 도입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신을 부른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정성국은 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이자 정평국은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고.
이런 정평국의 시선을 받은 정성국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아. 당장은 괜찮아. 당장은.”
“예? 그게 무슨...”
“앙골라 장가에 파견되어 자원 탐사를 하던 개발청 자원 탐사 부서의 장인들이 이번에 브라질 내륙에서 거대한 금맥을 발견했거든.”
“허. 금맥을요?”
“그래. 대충 파악하기로는 엄청나게 묻혀 있다더라. 해서 앙골라 장가에서는 현재 철광을 개발하려는 것을 미루고 이 금광부터 개발하기로 했고.”
정성국도 북미왕국의 경제를 위해서 더 많은 귀금속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앙골라 장가가 건국된 이후 전생에선 포르투갈의 전성기를 이끈 브라질 내륙의 거대한 금맥을 찾기 위해 개발청 자원 탐사 부서의 장인들을 꾸준히 파견했었고.
이 장인들은 정성국이 찍어준 지역을 샅샅이 뒤지며 수많은 광맥을 발견한 끝에 정성국이 기대하던 금맥을 발견했으며, 장인들이 금맥을 발견하자 북미왕국과의 교역을 위해 개발청 장인들이 초기에 발견했던 철광을 개발하던 앙골라 장가는 급히 이 철광 개발을 멈추고 금광을 개발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이 금광은 이들이 원래 개발하려던 철광과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기에 도로 같은 기반 시설들을 건설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테니 곧 금을 캐내기 시작할 거라 예상되었고.
“또한, 시베리아 부족 연합과 호주 연합에서도 기존의 금광 말고 또 다른 금광들을 개발 중이라 조만간 더 많은 금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는 보고가 올라왔거든.”
“허. 그렇습니까?”
정성국의 이야기에 이를 미처 알지 못했던 정평국이 놀란 기색으로 되묻자 정성국이 씩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거기에 호주 연합은 금광만 개발하는 것이 아니야. 이번에 호주 대륙 북동쪽에 거대한 은맥도 발견되어서 이 은도 캐기 위해 광산을 개발 중이거든,”
“와. 호주 대륙에 묻혀 있는 금도 어마어마한데 거대한 은맥도 발견이 되다니...정말 축복받은 땅이네요.”
개발청의 자원 탐사 부서의 장인들은 꾸준히 호주 대륙을 탐사했었고, 그러다 전생의 퀸즐랜드 북서부에서 거대한 은맥도 발견해냈다.
그리고 이렇게 캐내는 귀금속을 전량 북미왕국으로 수출하면서 호주 대륙의 발전에 필요한 각종 자재와 호주 연합의 주민들에게 필요로 하는 생필품을 사들이고 있던 호주 연합은 곧바로 이 은을 캐기 위해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북미왕국은 누에바 에스파냐의 여러 광산에도 투자했기에 누에바 에스파냐의 광산업이 크게 발전했으며, 북미왕국에서는 인력이 부족했기에 광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은 기술자들을 이용해 멕시코 지역을 샅샅이 뒤져 더 많은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애를 썼는데 자카테카스 지역에서 추가로 은맥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대프랑스 전쟁 이후 재정 적자에 시달리던 에스파냐는 이 새로 발견한 은맥에 눈이 돌아가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을 독촉했고, 덕분에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은 원주민들을 대거 동원해 광산을 개발 중이며, 이 광산은 전생에선 세계에서 5번째로 많은 은을 생산했던 광산이기도 하니 꽤 많은 은을 꾸준히 캐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여기에 스웨덴과의 통상으로 화폐로 사용할 수 있는 구리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게 되었으니, 몇 년 정도는 더 금속 화폐로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이를 동생인 정평국에게 설명하자 정평국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흠. 확실히 그렇네요. 신용 화폐로 전환할 때의 혼란을 생각하면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버티는 것이 맞긴 하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외무청, 개발청을 통해 현재 개발되고 있는 광산들에 묻혀 있는 귀금속들의 매장량을 파악해 새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하지요. 헌데 형님.”
“음?”
“그럼 저를 대체 왜 부르신 겁니까?”
