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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696화 (696/850)

696화

“그게 참말입니까?”

상석에 앉아 있던 유철이 이번에 조선 사절단의 정사로서 북미왕국을 방문했던 호조참판을 바라보며 되묻자 호조참판은 조금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새한성에서 푸른 안개에게 들은 이야기니 말입니다.”

“허어. 푸른 안개에게 들었다면 정말이라는 소린데...”

유철의 중얼거림에 사랑방에 있던 다른 조정의 고위 관리들도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인급 함선과 비슷한 크기의 배를 증기기관의 힘만으로 움직였다라...이거 놀랍구려.”

“예. 아직 아국은 인급 함선보다 훨씬 작은 조운선을 움직이는 것이 전부니까요.”

북미왕국을 방문한 호조참판은 조선 사절단을 안내해주는 푸른 안개와 자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푸른 안개와 대화를 하던 도중에 잉글랜드에서 500톤급 증기선 건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이에 호조참판은 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증기기관 기술이 가장 뛰어난 나라가 북미왕국이고, 이런 북미왕국에서 처음으로 개발한 증기기관의 설계도를 받았으며 조선과 북미왕국 간의 특별한 관계 덕분에 조선의 장인들은 간혹 조선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미왕국을 방문해, 여러 공방을 들러 다양한 종류의 증기기관과 기계들을 관찰하며 얻는 것이 꽤 많았고, 실제로 북미왕국의 공방을 따라 증기기관의 동력을 이용하는 장치들도 여럿 개발한 만큼 조선의 고위 관리들은 은연중에 북미왕국을 제외하면 조선의 기술 수준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헌데 조선은 아직 인급 함선보다 훨씬 작은 조운선을 제외하면 그 이상의 조운선은 기범선 형태로 만들지 않으면 제대로 써먹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잉글랜드는 이미 인급 함선 정도의 거대한 선박을 오로지 증기기관만으로 움직인다고 하니, 잉글랜드보다 훨씬 뒤처진 느낌이 들어 충격을 받은 것이다.

거기에 조선이 북미왕국을 방문해 유럽 각국의 대사를 만나면서 유럽 정보를 알음알음 수집했었는데, 분명 처음 유럽 정보를 수집했을 때만 하더라도, 조선에서 만든 증기기관의 성능이 더 낫다고 여겨졌기에 충격은 더욱 컸고.

해서 호조참판은 조선에 돌아와 조선의 국왕인 이연을 알현해 복귀했음을 신고한 후 바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개화파 관리들에게 이를 알린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개화파 관리들은 호조참판의 이야기에 내심 충격을 받은 눈치로 웅성거리자 공조판서가 입을 열었다.

“음...이거 면목이 없군요.”

“예?”

“아국의 장인들은 북미왕국에서 처음으로 개발한 증기기관 설계도를 가지고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발전이 없는데 잉글랜드는 벌써 인급 함선 정도 크기의 기선을 성공적으로 건조했으니...”

북미왕국의 배려로 증기기관의 설계도를 얻은 후 이를 연구한 지도 벌써 10년이 흘렀지만, 증기기관의 개량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특히 북미왕국은 증기기관을 개발한 지 10년 만에 인급 함선보다 큰 지급, 천급 함선도 기선으로 개조할 정도로 증기기관 기술이 급격히 발전했다는 것을 아는 공조판서로서는 지지부진한 증기기관 개량 성과에 개화파 관리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고.

이에 유철이 공조판서를 보고 손을 내저었다.

“아니지요. 아국은 증기기관을 연구한 지 겨우 10년이 넘었을 뿐이지만 유럽은 오래전부터 증기기관을 만들고 연구해오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북미왕국도 유럽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며 늘 경계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유럽도 본격적으로 증기기관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저희와 비슷한 시기일 텐데 아국의 기술 수준이 잉글랜드보다 뒤처진 것은...”

유철을 비롯한 다른 고위 관리들이 공조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해도 공조판서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자 유철이 그런 공조판서를 달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비슷한 시기에 연구를 시작했다 하더라도, 유럽은 그동안 증기기관을 연구하던 인력이 있었겠지만, 아국은 백지에서부터 시작한 셈 아닙니까. 그리고 아국의 장인들이 노력한 덕분에 증기기관의 성능이 꾸준히 향상되고 있으니 누가 공조를 탓하겠습니까.”

“맞습니다. 백지에서 시작한 상황에서 잉글랜드를 제외한 다른 유럽 나라들의 증기기관 수준과 비슷한 성능의 증기기관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공조와 장인들의 노력 덕분일 겁니다. 그러니 너무 괘념치 마시지요.”

