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7화
응접실에서 정성국과 이야기를 나눈 크리스티안 5세는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잠시 휴식을 취할 겸 선원이 안내한 왕실 전용 여객선의 커다란 객실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크리스티안 5세를 기다리고 있던 한스를 비롯한 측근들에게 방금 응접실에서 정성국과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한스와 측근들은 크리스티안 5세의 이야기에 화들짝 놀랐다.
“헉!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동맹을 제의한 내 말에 북미왕국 국왕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더군.”
북미왕국의 국력이 알려지면서 유럽 국가들은 북미왕국과의 동맹을 원했다.
잘만 하면 북미왕국을 등에 업고 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러나 북미왕국은 조선, 시베리아 부족 연합, 호주 연합, 앙골라 장가를 비롯해 남태평양의 조그마한 부족들과는 동맹을 맺을지언정 유럽 국가와는 동맹을 맺지 않았고, 유럽 국가들의 동맹 제의를 칼같이 거절했기에 이젠 유럽 국가들도 북미왕국과의 동맹을 내심 포기했고.
헌데 크리스티안 5세가 혹시나 해서 건넸던 동맹 제의에 정성국의 반응이 남달랐기에 한스를 비롯한 크리스티안 5세의 측근들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눈을 빛내고 있을 때, 측근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음...혹시 예의상 한 말이 아닐까요?”
“글쎄요. 그간 북미왕국은 일관적으로 유럽 문제에 깊이 개입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해서 동맹 제의 만큼은 단칼에 끊었지요. 헌데 동맹을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예의상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한스의 반박에 크리스티안 5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한스와 같네. 당시 북미왕국 국왕의 분위기를 볼 때 예의상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어.”
크리스티안 5세의 말에 다른 측근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흠. 북미왕국의 정책은 결국 북미왕국 국왕의 뜻일 텐데...유럽과 거리를 두려던 북미왕국의 국왕이 마음을 바꾼 걸까요?”
“그럴 확률이 높겠지요. 그러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한스의 말에 크리스티안 5세가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동맹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후우...알겠네. 곧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으니 분위기를 봐서 최대한 밀어붙여 보지.”
* * *
저녁 식사는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정성국이 움직일 때마다 함께 움직이는 왕실 숙수가 직접 요리했기에 음식들은 맛있었고, 아무래도 크리스티안 5세는 애초부터 이곳을 방문한 것이 정성국과 친분을 쌓기 위함이었기에 정성국이 말할 때마다 웃으며 응대했으니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그러다 크리스티안 5세는 반주로 나온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와인잔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호오. 이 와인. 향도 풍부하고 맛이 괜찮군요. 프랑스 와인입니까?”
이에 정성국은 슬쩍 미소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북미왕국에서 만든 와인이지요.”
“허. 그렇습니까? 북미왕국은 쌀과 밀이 넘쳐나기에 곡물을 이용한 술만 만드는 줄 알았는데 이거 의외군요.”
북미왕국은 식량이 넘쳐나다 못해 썩을 정도였기에 이 남는 식량들을 썩히기보단 술을 만들었고, 이 때문에 술, 특히 증류주는 북미왕국의 대표적인 교역품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크리스티안 5세는 프랑스 와인과 비견될만한 북미왕국 와인을 보고 놀란 얼굴을 하자 정성국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우리 북미왕국엔 유럽 출신 이주민들이 많잖습니까. 그중에는 프랑스 출신의 이주민들이 꽤 있고요.”
“아. 위그노들 말입니까?”
“예. 특히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나름 중산층이 많았던지라 와인을 자주 마신 모양입니다. 그러니 북미왕국에 와서도 와인을 찾았고...이주민들중에는 와인을 만들 수 있는 이들도 있기에 와인 산업이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리고 이를 알게 된 왕실 상단에서 본격적으로 이들에게 투자했고요. 해서 이 와인이 탄생한 거지요.”
정성국의 설명에 크리스티안 5세는 와인잔을 들고 다시 한 모금 마시며 와인의 맛을 깊이 음미한 후 입을 열었다.
