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9화
정성국은 크리스티안 5세와 함께 페로 제도를 방문한 빌럼 3세와 인사를 나누었고.
선착장에서 서로 통성명을 끝낸 셋은 다시 왕실 전용 여객선에 올랐다.
크리스티안 5세도 그렇고 빌럼 3세도 그렇고 페로 제도를 방문한 목적은 정성국과의 친분을 쌓는 것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 후 왕실 전용 여객선의 응접실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점심까지 함께한 셋은 저녁 식사 전까지 잠시 개인적인 시간을 갖기로 했고.
저녁이 되면 다시 크리스티안 5세와 빌럼 3세에게 시달려야 할 테니 일단 휴식이 먼저라고 생각한 정성국이 침대에 누웠을 때, 호위대장이 선실로 들어 빌럼 3세가 개인적으로 만남을 청한다는 이야기에 한숨을 내쉬며 빌럼 3세를 데려오라고 말하며 아늑한 침대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피곤한 정신을 달래기 위해 평소와는 달리 달달한 코코아를 마시던 정성국은 호위대장의 안내를 받아 빌럼 3세와 통역사가 응접실로 들어오자 자리를 권했고.
빌럼 3세는 응접실에 앉자마자 통역을 통해 개인적으로 만남을 청한 이유를 밝혔다.
“저희 네덜란드도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고 싶습니다.”
“흠. 크리스티안 5세에게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군요.”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눴을 때나, 점심을 함께했을 때는 친분을 쌓기 위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지, 북미왕국이 덴마크와 동맹을 맺었다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었기에 정성국이 중얼거리자 빌럼 3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게 배정된 선실이 크리스티안 5세가 머무는 선실의 맞은편이다 보니 잠깐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에서 북미왕국이 덴마크-노르웨이 왕국과 동맹을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네덜란드도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고 싶다고 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만, 탐욕스러운 루이 14세를 생각해보면 네덜란드는 여전히 위태롭습니다. 그러니 북미왕국과 어떻게든 동맹을 맺어 안전을 보장받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빌럼 3세의 대답에 정성국은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글쎄요. 아무리 루이 14세라 하더라도 현 유럽의 정세에서 다시 네덜란드를 공격하지는 못할 텐데요?”
이번 대프랑스 전쟁의 결과는 유럽 각국의 군주들과 귀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프랑스가 강력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프랑스의 인접국인 에스파냐, 신성로마제국, 네덜란드가 동맹을 맺고 함께 덤볐는데도 밀릴 줄은 몰랐으니까.
그러니 다른 유럽 국가들은 프랑스에 강한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프랑스가 또다시 세력을 확장하려 들면, 다른 유럽 국가들이 이를 그냥 두고 볼 리 만무했다.
특히 잘나가는 국가를 함께 때려 박살 내는 것이 바로 유럽의 전통 아니겠는가.
그러니 정성국은 프랑스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으리라고 보았지만, 빌럼 3세는 정성국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그 말도 맞긴 합니다만 루이 14세는 오만합니다. 그리고 이번 전쟁을 통해 다른 여러 나라가 연합한다고 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러니 루이 14세라면 머지않은 시기에 다시 네덜란드를 노릴 거라고 생각하고, 네덜란드를 지키기 위해선 루이 14세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북미왕국과의 동맹을 맺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서 제가 이렇게 페로 제도를 방문한 거지요.”
“흠. 동맹이라...”
정성국은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보았다.
네덜란드에는 부유한 상인들과 시민들이 많아 북미왕국의 사치품을 꽤 많이 소비하기도 했고,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전 유럽에 손을 뻗어두었기에 북미왕국의 사치품을 사들여 다른 곳에 비싸게 넘기는 중개무역을 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사치품을 사들이고 있었는데, 대프랑스 전쟁이 시작되면서 프랑스의 함대가 암스테르담을 함락시키기 위해 네덜란드의 해안가를 어슬렁거리다 보니 무역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북미왕국도 일부 손해를 보긴 했다.
그러니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는다면 교역량은 안정적으로 증가할 테고, 네덜란드도 중개무역으로 이득을 보긴 하겠지만, 막대한 양의 사치품을 수출하는 북미왕국의 이득도 큰 만큼,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한 정성국이었고.
