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7화
“흠. 조선에서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정성국은 커피를 마시다 조용한 곰의 말에 멈칫하며 되물었고.
“그렇습니다. 전하.”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선의 예조판서가 직접 포로나이를 방문해 투로시노를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재 조선에서는 질 좋은 강철을 구하기 어려워 아무리 장인이 많아도 북미왕국이 원하는 것처럼 조총의 대량 생산이 쉽지 않다고 하소연하며 북미왕국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물었고.
여기에 인구가 적어 낙후된 함경도와 이번에 확보한 북방 영토의 개발을 위해선 이 지역들을 잇는 철도 노선이 시급한데 북미왕국도 당장 북미 대륙에 철도를 부설하느라 여유가 없어 우려된다며, 빠르게 철도 부설 공사를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요청과 함께, 북미왕국이 조선에 철도를 부설할 여유가 없다면 자체적으로 철도를 부설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한다며, 이러한 문제들은 조선에 제철소를 건설한다면 대다수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예조판서가 이야기했다는 말에 정성국은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중얼거렸다.
“제철소라...뭐 조선이 제대로 발전하려면 제철소가 필요하긴 하지?”
“그렇지요. 조선에 아국의 건축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하면 조선도 더 많은 강철을 필요로 할 테고, 거기에 연구청의 보고로는 조선이 100마력의 벽을 넘지 못하는 이유도 조악한 조선제 강철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역시 그런가...”
강철은 산업의 쌀이라 불릴 정도로 산업이 발전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인데, 조선은 아직 전통적인 방식으로 강철을 생산하다 보니 강철 생산량도 무척 적고, 품질도 조악했다.
그리고 이런 조악한 강철과 떨어지는 금속 가공 기술로 인해 고출력의 증기기관을 만들어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터지기 일쑤였고.
반면 북미왕국도 그렇지만 잉글랜드 역시 나름대로 제철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었기에 100마력의 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이고 말이다.
그런 만큼, 이대로라면 조선은 결코 잉글랜드의 발전을 따라가긴 어려울 거라는 생각에 정성국이 잠시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다.
조선이 제철소를 건설하고 제대로 운영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조선도 자연스럽게 100마력의 벽을 넘을 수 있다는 뜻이었는데, 이전이라면 조금 꺼려졌지만, 이미 잉글랜드는 100마력의 벽을 넘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만큼, 크게 상관이 없으리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조선이 제철소를 통해 필요한 선로를 생산한다면 북미왕국에서는 핵심 기술자 몇 명만 보내 조선에도 철도를 부설할 수 있고, 조선에 더 많은 철도가 부설되면 그만큼 조선의 발전은 빨라질뿐더러, 더 많은 기차가 필요할 테니 북미왕국으로선 나쁠 것이 없었고.
‘흠. 조선만 너무 편애하지 말고 다른 동맹국들도 어느 정도는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괜찮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정성국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조용한 곰의 시선을 깨닫고 일단 생각을 멈춘 후 입을 열었다.
“그럼 조선에 제철소를 지어주도록 하지. 뭐 조선이 스스로 제철소를 건설하기엔...쉽지 않을 테니.”
제철소를 건설하기는 쉽지 않았고, 조선의 건축 기술로는 제철소 설계도를 던져주더라도 핵심 시설인 용광로 등을 제대로 만들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정성국이 이렇게 이야기하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알겠습니다. 허면 연구청과 이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러게.”
그렇게 대화를 마친 조용한 곰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문득 정성국을 보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네덜란드 대사가 전하께 알현을 신청했습니다만 어쩔까요?”
“네덜란드 대사가? 뭐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알겠네. 내가 따로 시간을 내도록 하지.”
* * *
정성국은 알현을 청한 네덜란드 대사를 만나기 위해 응접실로 향했다.
그리고 응접실의 문을 열었을 때, 정성국의 눈에 들어온 것은 미리 응접실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네덜란드 대사가 아니라 그 주변에 널린 수많은 그림들이었고.
“어라? 이 그림들은...”
이에 정성국은 놀란 얼굴로 응접실에 가득한 그림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네덜란드 대사는 정성국의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멋진 그림들이지요? 마음에 드십니까. 국왕 전하?”
네덜란드 대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신을 차린 정성국은 자연스레 다른 곳으로 향하는 시선을 애써 네덜란드 대사에게 고정하며 대답했다.
