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686화 (686/850)

686화

페로 제도에 도착한 정성국은 왕실 전용 여객선에 머물고 있었다.

페로 제도 행정청의 관사는 정성국이 머물기엔 작을뿐더러 공간이 넓지 않은 터라 관사 내외부에 호위대원들을 배치하기도 어렵다 보니 호위대장은 관사보단 왕실 전용 여객선에서 지내길 권유한 탓이다.

그리고 정성국 역시 이런 호위대장의 의견에 동의했고, 곧 페로 제도에 빌럼 3세나 크리스티안 5세가 방문할 텐데, 페로 제도는 이런 귀빈들을 대접할만한 장소가 없다 보니, 정성국은 차라리 왕실 전용 여객선에서 이들을 대접하는 것이 편하겠다는 생각에 왕실 전용 여객선에 머물며 빌럼 3세와 크리스티안 5세가 도착할 때까지 페로 제도의 여러 관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러다 페로 제도와 덴마크를 정기적으로 오가던 연락선이 덴마크 왕가의 깃발을 휘날리며 토르스하운으로 접근하자 정성국은 크리스티안 5세가 도착했음을 깨닫고 그를 마중하기 위해 호위대원들과 함께 선착장으로 나왔다.

‘흠. 저 친구가 바로 크리스티안 5세인가?’

크리스티안 5세는 즉위 후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스코네 지방 탈환에 실패하면서 재정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강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번에는 기필코 스코네 지방을 탈환하겠다고 식민지인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를 북미왕국에 팔아버리기까지 했으니.

아무튼, 덴마크의 상황이 이러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건지, 크리스티안 5세의 안색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기에 정성국은 속으로 혀를 차며 연락선에서 신하들과 함께 내리는 크리스티안 5세를 환영했고.

크리스티안 5세는 이곳을 방문하면서도 북미왕국의 국력과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간의 국력 차이가 상당한 터라 북미왕국의 국왕의 위세에 굽신거려야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의외로 정성국이 자신을 동등한 국왕으로 인정하며 대우해주자 안도하면서 그를 따라 옆에 정박해 있는 거대한 철선에 올랐다.

그리고 철선에 오른 크리스티안 5세는 정성국을 따라 이동한 끝에 넓고 화려한 가구들이 즐비한 응접실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정성국이 직접 내린 커피가 담긴 커피잔을 코에 가져다 대고 그 향을 맡은 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호오. 커피 향이 참으로 좋군요. 그동안 마셔왔던 커피 중에 가장 나은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렇지요? 나름 왕실 상단에서 농업 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심혈을 기울여 키운 커피라서 말입니다.”

의외로 응접실에는 정성국과 크리스티안 5세만 자리했고, 둘은 통역의 도움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대화가 가능한 것은 크리스티안 5세가 북미왕국말을 할 줄 알았기 때문이고.

정성국이 선착장에서 처음 크리스티안 5세를 만났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이 바로 크리스티안 5세가 북미왕국말로 인사를 건넸다는 점이다.

그것도 단순히 자신에게 호의를 얻기 위해 인사말 정도만 외워서 건넨 것이 아니라 북미왕국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크리스티안 5세였기에 처음엔 무척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크리스티안 5세는 북미신문이나 북미왕국의 책들을 직접 읽기 위해 북미왕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말을 덧붙였고, 현 유럽의 지식인들이나 귀족들 사이에서 북미왕국어를 배우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정성국도 외무청의 보고로 알고 있었지만 한 나라의 국왕마저 북미왕국어를 배우기 위해 시간을 할애할 줄은 몰랐기에 고개를 저었었고 말이다.

아무튼, 정성국이 크리스티안 5세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농업 연구소를 언급하자 크리스티안 5세는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이거 부럽군요. 우리도 식물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지원해주고 있긴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는데 말입니다.”

“호오.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에서도 식물학자들을 따로 지원해준다는 말입니까?”

정성국의 질문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크리스티안 5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마 다른 나라들도 사정은 다 비슷할 겁니다. 아무래도 돈이 되는 식물들을 연구해 이를 가까운 지역에서 대량 재배할 수 있다면 막대한 이익을 볼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아. 역시나...”