다만 몇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는데, 다른 자잘한 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정성국은 네덜란드의 식민지 정책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네덜란드는 식민지의 원주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편이었으니까.
거기에 향신료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조절하기 위해 현지 주민들이 피해를 보든 말든 섬 전체를 불태우기도 했고.
이 때문에 정성국은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한 이후 외무청에 현지 세력들과 우호를 다지라고 명령을 내렸고, 그렇게 현지 세력들과 친분이 깊어지면 상황을 봐서 여러 지원을 통해 네덜란드 세력을 동남아시아에서 몰아낼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으면 아무래도 이런 공작을 하긴 곤란했기에 정성국이 잠시 고민하다 일단 입을 열었다.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덴마크와 맺기로 한 동맹은 공수 동맹이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나중에 덴마크가 스웨덴에 선전포고했을 때, 괜히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요.”
“하하하.”
“그러니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는다 하더라도 동맹의 성격은 방어 동맹이 될 겁니다. 타국이 네덜란드 본토를 침공했을 때만 돕는.”
이에 빌럼 3세는 당황하며 정성국을 바라보다 슬쩍 질문을 던졌다.
“어...네덜란드 본토요? 그럼 식민지는...”
“당연히 해당 사항이 없지요.”
덴마크와 스웨덴은 앙숙이라는 사실은 빌럼 3세도 잘 알고 있었기에 괜히 덴마크와 공수 동맹을 맺었다가 이러한 관계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아 동맹의 성격을 방어 동맹으로 한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네덜란드와의 동맹의 성격도 방어 동맹으로 한정시키려는 것까지는 이해했다.
다만 방어의 대상이 본토로 한정되는 것은 너무 아쉬운 빌럼 3세였다.
네덜란드의 식민지는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에 걸쳐 곳곳에 존재했고, 이 식민지들을 지키기 위해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고 있었다.
헌데 대프랑스 전쟁으로 네덜란드 본토의 1/3이 초토화되고 폐허가 된 본토를 복구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어야 하니 이 식민지들을 지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빌럼 3세는 걱정이 많았다.
헌데 북미왕국은 최근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에 진출하려 들었으니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는다면 본토의 안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지역은 몰라도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의 식민지는 손쉽게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헌데 정성국은 동맹을 맺는다고 해도 방어 대상은 네덜란드 본토에 한정해버린다고 이야기하니 결국 식민지들은 북미왕국의 도움 없이 네덜란드의 힘만으로 지켜야 하는 터라 영 아쉬웠던 빌럼 3세는 슬쩍 정성국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정성국은 빌럼 3세가 식민지를 언급하자 단호하게 끊고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눈빛을 보내오자 빌럼 3세는 아쉬움을 애써 삼킬 수밖에 없었고.
“아. 알겠습니다.”
빌럼 3세의 대답에 정성국이 덧붙였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타국을 침공하거나, 아국과의 동맹 관계를 이용해 타국을 압박한다면 바로 동맹을 파기할 생각이고요. 이를 받아들이겠다면 네덜란드와도 동맹을 맺도록 하지요.”
“예? 타국을 침공하면 바로 동맹을 파기하겠다고요?”
“그렇습니다. 네덜란드가 타국을 침공한 후 적국의 병력을 본토로 유인해 아국의 참전을 유인할 수도 있잖습니까.”
“아...”
“더불어 네덜란드가 침공한 나라가 아국의 우호국일 수도 있으니, 네덜란드와 동맹을 유지하게 되면 아국의 우호국이었던 나라는 동맹국의 적국이 되는 셈이고, 아국의 외교 관계는 엉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한 조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끙...”
빌럼 3세는 정성국의 설명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은 했지만,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북미왕국의 동맹국이 되면 영토 확장은 불가능해지는 셈이었으니까.
다만 현 네덜란드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기에, 일단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어 기반을 다지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에 빌럼 3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받아들이지요.”
“좋습니다. 그럼 여러 세부 사항들을 논의해볼까요?”
* * *
이틀 동안 왕실 전용 여객선의 응접실에서 크리스티안 5세, 그리고 빌럼 3세와 번갈아 가며 만나 덴마크-노르웨이 왕국과 네덜란드와의 동맹 조약의 초안을 작성한 정성국은 세부적인 협상은 외무청에 맡기기로 하고 손을 털었고.
