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4화
레이캬비크에 있는 행정청 관사에서 하룻밤을 보낸 정성국은 가족들과 함께 레이캬비크 외곽에 있는 지열 발전소로 향했다.
정성국은 혼자 가려 했었지만, 정안문이나 정나리는 이 새로운 방식의 발전소에 무척 관심을 보이는 터라 함께 방문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던 탓이다.
해서 왕실 전용 여객선에 적재되어 있었던 자동차를 타고 지열 발전소에 도착한 정성국은 자신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던 지열 발전소의 책임자인 강윤석의 안내를 받아 지열 발전소를 둘러보기 시작했고.
발전소 안팎으로 연결된 거대한 배관과 이 배관이 연결된 안쪽의 커다란 증기 회전 기관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동되고 있는 것을 확인한 정성국은 다른 곳을 둘러보다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이거 내 예상보다 발전소의 규모가 조금 작네?”
이에 정성국을 안내하기 위해 가까이 붙어 있던 강윤석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지열 발전소의 경우 지열을 이용해 증기를 만들어 회전 기관을 돌려 전기를 생산하는 터라, 발전소의 크기가 클 필요가 없지요.”
화력 발전소는 석탄으로 물을 끓여 증기를 만들고, 이 증기를 이용해 증기 회전 기관을 돌려야 했기에 보일러를 비롯한 여러 시설이 들어설 공간이 필요했고, 수력 발전소는 직접 물의 낙차를 이용해 증기 회전 기관을 돌려야 했기에 물을 가둘 댐을 건설해야 했지만, 지열 발전소의 경우는 땅 밑의 지열을 이용해 증기를 만들기에 따로 물을 끓일 필요가 없어 화력 발전소처럼 보일러를 비롯한 여러 시설을 건설할 필요가 없었으니 그만큼 발전소 내부 시설만큼은 단순하다는 강윤석의 설명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른 발전소와는 달리 발전소 외부와 연결된 수많은 커다란 배관들을 떠올리며 확인차 질문을 던졌다.
“아. 생각해보니 그렇긴 하군. 그럼 발전소 주변에 보이는 배관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증기들이 이동하는 배관이지요.”
아이슬란드는 섬 전체가 거대한 화산이나 마찬가지고 이 때문에 다른 지역과는 달리 마그마가 지표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니 이 마그마에 최대한 가깝게 배관을 설치한 후, 이 배관으로 물을 주입하면 땅속의 뜨거운 열로 인해 물은 증기가 되고.
다만 증기 회전 기관을 돌리기 위해선 많은 양의 증기가 필요했기에 발전소 주변 곳곳에 배관을 설치하고, 이 배관들에서 증기를 확보해 지금 보고 있는 증기 회전 기관을 돌린다는 설명에 정안문이 눈을 번쩍이며 질문을 던졌다.
“와! 그럼 유지비도 거의 들지 않고 24시간 안정적으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에 강윤석은 정안문이 지열 발전소의 원리를 확실히 이해했구나 싶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물론 화산 인근에 설치해야 하며, 발전소를 건설하는 비용이 큰 편이기야 합니다만...”
“음? 발전소도 작은 것 같은데 건설 비용이 많이 듭니까?”
이에 정성국이 피식 웃으며 강윤석 대신 대답했다.
“저 배관들을 땅속 깊숙이 박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란다. 더불어, 중간에 바위라도 있으면 시추를 포기해야 하고.”
“아. 그건 그렇겠군요.”
정성국의 말에 정안문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강윤석이 그런 정안문을 보고 추가로 설명했다.
“땅의 구조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몇 번이고 시추해야 하는 터라 건설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릅니다. 거기에 한두 개의 배관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수많은 배관을 주변에 박아 증기를 확보해야 하는데 그게 다 돈이다 보니...”
정안문은 처음 설명을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가장 효율적인 발전소처럼 생각했던 지열 발전소의 단점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자 정성국이 한마디 해주려 했을 때, 옆에 있던 정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뭐...석유 때문에 아국의 시추 기술은 뛰어난 편이고, 이에 관련된 전문가들도 많은 편아. 여기에 아국은 돈이 많으니 그런 단점은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어. 오빠.”
정성국이 해주려 했던 말을 대신하는 정나리를 보고 정성국은 새삼 정나리의 통찰력에 감탄했고, 강윤석 역시 그런 정나리를 보고 깜짝 놀란 얼굴로 정나리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공주님. 그래서 그나마 다행인 거지요.”
이에 정안문은 동생인 정나리에게 조언해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한 후 바로 근처의 다른 연구원을 붙잡고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정나리는 전아라와 하얀 들꽃 사이를 파고들어 둘의 손을 잡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성국은 그런 정안문과 정나리를 잠시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바로 고개를 돌려 다시 발전소 안쪽을 둘러본 후 강윤석에게 물었다.
“그보다...이거 생각보다 잘 돌아가는 것 같은데 아이슬란드에 있는 화력 발전소는 계속 운행되는 건가?”
지열 발전소가 예상과는 달리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에 개발청에서는 어쩔 수 없이 화력 발전소를 건설했었다.