유럽에서 값비싸게 팔리는 향신료나 기호 식품들은 대부분 유럽 외의 지역이 원산지였다.

당연히 이를 직접 유럽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한다면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고, 그러니 다른 나라들이 식물학자들을 지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기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크리스티안 5세가 그런 정성국을 보고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거기에 북미왕국은 연구청 산하에 농업 연구소뿐만 아니라 축산 연구소나 어업 연구소를 두고 이를 체계적으로 연구해 단기간에 북미왕국의 축산업과 어업이 발전했다는 소식까지 접한 터라 대부분의 나라들이 북미왕국을 따라 연구 기관을 세우고 이에 관련된 학자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하면서 학자들의 몸값이 무척 올라버렸지요.”

“허. 그 정도입니까? 유럽 각국에서 여러 학자를 우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긴 했는데...”

“쓸만한 학자들이 그리 많지 않잖습니까. 그러니 자국의 학자들뿐만 아니라 타국의 이름 높은 학자들을 영입하기 위해 각국의 왕실에서 돈을 풀면서 학자들의 몸값이 엄청 올랐습니다.”

“허허허.”

그러면서 학자들의 고용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크리스티안 5세가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북미왕국의 폭발적인 발전에 유럽 각국은 당연히 북미왕국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북미왕국의 발전에 연구청의 역할이 지대하다는 것을 깨달은 유럽 각국은 북미왕국을 따라 연구청이나 연구소를 세우고 학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정성국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으니까.

다만 이렇게 학자들의 몸값이 뛴 것에는 유럽 각국에서 저명한 학자들을 자국으로 모시기 위해 영입 전쟁을 벌인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 전에 대다수 학자들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북미왕국은 학문과 기술 발전에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은 유명했고, 여기에 종합 대학교를 여럿 건설하는 터라 이들이 일할 일자리를 구하기도 쉬웠고, 북미왕국의 백성이 되면 여러 혜택도 받을 수 있을뿐더러 생활 수준도 대폭 올라가는 만큼 북미왕국으로의 이주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다만 이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정성국은 유럽의 학자들은 다 돈독에 오른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 뿐이었고.

“그런데! 그렇게 많은 돈을 받고 추가로 연구비까지 내놓으라면서 막상 제대로 된 성과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크리스티안 5세는 정성국과 대화하면서 열이 오르는지 목소리를 높였고, 정성국은 그런 크리스티안 5세를 보며 물었다.

“뭐 연구라는 것이 다 그렇지요. 언제나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보다 학자들에게 지원하는 금액이 그렇게 부담될 정도입니까?”

크리스티안 5세는 고개를 갸웃하는 정성국을 보고 조금 기가 죽은 표정으로 말했다.

“크흠. 부유한 북미왕국이야 크게 상관없겠지만, 우리는 상황이 조금 달라서 말입니다. 해서 어떻게든 스코네 지방을 확보해 외레순 해협을 오가는 배들에 통행세를 매겼어야 했는데...후우.”

크리스티안 5세는 새한성 조약으로 스웨덴에 돌려줘야만 했던 스코네 지방이 생각나는지 안타까운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정성국은 그런 크리스티안 5세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물론 스코네 지방을 확보하면 외레순 해협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되고, 외레순 해협을 완전히 통제함으로써 외레순 해협을 오가는 배들에 통행세를 걷을 수 있으니 재정적으로는 도움이 되긴 하겠지요. 허나 통행세를 뜯기게 될 발트해 안쪽의 국가들은 계속해서 덴마크를 적대시할 테고, 그렇게 되면 덴마크는 외교적으로 고립될 겁니다. 더불어 통행세로 버는 돈 이상을 군대를 육성하는 데 투자해야 할 테고요.”

크리스티안 5세도 그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이전에 덴마크가 스코네 지방을 장악하고 외레순 해협을 오가는 배들에 통행세를 받았을 당시 상인들은 덴마크에 지불해야 하는 통행세를 물건값에 포함시켰고, 당연히 발트해 안쪽의 나라들은 그만큼 손해를 봐야 했던 터라 덴마크를 적대시했었으니 말이다.

다만 크리스티안 5세는 편리한 해결책을 하나 알고 있었다.