일이 끝나자 홀가분해진 정성국은 바람을 쐴 겸 크리스티안 5세와 빌럼 3세의 요청에 따라 토르스하운 외곽에 위치한 공항으로 이동했는데, 공항으로 이동하기 위해 왕실 전용 여객선에 있던 자동차를 꺼내자 이를 보고 크리스티안 5세와 빌럼 3세가 눈을 빛냈다.
“와. 끝내주는데?”
“정말...멋지군요. 이게 그 자동차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이게 자동차지요.”
정성국도 그렇고 청장들도 관용차를 타고 다니는 만큼, 자동차의 존재도 어느 정도는 알려졌기에 크리스티안 5세나 빌럼 3세가 자동차의 존재를 아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사진이나 그림으로 보았던 것과는 달리 실제로 목격한 자동차는 훨씬 고풍스러웠고, 또 멋있어 보였기에 크리스티안 5세나 빌럼 3세는 눈을 빛내며 자동차를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했고.
정성국은 그런 둘을 끌고 차 안에 앉힌 후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기 시작했고.
둘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정성국을 보고 무척 부럽다는 시선을 보내며 질문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그거 운전은 쉬워?”
“익숙해지면야 쉽지. 처음엔 어렵고.”
“그래?”
“응. 그래서 북미왕국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제대로 교육을 받고 면허도 따야 해.”
“호오...그 경운차 면허와 비슷해?”
정성국은 크리스티안 5세의 말에 놀라 옆자리에 앉아 있는 크리스티안 5세를 흘깃 보며 물었다.
“음? 경운차 면허를 알아?”
“그럼. 경운차가 꽤 탐나서 알아봤었지.”
북미왕국이 막대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경운차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리고 경운차가 건설 장비의 모태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타국은 이 경운차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다만 크리스티안 5세가 그런 세부적인 사항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을 뿐이고.
“그래. 뭐 경운차 면허와 비슷하지.”
그때 뒤에 앉아 있던 빌럼 3세가 물었다.
“혹시 이 자동차를 판매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타국에요? 없습니다.”
“끙...”
빌럼 3세가 정성국의 말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크리스티안 5세도 투덜거렸다.
“아. 이건 정말 탐나는데...”
“탐나면 직접 만들던가.”
정성국의 말에 크리스티안 5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이걸 무슨 수로 만들어. 이거 경유기관으로 움직이는 거 아냐?”
북미왕국에서 경유기관의 정보를 차단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경유기관이 건설장비에 탑재되면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다 보니 경유기관의 이름과 경유기관은 증기기관과는 달리 보일러가 필요 없다는 것 정도는 알려졌기에 크리스티안 5세는 자동차를 살펴보고 경유기관으로 움직인다고 확신하며 묻자 정성국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긴 한데 이거 증기기관으로도 만들 수 있어.”
“어? 그래?”
“그럼. 뭐 보일러 때문에 크기가 조금 커지기야 하겠지만 말이지.”
“으음...”
정성국의 말에 크리스티안 5세는 돌아가자마자 증기기관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자동차 개발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빌럼 3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네덜란드의 증기기관 기술은 좋지 않은 터라 이를 만들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도와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도와달라고요?”
“예. 잉글랜드는 이미 증기기관만으로 움직이는 기선을 건조했는데 저희는 기껏해야 나룻배 수준의 배만 움직일 수 있다 보니 너무 막막해서 말입니다.”
“아. 그건 그래. 동맹국인데 조금 도와주면 안 되나? 증기기관 개발이 생각보다 지지부진하던데.”
이에 정성국은 잠깐 고민했지만, 이미 잉글랜드는 본격적으로 증기기관을 이용하고 있었고, 타국도 이 사실을 알고 증기기관 기술을 빼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니 다른 나라들도 곧 잉글랜드의 증기기관과 비슷한 수준의 증기기관은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는 만큼, 적당한 대가를 받고 이를 넘겨주는 것도 나쁠 것은 없어 보여 말했다.
“흠. 충분한 대가를 지급한다면 도와줄 수 있지.”
“헉! 정말?”
“그게 정말입니까?”
크리스티안 5세와 빌럼 3세가 화들짝 놀라 정성국을 바라보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이 은혜 잊지 않을게.”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반응에 괜히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정성국은 애매한 미소를 짓다가 저 멀리 보이는 공항을 보고 말했다.
“아.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