“프랑스의 와인들을 꽤 마시긴 했었는데 이 와인은 프랑스 와인에 뒤지지 않는 것 같고...이로써 북미왕국은 또 다른 교역품이 생긴 셈이로군요. 이거 부럽습니다.”
크리스티안 5세는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눈치였기에 정성국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부러울 것까지야 있나요.”
“아니요. 정말 부럽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덴마크는 쓸만한 교역품이 많지 않으니까요.”
크리스티안 5세가 조금 씁쓸한 미소와 함께 이렇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이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눈을 번쩍이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전 그렇지 않다고 보는데요.”
“예?”
“노르웨이 지역에 꽤 많은 광물들이 묻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노르웨이 지역의 광산에 투자해 많은 광물들을 캐내면 괜찮은 교역품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전생에서도 노르웨이 지역에 묻혀 있는 양질의 철광석은 유명했기에 정성국이 이로쿼이 제철소를 방문했을 당시, 덴마크와 접촉해 노르웨이 지역에 묻혀 있는 철광석을 확보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다만 외무청에서 덴마크의 대사와 논의하는 것보다는 기왕 크리스티안 5세와 만난 김에 직접 이를 논의하는 것이 훨씬 빠르게 노르웨이 지역의 광산 개발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 정성국이 이를 유도하기 위해 말을 꺼내자 크리스티안 5세가 의아하다는 듯 얼굴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노르웨이 지역에 광물이 어느 정도 묻혀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걸 북미왕국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것도 의외였고, 그가 알기로 잉글랜드에서 막대한 양의 철광석을 수출하고 있는데 여기서 자신들에게까지 철광석을 수입하려 할 줄은 몰랐으니까.
“노르웨이 지역에 묻혀 있는 광물이라...듣기로 북미왕국에서 잉글랜드 지역의 철광석들을 무제한 매입하고 있고, 이 때문에 잉글랜드 귀족들은 너도나도 광산에 투자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설마 잉글랜드에서 수출하는 철광석으로도 부족한 겁니까?”
이에 정성국은 조금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하하하. 아시다시피 아국에선 워낙 광범위하게 강철을 사용하다 보니...”
“허어. 잉글랜드에서 캐는 철광석의 양이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는데...”
크리스티안 5세도 북미왕국의 철강 소모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북미왕국을 대표하는 철선도 그렇고, 기차가 달리기 위한 길인 철도만 하더라도 막대한 양의 강철을 소모할 것이 뻔했기에.
여기에 북미왕국은 튼튼한 건물을 짓겠다면서 건물을 지을 때도 강철을 넣는다고 알려져 있으니.
허나 북미왕국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은 무척 넓었고, 이 넓은 영역에 철광석이 없을 리가 없으며, 여기에 잉글랜드에서 캐내는 막대한 양의 철광석까지 북미왕국으로 넘어가고 있는데도 아직도 부족하다는 정성국의 대답에 크리스티안 5세는 경제력의 차이를 실감하고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고.
정성국은 그런 크리스티안 5세의 반응에 속으로 피식 웃으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무튼, 상황이 그래서 외무청에서는 더 많은 철광석을 수입하기 위해 여러 정보를 수집했는데, 그러다 보니 노르웨이 지역은 풍부한 광물이 묻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음...허면 우리 덴마크가 노르웨이 지역의 광물을 캐내면 북미왕국이 전량 수입하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투자도 할 수 있고요.”
정성국이 투자를 언급하자 크리스티안 5세의 안색을 살짝 굳히며 되물었다.
“투자요?”
“예. 아국에서 광산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돈을 대는 대신 광산의 지분을 가져가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아. 물론 아국에서 가져가는 지분은 절반을 넘기지 않을 겁니다.”
정성국의 대답에 크리스티안 5세는 묘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처음 정성국이 투자를 언급했을 때만 하더라도 크리스티안 5세는 북미왕국에서 투자를 빌미로 노르웨이 지역의 광산들을 확보하려 든다고 생각했다.