“마음에 들다마다요. 이거 다 렘브란트의 그림들 아닙니까?”
“하하하. 역시 전하께서는 알아보시는군요. 맞습니다. 여기 있는 그림들은 전부 아국의 뛰어난 화가인 렘브란트의 그림들이지요.”
정성국은 렘브란트의 그림을 꽤 좋아했기에 왕실 상단을 통해 여러 점의 그림을 사들였고, 일부는 궁에 걸어 감상하곤 했다.
그렇기에 정성국은 응접실에 널린 이 수많은 그림이 전부 렘브란트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다만 정성국이 정말 궁금해한 것은 왜 수십 점에 달하는 렘브란트의 그림들이 이 응접실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기에 네덜란드 대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헌데 이 그림들이 왜 여기 있습니까?”
네덜란드 대사는 이런 정성국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정중한 태도로 정성국에게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번에 암스테르담에서 도착한 연락선을 통해 아국의 총독께서 북미왕국의 국왕 전하께 보낸 선물입니다.”
“음? 선물이라고요?”
정성국은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시선으로 네덜란드 대사를 바라보자 네덜란드 대사가 부연 설명했다.
“예. 이번에 정식으로 동맹을 맺은 것을 기념하는 의미이자, 북미왕국의 왕실 상단에서 아국에 대규모 투자한 것을 감사하는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보낸 선물이지요.”
그제야 지금 이 응접실에 왜 이런 그림들이 널려 있는 건지 이해한 정성국이었다.
정성국은 최근 왕실 상단을 움직여 네덜란드를 비롯해 여러 동맹국에 대규모 자금을 투자했었는데, 다른 나라와는 달리 덴마크와 네덜란드의 경우는 이번 대규모 투자로 인해 엉망이 되어 버린 자국의 경제 사정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대프랑스 전쟁의 패전으로 잃었던 민중의 지지를 조금이나마 회복하고 나라를 안정시킬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만큼, 자신의 투자 결정에 감사하는 의미로 이런 선물을 보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다만 정성국은 당장은 이름값이 꽤 떨어진 상태였지만 후대에 다시 재평가받으면서 그림 가격이 엄청나게 오를 것이 뻔한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그냥 선물로 받기엔 양심이 찔린 탓에 중얼거렸다.
“허. 굳이 선물까지 보낼 필요는 없는데...”
그리고 정성국의 중얼거림에 네덜란드 대사는 정성국이 선물을 거절할까 봐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번에 북미왕국의 왕실 상단에서 아국에 투자해준 덕분에 대프랑스 전쟁의 패전으로 막대한 손해를 보고 총독에게 은연중에 반발하던 일부 상인들을 다시 포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감사하는 마음에서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보낸 겁니다.”
렘브란트는 한때 유명한 초상화가였지만, ‘야경’이라는 기존의 초상화와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면서 그 명성을 잃었고, 그 이후에도 렘브란트는 열정적으로 작품활동을 이어나갔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옛 명성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헌데 이런 렘브란트의 그림을 북미왕국의 왕실 상단이 비싼 값에 꾸준히 매입하기 시작하자 정성국이 렘브란트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렇게 왕실 상단에서 사들인 렘브란트의 그림들이 북미왕국의 궁 안과 새한성의 미술관에 계속 전시되었으며, 정성국이 새한성의 미술관을 방문할 때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감상하자 유럽의 미술계에서는 이 소문을 정설로 받아들였다.
그러다 보니 빌럼 3세도 정성국에게 어떤 선물을 보낼까 고민했지만, 아무리 부유한 네덜란드라 하더라도 북미왕국의 절대 군주이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고 소문난 정성국에게 보낼만한 선물이 마땅치 않아 결국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낸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정성국은 네덜란드 대사의 반응에서 이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중에 빌럼 3세가 억울해하지 않게 두둑하게 답례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흠. 그렇다면 굳이 마다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니 선물은 잘 받았고, 무척 만족했다고 빌럼 3세에게 전해주었으면 고맙겠군요.”
“그야 물론입니다.”
정성국의 대답에 만족한 네덜란드 대사는 활짝 웃었고.
