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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688화 (688/850)

688화

북미왕국의 연락선 갑판에서 망원경을 통해 페로 제도에 정박해 있는 철선들을 보고 감탄을 연발하던 네덜란드의 총독 빌럼 3세는 문득 한 철선의 태극기 밑에 걸려 있는 깃발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어? 저 깃발은...”

“올덴부르크 가문의 깃발입니다.”

마찬가지로 망원경으로 페로 제도의 선착장을 살펴보던 빌럼 3세의 보좌관이 곧바로 대답하자 빌럼 3세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올덴부르크 가문? 그럼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5세가 방문한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덴마크에서도 페로 제도에 대사를 파견했으니 북미왕국 국왕이 페로 제도를 방문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보좌관의 대답에 빌럼 3세는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페로 제도를 방문했다는 거군.”

“예. 덴마크도 우리 네덜란드처럼 북미왕국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말입니다.”

대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프랑스와 적대했던 나라들의 타격은 컸다.

그나마 에스파냐 정도가 큰 피해 없이 수습할 수 있었을 뿐.

그리고 이번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나라가 바로 전 국토의 1/3이 초토화되어버린 네덜란드였다.

그러니 빌럼 3세는 네덜란드를 재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는데 북미왕국의 국왕이 마침 페로 제도를 방문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접하니 그를 직접 만나 친분도 쌓고 북미왕국의 도움을 얻을 생각이었고.

헌데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큰 피해를 본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5세가 자신보다 발 빠르게 움직였다는 것을 알게 된 빌럼 3세는 표정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지. 쳇.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부지런히 움직일 것을 그랬군.”

이에 보좌관은 빌럼 3세를 달랬다.

“그래도 거리를 생각하면 기껏해야 하루 차이일 겁니다. 그리고 고작 하루 만에 대단한 친분을 쌓기는 어려울 테고, 당연히 북미왕국의 도움을 얻어내지도 못했을 테지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보좌관의 이야기에 빌럼 3세는 일리가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묘하게 불안한 마음이 들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 * *

정성국과 함께 가볍게 아침 식사를 하던 크리스티안 5세는 정성국의 말에 입으로 가져가던 빵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흠. 세인트토마스 섬을 본격적으로 개발해보라고?”

어제 저녁 식사 시간에 북미왕국과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간의 동맹을 합의한 정성국과 크리스티안 5세는 이를 축하하기 위해 그대로 술자리를 가졌고, 이 술자리를 통해 친분을 쌓은 정성국과 크리스티안 5세는 서로 말을 놓기로 했다.

물론 나이야 정성국이 5살 더 많기는 한데, 크리스티안 5세가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의 국왕이다 보니 한쪽만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은 좀 아니다 싶었던 정성국이 그냥 같이 말을 편하게 하고 친구로 지내자고 제의한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티안 5세야 그 북미왕국의 국왕과 친구로 지낼 수 있다는 이야기에 냉큼 정성국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말이다.

“그렇지. 듣자니 덴마크에서는 세인트토마스 섬의 개발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느낌이던데...”

세인트토마스 섬은 소앤틸리스 제도의 섬 중에 하나로 덴마크가 개척한 카리브 해의 식민지였다.

다만, 다른 나라들은 여러 상품 작물을 경작하기 위해 카리브 해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는 데 반해 덴마크는 세인트토마스 섬에 일부 개척자를 보내 세인트토마스 섬을 덴마크의 식민지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섬의 개발에는 꽤 미적거리고 있었고.

세인트토마스 섬을 잘만 개발하면 꽤 이득이 될 텐데 이를 방치하는 덴마크의 식민지 정책이 예전부터 의아했던 정성국이 질문을 던지자 크리스티안 5세가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원래 세인트토마스 섬은 다른 나라들이 설탕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하기에 우리도 사탕수수를 재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확보한 섬이야. 헌데...”

그러면서 크리스티안 5세가 정성국을 바라보자 정성국은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 우리 때문에 상황이 변한 건가?”

“하하하. 맞아. 본격적으로 세인트토마스 섬을 개발할 찰나에 북미왕국에서 값싸게 설탕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노예마저 구하기 어려워지다 보니 세인트토마스 섬을 개발해봐야 수익이 나겠냐는 이야기가 나왔고, 당시만 하더라도 난 세인트토마스 섬을 개발해서 이득을 보기보단...”