현재 덴마크는 극심한 재정 적자를 겪고 있었기에 북미왕국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노르웨이 지역의 광산들을 북미왕국에 넘겨준다 하더라도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에게 세금을 거둘 수 있으니 덴마크로서는 이득이긴 했고.
헌데 정성국은 노르웨이 지역에 있는 광산들을 개발할 수 있도록 투자하되, 지분은 절반만 가져가겠다고 하니 덴마크로서는 광산 개발로 인한 이득을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그만큼 북미왕국은 손해를 보게 되었기에 크리스티안 5세는 자신보다 나이는 많지만, 훨씬 어려 보이는 정성국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음. 솔직히 북미왕국에서 우리 덴마크의 내부 사정을 모르지 않을 텐데...고작 절반의 지분만 가져가시겠다는 겁니까?”
이에 정성국은 입가심으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욕심부려 뭐하겠습니까.”
물론 꽤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되어 있긴 했다.
먼저 덴마크는 새한성 조약 이후 극심한 재정 적자를 겪고 있기에 북미왕국과의 교역마저 위축된 상태라 덴마크의 경제가 어느 정도 복구되어야 북미왕국으로서도 이득이기도 했고, 북미왕국은 인력이 부족했기에 노르웨이 지역의 광산들을 직접 운영할 뜻은 없는 만큼, 절반의 지분을 덴마크 측에 넘겨주는 대신 광산 운영을 비롯한 자잘한 일은 덴마크 측에 떠넘기는 것이 여러모로 편하기도 했고 말이다.
다만 이를 그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정성국이 어깨를 으쓱하며 얼버무리자 크리스티안 5세는 정성국을 빤히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역시 세상에서 가장 부자라고 알려진 것처럼 화끈하시군요. 좋습니다.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크리스티안 5세의 대답에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번 노르웨이 지역의 투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투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대충 마무리 지었을 때, 크리스티안 5세가 슬쩍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 덴마크와의 동맹에 관해서는 생각해보셨습니까?”
투자와 관련된 이야기마저 순조롭게 진행되었기에 크리스티안 5세는 이 기세를 살려 다시 북미왕국과의 동맹을 논하자 정성국은 조금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후우. 동맹이라...”
그리고 정성국의 반응에 크리스티안 5세는 괜히 말을 꺼냈나 싶어 조금 움츠러들면서도, 기왕 말을 꺼낸 김에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에 정성국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우리와 동맹을 맺는 것이 꺼려지십니까?”
“덴마크-노르웨이 왕국과 동맹을 맺는 것이 꺼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덴마크-노르웨이 왕국과 동맹을 맺는다면 귀국의 외교 관계가 아국의 외교 관계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으니 그게 문제지요. 그래서 유럽 국가와는 어지간하면 동맹으로 묶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고.”
“음...”
크리스티안 5세도 이러한 문제로 북미왕국이 유럽 국가와의 동맹을 꺼리고 있다는 점은 예상했었기에 신음을 흘리자 다시 정성국이 말했다.
“다만 아국과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이 동맹을 맺음으로써 북유럽의 평화가 계속될 수 있을 거라는 말이 내심 마음을 흔들더군요. 해서 말인데...”
정성국이 말을 늘이자 크리스티안 5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정성국을 바라보았고, 정성국은 그런 크리스티안 5세를 보고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덴마크-노르웨이 왕국과의 동맹의 성격을 공수 동맹이 아닌 방어 동맹으로만 한정한다면, 그리고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이 타국을 침공하거나 아국과의 동맹을 이용해 타국에 압력을 행사한다면 이 방어 동맹을 종료한다는 조건이라면 귀국과 동맹을 맺을 의사는 있습니다.”
정성국의 말은 한마디로 북미왕국을 이용해 과한 이득을 볼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크리스티안 5세로서는 조금 아쉽긴 했지만, 북미왕국과의 동맹으로 스웨덴이나 프랑스의 압박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득이었고, 북미왕국이 동맹국들의 발전을 위해 알음알음 신경 써준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북미왕국과의 동맹을 성사시킨 이상 귀족들의 압박은 무시할 수 있었기에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북미왕국의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