그 후 정성국은 네덜란드 대사와 커피를 마시며 응접실에 널린 수십 점의 그림을 함께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빌럼 3세가 보낸 렘브란트의 그림은 이 응접실에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이를 다 꺼내놓기엔 공간이 부족해 그림이 가득한 상자 대부분을 그대로 호위대원들에게 넘겼다는 이야기에 기함했고.
해서 정성국은 네덜란드 대사가 응접실을 떠난 후 집무실로 돌아가지 않고, 네덜란드 대사가 가져왔다는 그림이 들어 있는, 호위대원들이 보관 중인 상자들을 열어 안에 들어 있는 그림들을 하나씩 감상했고, 거의 200여 점에 달하는 상자 안의 그림을 모두 감상한 후에 정성국은 그림을 내려놓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 왕실 상단에서도 알음알음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그림들이 네덜란드에 있을 줄은 또 몰랐는데?”
지금껏 정성국이 왕실 상단을 움직여 구한 렘브란트의 그림만 해도 거의 200여 점에 달했고, 이쯤 되자 더는 네덜란드에서 렘브란트의 그림이 보이지 않았기에 이게 전부인가 싶었는데, 이렇게 많은 그림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정성국이 놀라자 함께 호위 업무와 함께 최근엔 왕실 비서관의 일도 일부 맡고 있는 호위대장이 슬며시 대답했다.
“아무리 왕실 상단에서 그림 가격을 후하게 쳐준다 하더라도 귀족들의 수장고에 들어간 그림까지 구해오긴 쉽지 않잖습니까. 뭐 아국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하급 귀족들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빌럼 3세가 직접 움직였기에 네덜란드의 대귀족이나 대상인들의 수장고에 틀어박혀 있던 그림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거군?”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말이 총독이지 네덜란드의 강력한 군주이니만큼...”
물론 대프랑스 전쟁의 패배 이후 빌럼 3세의 권력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아직 네덜란드의 총독이었고, 지휘하는 병력도 많은 터라 위세는 대단했다.
그러니 이런 그림을 모으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 정성국은 호위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흠. 아무튼, 덕분에 이렇게 좋은 그림을 많이 확보할 수 있어 다행이야. 가뜩이나 요새 각 지역에 미술관이 건립되어 전시할만한 그림이 꽤 부족해 걱정이었는데 말이지.”
왕실 상단에선 꾸준히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매입하고 있었지만, 북미왕국 백성들의 문화생활을 위해 지역마다 커다란 미술관을 건설했기에 이를 채우는 것도 일이었다.
그러니 이번에 빌럼 3세가 보낸 이 250여 점의 그림들은 꽤 도움이 될 거라 여겨 정성국이 미소를 짓자 호위대장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 그림 모두를 미술관으로 보낼까요?”
“흠. 일단 선물이니 몽땅 미술관으로 보내기는 그렇고...이것과 이것, 그리고 이것까지 총 3점의 그림은 궁에 장식하도록 하지.”
정성국은 그림을 감상하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3점의 그림을 가리키자 호위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호위대원들에게 정성국이 가리킨 그림들을 들게 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그림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단 새한성 미술관으로 보낸 후, 그곳에서 다른 지역의 미술관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번 선물은 북미왕국과 네덜란드가 정식으로 동맹을 맺은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다고 했으니...따로 빌럼 3세에게도 선물을 보내게.”
훗날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유럽 회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화가로 알려지는 렘브란트의 그림 250여 점을 그냥 꿀꺽하기엔 양심에 찔렸던 정성국이 빌럼 3세에게 답례품을 보내라고 이야기하자 호위대장이 물었다.
“어떤 선물을 보낼까요?”
“뭐 똑같이 그림을 선물해 주기엔 내어 줄 만한 그림이 많지 않으니...왕실 화가가 그린 동양화 몇 점하고, 그 외엔 최고급 모피나 진주 같은 사치품을 적당해 채워서 보내도록 하게.”
정성국은 조선의 재능 있는 화공들은 따로 초청해 왕실 화가로 임명해 작품활동을 지원했고, 그들이 그린 그림들은 왕실 수장고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니 왕실 화가가 그린 동양화라면 빌럼 3세도 이국적이라 여겨 나름대로 만족할 테고, 그 외에는 값비싼 사치품을 내어 주는 것이 오히려 빌럼 3세도 좋아하리라 여긴 정성국의 말에 호위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