“세인트토마스 섬에 투자할 돈을 군대에 퍼부어 스코네 지방을 확보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건가?”

어제 술자리에서 크리스티안 5세는 프랑스의 압력 때문에 결국 스코네 지방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을 무척 아쉬워하며 정성국에게 하소연했었을 정도로 크리스티안 5세는 스코네 지방에 집착했었기에 정성국이 스코네 지방을 입에 올리자 크리스티안 5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당시의 보고로는 북미왕국에서 계속 플로리다 지역을 개발하면서 사탕수수 재배면적을 폭발적으로 늘리고 있고, 이 때문에 설탕 가격은 계속해서 떨어질 거라고 했거든. 그러니 막상 세인트토마스 섬의 개발이 끝났을 때쯤이면 설탕 가격은 더 떨어질 테고, 수익은 크지 않을 거라는 보고 때문에 세인트토마스 섬의 투자를 꺼릴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소앤틸리스 제도에서 주도적인 세력이 바로 프랑스인데 프랑스는 스웨덴의 동맹국이다 보니 잘못하면 세인트토마스 섬을 프랑스에 뺏길 수도 있었고...대프랑스 전쟁이 시작되면서 세인트토마스 섬은 방치할 수밖에 없었지.”

“흠. 세인트토마스 섬을 지킬 수 없기에 포기했다는 거군.

“그래. 본토와 발트해를 장악하는 것이 우선이지 고작 고작 자그마한 카리브 해의 섬 하나를 지키겠다고 함대를 파견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특히 소앤틸리스 제도에 파견된 프랑스 함대를 상대하려면 군함 한두 척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프랑스는 우리의 예상보다 북미왕국을 두려워해서 세인트토마스 섬을 감히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말이지.”

세인트토마스 섬은 북미왕국의 생크루아 섬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고 생크루아 섬 인근은 생크루아 분함대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프랑스는 괜히 함대를 세인트토마스 섬으로 움직였다가 북미왕국과의 마찰이 생길 것을 우려해 세인트토마스 섬을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덕분에 세인트토마스 섬을 지킬 수 있었던 크리스티안 5세가 피식 웃으며 도와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덧붙이자 정성국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됐고. 아무튼, 이제 대프랑스 전쟁도 끝났고, 우리와 동맹을 맺은 이상 다른 나라가 집적거리지도 않을 테니 세인트토마스 섬을 개발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 않아?”

“그렇긴 한데...최근 설탕값이 무척 떨어져서 말이지.”

에스파냐의 히스파니올라 섬과 푸에르토리코 섬을 매입하게 되면서 북미왕국은 사탕수수를 재배할 수 있는 면적이 확 늘어나게 되었다.

여기에 내륙 지역에 시범적으로 재배했던 사탕무 농사가 성공함으로써, 설탕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당연히 설탕 가격을 확 낮아졌고.

이 때문에 카리브 해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곳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해 설탕 무역으로 이득을 보던 유럽 나라들은 꽤 손해를 봤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터라 크리스티안 5세는 세인트토마스 섬을 꼭 개발해야 하나 싶었기에 이렇게 중얼거리자 정성국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예전처럼 몇 배씩 이득을 취하지야 못하겠지만 손해는 보지 않을 거야. 그리고 꼭 사탕수수를 재배할 필요도 없지. 커피나 카카오를 재배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걸?”

정성국이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를 언급하자 크리스티안 5세가 눈을 빛냈다.

커피도 무척 유행하긴 했지만, 달콤한 초콜릿은 북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으니까.

다만 예전에 설탕 가격이 계속해서 하락하면서 세인트토마스 섬에 정착한 농민들이 다른 상품 작물들을 키우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크리스티안 5세는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카카오를 재배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가능할까?”

“가능할걸? 내가 도와줄게.”

“도와준다고? 어떻게?”

정성국의 말에 크리스티안 5세가 눈을 빛내자 정성국이 어깨를 으쓱했다.

“농업 연구소의 직원을 파견해서 도와줄게. 그들이라면 카카오를 어떻게 재배해야 할지 자세히 알려 줄 거야. 그뿐만 아니라 세인트토마스 섬에서 재배하기 알맞은 작물들도 추천해줄 테고.”

“오오! 그 농업 연구소의 직원을 파견해주겠다고?”