정평국의 의문에 정성국이 커피로 목을 축인 후 입을 열었다.
“아. 무선 방송을 준비할 생각이라서 말이다.”
“무선 방송이요?”
정평국은 정성국이 언급한 무선 방송이 대체 뭐냐는 듯한 얼굴을 하자 정성국은 정평국에게 무선 방송의 개념부터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고.
정평국은 커피를 마시며 정성국의 설명을 듣다가, 정성국의 설명이 끝나자 커피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무선 통신을 이용해 백성에게 정보를 전달한다? 흠. 형님께서 말씀하신 가정용 전파 수신기가 충분히 보급되면 신문과 비슷한 영향력을 지닐 수 있을 것 같기야 합니다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정평국의 의문에 정성국이 확신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이지. 가정용 전파 수신기의 부품 중 가장 중요한 진공관은 이미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만큼, 가정용 전파 수신기의 생산은 크게 어렵지 않아. 해서 기존의 공방 하나를 개조해 바로 가정용 전파 수신기를 대량생산할 생각이고.”
“하지만 진공관은 꽤 비싸지 않습니까. 그런 진공관이 여럿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면 가정용 전파 수신기의 가격도 보통이 아닐 텐데...”
정평국의 지적에 정성국이 슬쩍 미소지으며 답했다.
“아. 물론 그렇지. 솔직히 가정용 전파 수신기의 판매가격은 꽤 비쌀 거야. 하지만 아국의 백성들은 부유하잖아? 거기에 국영 상단에서 생산하는 각종 기기를 사들이는 것도 주저하지도 않고. 그러니 잘만 팔릴 것 같은데?”
북미왕국 백성들은 의외로 얼리 어탑터 기질이 있었다.
냉장고, 사진기, 축음기, 전화기 등등을 사용하면서 연구청이 개발하고 국영 상단에서 생산하는 기기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실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괜히 머뭇거렸다가는 물량이 부족해 구매하는 데 고생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북미왕국 백성들은 이렇게 국영 상단에서 새로 발매하는 기기들을 구매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그러니 가정용 전파 수신기도 불티나게 팔리지 않겠느냐는 정성국의 이야기에 정평국이 뒷머리를 잠시 긁적이다 말했다.
“물론 아국의 백성들이 먹는 것 이상으로 국영 상단에서 생산하는 가전기기들을 사들이는 데 주저 없이 돈을 쓰곤 합니다만...신문이 있잖습니까.”
“신문으로 싼값에 국내외의 정보를 알 수 있으니 무선 방송을 위해 값비싼 가정용 전파 수신기를 사지는 않을 것이다?”
“예. 아예 안 팔리지야 않겠습니다만...”
정성국의 말마따나 북미왕국의 백성들은 부유했고, 또 정성국의 말에 따르면 전파를 수신해 음성 신호로 바꾸는 기계이니만큼, 이를 신기하게 여기는 이들이 일부 구매하긴 하겠지만, 신문이 존재하는 이상 정성국의 생각처럼 너도나도 가정용 전파 수신기를 사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 정평국이 고개를 젓자 정성국은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신문과 무선 방송은 달라. 신문은 시각적 매체고, 그렇기에 정보를 획득하려면 시간을 내서 직접 신문을 읽어야 하지. 그에 반면 무선 방송은 청각적 매체라, 듣기만 하면 돼. 그러니 다른 일을 하면서도 정보를 획득할 수 있고.”
정성국의 이야기에 정평국은 잠시 신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중얼거렸다.
“으음.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신없는 주부들에겐 신문보단 무선 방송이 더 낫겠군요.”
정평국의 말에 정성국은 손가락을 튕기며 계속 이야기했다.
“그렇지. 그리고 무선 방송은 신문보다 더 빠르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매체야.”
“더 빠르게요?”
“그래. 신문은 인쇄한 후 배포하는 방식이라 정보를 전달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어. 아무리 최신 정보라 하더라도 전날의 정보에 불과하지. 하지만 무선 방송은 바로 소식을 전달할 수 있다고.”