유철에 이어 예조판서까지 나서서 공조판서를 달래자 공조판서는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 결심한 눈빛으로 방 안에 있는 개화파 관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후우. 알겠습니다. 허나 잉글랜드가 먼저 한발 나아간 이상, 다른 유럽 나라들도 아국의 기술을 앞지를까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라...”

“으음...”

공조판서의 말에 유철을 비롯한 다른 관리들이 신음을 흘렸다.

그들도 잉글랜드가 500톤급 기선을 건조했다는 공조판서의 말을 듣고 은연중에 왜 북미왕국이 유럽을 그렇게 경계했는지를 깨달음과 동시에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나라들에 추월당할까 봐 내심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증기기관 연구에 더 많은 인원과 재물을 투입할 수 있게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공조판서의 요청에 방 안에 있던 고위 관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눈 후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흐음. 그러시지요. 어차피 재정적으로는 꽤 여유가 있는 상황이니 전폭적으로 공조를 지원해드리리다.”

북미왕국의 지원으로 운산, 단천 등지에 개발한 여러 광산에서 금, 은을 비롯한 귀금속이 쏟아져나왔을뿐더러 최근에 북미왕국의 주선으로 청나라에 묵혀 두었던 조총을 대거 넘긴 대가로 큰 이득을 거두기도 했기에 재정적으로는 충분히 여유 있는 상황이었고.

해서 호조판서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전폭적인 지원을 해 줄 테니 재물 따윈 걱정하지 말고 더 많은 장인을 모아 증기기관을 연구하라고 이야기하자 공조판서는 호조판서에게 고맙다는 눈빛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예. 그리고 어떻게든 북미왕국을 설득해 제철소를 건설했으면 합니다.”

“제철소를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고출력의 증기기관을 만들려면 질 좋은 강철이 필수적이니까요. 그리고 아국도 북미왕국처럼 언젠가 철선을 건조해야 할 텐데, 철선을 건조하려면 대량의 강철이 필요한 만큼, 기존의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은 아시잖습니까.”

북미왕국을 보면 기술이 발전할수록 강철 소모량이 폭증할 것이 분명한데 아직 조선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강철을 만들고 있었기에 생산량의 한계가 명확했다.

해서 공조에서는 북미왕국의 제철소를 견학한 장인들을 모아 조선에도 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해 연구 중이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고.

여기에 목조선의 경우 크기를 키우는 것에 한계가 있기에 조선에서도 최근 일부 선박 장인들을 모아 철선을 연구하기 시작한 상황이라 제철소의 건설이 시급한데, 제철소 연구엔 별다른 진전이 없으니 공조판서는 차라리 북미왕국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이야기했고, 공조판서의 설명에 유철이 난감하다는 얼굴을 했다.

고위 관리들은 한 번쯤 조선 사절단의 정사로 북미왕국을 방문했기에, 북미왕국의 제철소 역시 방문해 보았고, 빨간 쇳물이 끊임없이 나오는 모습에 감탄한 조선의 관리들은 은근슬쩍 북미왕국에 조선에도 이런 제철소를 세우고 싶다고 이야기했었지만, 북미왕국에선 계속 제철소를 확장하고 추가로 건설해야 하는 터라 그럴 여유가 없다며 매번 손을 내저었으니 말이다.

“그야 그렇지요. 허나 북미왕국에서 과연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지는 모르겠군요.”

“그래도 어떻게든 설득하면...”

공조판서의 말에 유철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자 호조참판이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인지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면 원래 북미왕국은 경부선과 경의선 말고도 전라도, 함경도까지의 노선을 추가로 부설해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더불어 이런 간선노선뿐만 아니라 지선노선의 부설에도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었고요.”

호조참판의 말처럼 북미왕국은 조선에 철도를 부설하면서 일차로 경부선과 경의선을 건설해 의주와 부산을 대각선으로 잇고, 후에는 전라도의 나주와 함경도의 경성도호부를 대각선으로 이어 X자로 간선노선을 건설한 후, 이 간선노선과 연결되는 지선노선을 계속 부설하면 철도를 이용해 조선 전역을 하루 만에 이동할 수도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었다.

물론 북미왕국에도 수많은 노선을 건설해야 했는데, 이를 미루고 조선 전역에 노선을 부설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간선노선에 해당하는 전라도, 함경도까지의 노선이나 수많은 지선노선을 당장 부설하기는 어렵지만, 사정이 나아지면 바로 부설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조선과 북미왕국이 특별한 관계라 하더라도 북미왕국으로서는 자국의 발전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조선의 관리들도 알기에 충분히 이해한다면서 몇십 년씩 기다리게만 하지 말아 달라고 웃으며 이야기했었고.