크리스티안 5세의 반응에 정성국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그 농업 연구소?”

“북미왕국의 농업 연구소와 축산 연구소는 무척 유명하니까.”

정성국도 연구청 산하 연구소들에 대한 소문이 유럽에 널리 퍼졌다는 사실은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이상하다는 얼굴로 크리스티안 5세를 바라보았다.

“음? 어업 연구소는?”

“그게...하하하.”

크리스티안 5세가 슬쩍 웃으며 정성국의 눈빛을 피하자 정성국은 상황을 짐작하고 묘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업 연구소에서 하는 일들이 영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물론 유럽에서 북미왕국의 대표적인 교역품 중 하나인 진주가 실은 양식 진주라는 것과 진주 조개를 양식할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어업 연구소의 연구 때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야 유럽에서도 어업 연구소를 높이 평가하겠지만, 북미왕국에서는 이를 철저히 숨겼기에 아직 유럽에선 북미왕국의 진주를 천연 진주로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유럽에서도 북미왕국에서 판매하는 진주의 물량이 너무 많았기에 진짜 천연 진주인가 의심하기는 했지만, 북미왕국에서 남태평양의 수많은 군소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5함대까지 신설하면서 남태평양을 지키려는 이유가 바로 이곳에서 확보할 수 있는 천연 진주 때문이다, 라는 소문을 북미왕국의 정보기관이 은연중에 흘리면서 이러한 의심도 거의 사라진 상태였고.

그 때문인지 크리스티안 5세는 어업 연구소가 얼마나 북미왕국에 도움이 되는지 전혀 짐작 못 하고 있었고, 정성국은 굳이 이러한 생각을 정정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애써 입가에 맺힌 미소를 지우며 중얼거리자 크리스티안 5세가 정성국의 미소를 미처 보지 못하고 말했다.

“아예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북미왕국에서 말한 대로 계속해서 한 지역에서 물고기를 마구 잡다 보면 결국 어장이 망가질 수도 있으니까. 다만...”

“굳이 어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다른 어장을 찾는 게 낫다는 거겠지?”

“아무래도 그렇지. 그리고 같은 이유로 물고기 양식도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고.”

이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돈을 들이더라도 안정적으로 물고기를 확보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데...다른 나라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는 거니까. 아무튼, 농업 연구소의 연구원들을 보내 도와줄 테니까 본격적으로 세인트토마스 섬을 개발해봐. 세인트토마스 섬만 잘 가꿔도 꽤 쏠쏠한 이득을 볼 테고, 그 정도면 덴마크의 파탄 난 재정을 복구하기엔 충분할 테니까.”

정성국으로선 동맹을 맺기로 한 덴마크가 재정 적자로 빌빌대봐야 좋을 것이 없었기에 노르웨이 지역의 개발과 세인트토마스 섬의 개발로 재정 적자를 벗어나길 원했고.

그리고 크리스티안 5세도 정성국이 세인트토마스 섬의 개발을 권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기에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네가 그렇게까지 권유하는 것을 보면 세인트토마스 섬의 잠재력이 충분해 보이니 이를 따르도록 하지.”

“그래. 그리고 돈이 부족하면 말하고.”

이에 크리스티안 5세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도와주게?”

“그래. 덴마크 서인도회사에 개인적으로 조금 투자하지 뭐.”

정성국이 왕실의 재산을 덴마크 서인도회사에 투자할 수도 있다고 밝히자 크리스티안 5세는 눈을 빛냈다.

왕실의 재산을 투자한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투자처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좋은 투자처라면 자신이 직접 투자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조그마한 섬 하나를 개발할 돈이 없지는 않으니까.”

정성국은 어제 그렇게 돈이 없다고 징징거리던 크리스티안 5세가 오히려 투자를 거부하자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곧 그의 속셈을 눈치채고 속으로 피식 웃었을 때 식당의 문이 열리며 호위대장이 조심스럽게 정성국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전하.”

“음? 무슨 일인가.”

“오라녜 공의 깃발을 단 연락선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네덜란드의 총독 빌럼 3세가 오고 있다는 소식에 정성국이 커피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빌럼 3세가 왔다는 소린가? 그럼 마중나가야겠군. 너도 갈래?”

이에 크리스티안 5세는 냅킨으로 입을 닦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혼자 있어서 뭐하겠어. 같이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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