바로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는 것.

북미왕국의 국력은 유럽에 널리 알려져 있으니, 덴마크가 북미왕국의 동맹국이 된다면 덴마크가 다시 스코네 지방을 장악하고 통행세를 거둔다 하더라도 발트해 안쪽의 국가들이 덴마크를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고.

해서 크리스티안 5세는 정성국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북미왕국이 우리 덴마크와 동맹을 맺는다면...”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크리스티안 5세의 말을 끊었다.

“우리와 동맹을 맺고 다시 전쟁을 일으키겠다고요? 하하하. 이거 유럽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덴마크와는 절대 동맹을 맺어선 안 되겠군요.”

괜히 북미왕국에 붙어 호가호위하려던 크리스티안 5세는 정성국의 말에 기겁하면서 농담이었다고 얼버무렸고.

커피와 함께 달콤한 다과를 먹으며 잠시 고민하던 크리스티안 5세는 정성국을 바라보며 물었다.

“헌데,,,스코네 지방을 완전히 포기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우리 덴마크와 북미왕국 간의 동맹이 가능하겠습니까?”

커피를 마시던 정성국은 크리스티안 5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음? 스코네 지방을 완전히 포기하겠다고요?”

크리스티안 5세가 얼마나 스코네 지방을 원하고 있는지는 덴마크에 나가 있는 북미왕국 대사를 통해 이야기를 들었었기에 정성국이 의외라는 얼굴로 되묻자 크리스티안 5세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동안 기를 쓰고 스코네 지방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은 결국 통행세 때문이었습니다. 통행세가 있어야 강한 군대를 육성할 수 있고, 강력한 군대가 있어야 스웨덴의 확장을 막고 덴마크를 지킬 수 있으니 말입니다. 허나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는다면 스웨덴이 감히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의 영토를 넘보지는 못할 테니 군대를 육성하는 데 많은 돈을 쏟아부을 필요가 없고, 그렇다면 꼭 스코네 지방에 연연할 필요가 없지요.”

크리스티안 5세의 어린 시절에 북유럽에서 제2차 북방 전쟁이 벌어졌고, 이때 덴마크의 국왕이자 크리스티안 5세의 아버지인 프레데리크 3세는 스웨덴과의 전쟁을 시작했지만, 당시 스웨덴은 무척이나 대단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신성로마제국,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의 공격을 방어하면서도 오히려 역으로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을 점령할 정도였다.

그러니 당시 11살이었던 크리스티안 5세는 스웨덴을 내심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고, 강력한 군대 육성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으며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스코네 지방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게 된다면, 덴마크는 확실히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뿐더러, 조선처럼 북미왕국의 도움을 받아 기술을 발전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으며 군대에 퍼부어야 할 돈을 나라의 개발에 투자할 수 있고, 후에는 이를 기반으로 다시 강력한 군대도 육성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크리스티안 5세는 북미왕국과의 동맹이 가능하다면, 스코네 지방의 탈환은 포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크리스티안 5세는 이를 정성국에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생각이 많아졌다.

정성국은 굳이 유럽 문제에 깊이 개입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페로 제도로 이주한 유럽 출신 이주민들과의 대화를 나눠보니 유럽은 걸핏하면 전쟁을 벌였기에 사는 것이 지옥과도 같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었기에 덴마크와 동맹을 맺는다면 북유럽에서의 전쟁이 줄어들 테니 그것도 나쁠 것은 없어 보였던 탓이다.

더불어 전에 조용한 곰이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한 것처럼 유럽 대부분의 국가와 동맹을 맺는다면 유럽에서의 전쟁이 사라질 거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리기도 했고.

해서 정성국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 자리에 크리스티안 5세가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덴마크-노르웨이 왕국과의 동맹은 당장 대답해주긴 어렵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조금 주시지요.”

정성국의 대답에 크리스티안 5세는 내심 환호했다.

북미왕국이 유럽 국가와의 동맹을 꺼린다는 사실은 크리스티안 5세도 잘 알기에 정성국이 단칼에 끊어버릴 줄 알았으니까.

해서 크리스티안 5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야 물론입니다. 기꺼이 기다리겠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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