헌데 막상 조선에 철도가 부설되고 기차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그리고 이 기차를 이용해 수많은 물자를 편하고 빠르게 실어나를 수 있게 되면서 철도가 얼마나 유용한지 실감하게 되자 조선의 관리들은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조선 전역에 철도를 부설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며 하루라도 빨리 북미왕국에서 추가 노선을 부설해주기를 원하며 은근슬쩍 눈치와 압박을 주고 있었다.

언제쯤 추가로 노선 공사를 시작하느냐고 묻거나 미리미리 철도 노선을 들어설 지역을 사들인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호조판서가 제철소 건설 문제를 논의하다 이 이야기를 꺼내자 예조판서는 호조판서가 무슨 의미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를 짐작하고 입을 열었다.

“으음...북미왕국에 정식으로 추가 노선을 건설해달라고 요청하고, 북미왕국에서 선로의 부족을 이유로 거절하면 이를 빌미로 아국에 깔릴 선로는 아국에서 생산할 테니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도록 기술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하자는 겁니까?”

“정확합니다. 예판대감. 듣자니 북미왕국은 계속해서 노선을 확대할 예정이라고 하더이다. 북미 동해안과 북미 서해안을 따라 철도를 부설하고, 이후엔 북미왕국 내륙을 관통하는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내륙 노선도 건설할 예정이라더군요. 그뿐만 아니라 여러 지선 노선들도 추가로 건설할 예정이라고 하고요.”

호조판서의 말에 병조참판이 신음을 흘렸다.

“허어. 그렇게 되면...”

“예. 그렇게 되면 아국의 노선 공사는 계속 미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북미왕국은 자국의 철도 부설이 끝나면 조선에 철도를 부설해주겠다고 이야기하긴 했는데...아시잖습니까. 북미왕국의 영토가 얼마나 넓은지는.”

“그야...그렇지요.”

북미대륙 전체를 점유하고 있는 북미왕국이었다.

물론 북미왕국의 백성들이 이 넓은 영토에 흩어져 사는 것이 아니라 주로 해안가와 미시시피 강을 따라 살고 있는 만큼, 북미대륙 전역에 촘촘하게 철도를 부설하지야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대공사가 될 것은 분명했고, 아무리 북미왕국이라 해도 단기간에 철도 부설을 마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은 조선의 관리들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 호조판서의 말에 방 안에 있던 조선의 관리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런 관리들의 반응에 호조판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기에 아국은 새로 북방 영토를 획득했고, 이 광활한 지역을 제대로 개발하고 또 통치하려면 철도는 필수입니다. 문제는 북방 영토가 넓은 만큼 철도 부설에도 꽤 오랜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는데, 북미왕국 본토의 철도 부설이 끝나기를 기다린 후 함경도까지 철도를 부설하고, 또 북방 영토까지 철도를 부설하려면 수십 년의 세월이 걸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러니 이를 지적하며 철도 부설 공사가 너무 늦춰지는 것이 우려스러우니 자체적으로 철도를 부설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도와달라고 요청한다면 북미왕국에서도 마냥 거절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호조판서의 말이 끝나자 다른 관리들은 신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을 때 병조판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은 방법 같습니다. 북미왕국도 아국이 북방 영토를 제대로 통치하는 것을 원하잖습니까. 그러니 이를 위해서 철도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면 북미왕국에서도 결국 제철소 건설을 도와주리라 봅니다.”

“으음...”

“그리고 제철소가 건설되어 양질의 강철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면 더 손쉽게 조총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까지 강조한다면야...”

북미왕국은 동맹국에 무기를 지원할 때 주로 조선의 조총을 구매해 동맹국에 넘겼다.

전장식 머스킷 따위야 북미왕국에서도 충분히 생산할 수 있었지만,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북미왕국으로서는 굳이 전장식 머스킷을 생산하는 공방을 따로 세워 동맹국에 지원하기보단, 조선의 조총을 구매해 넘기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던 탓이다.

더불어 조선의 무역 적자를 조금이나마 해소해주기 위한 방책이기도 했고.

그리고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조선의 기술 수준도 많이 나아져서 양질의 조총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북미왕국이 점차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더 많은 조총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었는데, 조선의 조총 생산량을 마구 늘리기엔 여러 문제가 있는데 제철소를 건설한다면 이러한 문제를 쉬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고, 그러니 이 점을 강조한다면 북미왕국도 결국 조선의 요청을 수락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병조판서의 말에 유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으음. 확실히 일리가 있구려. 그럼 예조판서께서 수고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 하지요. 바로 투로시노를 만나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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