북미왕국이 점차 개발되면서, 그리고 대다수의 인구가 일부 도시에 집중되면서 이전과는 달리 기삿거리가 많아지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북미신문은 매주 발행되던 주간지에서 매일 발행되는 일간지로 바뀌었기에 예전보다는 더 빠르게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예전보다 정보 전달의 속도가 빨라졌다고는 해도, 일이 벌어졌을 때 즉각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무선 방송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고.
정성국의 설명에서 이를 이해한 정평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흐음...그건 또 그렇군요. 물론 그렇게 신속하게 전달해야 할 만한 소식이 얼마나 있겠느냐는 논외로 하고 말이죠.”
확실히 아직은 신속하게 백성들에게 전달해야 할 만한 소식은 없었기에 정성국은 헛기침하며 무선 방송이 성공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강조했다.
“크흠. 아무튼, 그런 만큼 무선 방송을 들으려고 가정용 전파 수신기를 사려는 이들은 꽤 많을 거야. 그럼 무선 방송의 영향력은 신문과 비등해질 테고.”
정성국의 설명을 들으니 정평국 역시 정성국의 예상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성국의 예상대로 무선 방송의 영향력이 커진다면, 그동안 북미신문을 이용해 백성들을 계도하고 백성들의 통합을 꾀했던 신문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고, 이를 막으려면 결국 무선 방송도 자신이 관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정평국은 안색이 하얗게 질리면서 정성국이 이 문제로 자신을 부른 것이라 생각하고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정성국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끙. 그러니 무선 방송의 관리마저 떠넘기기 위해 저를 부르신 겁니까?”
이에 정성국은 정평국을 보고 조금 미안한 얼굴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 물론 무선 방송을 위한 방송국을 세울 생각이고, 이 방송국 설립에 왕실의 자금을 일부 투입할 생각이기는 하지만...이 방송국 관리까지 너한테 맡길 생각은 없어. 네가 맡고 있는 업무가 워낙 많으니까.”
정평국은 정성국이 자신을 보고 미안한 얼굴을 하기에 당연히 일을 떠넘길 줄 알았는데, 자신이 맡은 업무가 많다는 것을 알고 배려하는 듯 말을 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거 정말 반가운 소리로군요. 형님께서 갑자기 절 부르셔서 무선 방송에 관해 설명하시길래 전 당연히 그 방송국도 제가 관리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럼 절 부르신 건 북미신문을 통해 이 무선 방송을 알리기 위함인 겁니까?”
이에 정성국은 슬쩍 동생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크흠. 관리를 너한테 맡길 생각은 없는데...일단 방송국을 설립하고 방송국이 제대로 굴러갈 때까지는 네가 관여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예?! 그게 무슨...”
망연자실한 정평국에게 정성국은 이미 전파를 송신할 수 있고, 바로 가정용 전파 수신기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빠르게 무선 방송을 시작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신문사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잘 운영하면서 키운 정평국이 방송국 설립과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최선일 것 같아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하자 정평국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휴. 방송국이 제대로 굴러갈 때까지 떠맡으라는 소리는 몇 년 동안은 방송국을 제가 떠맡으라는 소리 아닙니까. 이거 너무한 것 아닙니까?”
“나도 도와줄게. 그리고 너 혼자서 하란 이야기가 아니야. 북미신문의 직원들과 함께하라고.”
정성국의 말에도 정평국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의 형을 바라보다 말했다.
“...그래도 똑같아요. 그럼 방송국 설립에 참여했던 직원 중 상당수를 형님이 방송국에 박아둘 테고, 빠르게 방송국 일에는 손을 뗄 수 있어도 신문사 업무가 많아질 것 아닙니까.”
정평국의 지적에 찔리는 것이 많은 정성국이 다시 동생의 시선을 피하자 정평국은 그런 자신의 형을 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후 이야기를 나누느라 어느새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상황을 보니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으니 바로 북미신문의 직원들과 함께 방송국 설립을 준비하도록 하지요.”
“오! 정말 고맙다! 평국아.”
정평국의 말에 싱글벙글하는 정성국이었고, 그런 정성국을 보고 정평국은 피식 웃으며 집무실을 나서다 한마디 했다.
“대신 이 일이 끝나면 전 휴가를 갈 테니, 제 업무는 형님께서 맡아 주시는 겁니다?”
“어?!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