해서 지금까지는 이 화력 발전소에서 아이슬란드의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전기를 생산했고.
그러나 이제는 지열 발전소가 제대로 돌아가는 만큼 화력 발전소를 계속 운영할 필요가 있나 싶어 이를 묻자 강윤석이 답했다.
“일단 지열 발전소가 잘 돌아가기는 합니다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함께 운용해보기로 했습니다. 그 후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화력 발전소는 폐쇄하기로 했고요.”
“흠. 그런 상황이면 전기가 남아돌 것 같은데? 지금 이 지열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는...”
이 아이슬란드의 주민은 5만 명이었다.
처음 북미왕국이 아이슬란드를 구매했을 때는 4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는데, 북미왕국에 합류하면서 식량을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생활 수준이 올라갔으며, 연금의 존재까지 알게 되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아이를 갖기 시작했고, 덕분에 인구가 조금 늘어났던 것이다.
그러니 화력 발전소에 더해 지열 발전소에서도 본격적으로 전기를 생산하면 그걸 다 소모할 수 있을까 싶어 정성국이 묻자 강윤석이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전부 인근의 알루미늄 제조 공방에서 소모하고 있습니다. 원래 공방만 지어두고 지열 발전소가 예상보다 제대로 운영되지 않아 기술자들을 다른 알루미늄 공방으로 돌렸었기에...지열 발전소가 제대로 운영되어 전기를 생산하자 이들을 다시 재배치했거든요. 거기에 이곳 주민들도 대거 고용했고요.”
“아하. 덕분에 올해 알루미늄 생산량이 대폭 늘겠는데? 이거 한숨 좀 돌리겠어.”
알루미늄은 가볍고 물러 가공이 편한 터라 광범위하게 쓰였을뿐더러, 김신철이 여러 알루미늄 합금을 개발하면서 그 쓰임새는 더욱 늘어났다.
여기에 알루미늄은 유럽에선 귀금속으로 취급받는 물질이다 보니, 북미왕국에서 지내는 외국인들은 알루미늄 깡통 같은 것들도 고이 모셔두는 터라 회수율도 꽤 낮은 편이었고.
해서 알루미늄이 부족해 한때 개발청에서는 이 알루미늄 생산을 위해 수력 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하는 것까지 고려 중이었기에 정성국은 강윤석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강윤석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만 이 아이슬란드 주민들의 전력 소모량이 생각보다 큰 편이라...화력 발전소를 폐쇄하면 생각보다 알루미늄 생산량이 늘지 않을 겁니다. 거기에 알루미늄 제조 공방을 종종 방문해 그곳의 책임자들과도 이야기를 나누는데, 북미왕국에서 필요로 하는 알루미늄의 양은 정말 어마어마해서 계속 알루미늄 제조 공방을 확장해야 할 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미리 지열 발전소를 추가 건설해야 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다행히 이곳 아이슬란드는 지열 발전소를 건설하기 적합한 지형이니까요.”
“흐음...”
아직 전기세를 따로 받지는 않았기에 북미왕국의 백성들은 전기를 낭비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에 연구청에서는 계속해서 전기를 이용해 작동하는 여러 기구들을 만들었고, 그중에는 전기를 이용해 열을 내는 전열 기구도 있었다.
그리고 이 전열 기구는 편리하다는 이유로 추운 지역에선 불티나게 팔렸고.
그러니 아이슬란드처럼 추운 지역의 경우 전력 소모량이 생각보다 컸기에 미리 지열 발전소를 추가 건설해야 한다는 강윤석의 말에 정성국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이 아이슬란드에는 수자원이 풍부하고, 특히 수력 발전소를 건설하기 적합한 지형들이 꽤 있습니다.”
“그래? 그러니 수력 발전소를 추가 건설하자?”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아이슬란드를 알루미늄 생산 기지로 만드실 생각이라고 들었는데...그걸 생각하면 더 많은 지열 발전소와 수력 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에 정성국은 잠시 고민했지만, 알루미늄의 효용성을 생각하면,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는 알루미늄을 생산하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알루미늄 생산에 필요한 막대한 양의 전기를 감당하기 위해 전기 생산 비용이 저렴한 지열 발전소와 수력 발전소를 더 많이 건설하는 것이 맞긴 했다.
다만 지열 발전소의 확장 정도면 몰라도 이곳에 대규모 수력 발전소를 다수 건설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였기에 정성국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휴우...그 부분은 청장 회의에서 상의한 후 결정을 내리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전하.”
“아무튼, 지열 발전소를 연구하느라 고생했네.”
* * *
“전하!”
“음? 무슨 일인가.”
왕실 가족들과 함께 레이캬비크 인근의 온천을 즐긴 후 저녁 식사를 하러 이동하던 정성국은 레이캬비크의 외무청 관리가 정성국을 부르자 무슨 일인지를 물었고.
“그게...방금 페로 제도에 나가 있는 외무청 관리가 보낸 보고서가 올라왔는데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의 국왕인 크리스티안 5세, 그리고 네덜란드의 총독인 빌럼 3세가 전하의 페로 제도 방문 일정에 맞춰서 페로 제도를 방문하고 싶어한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고 합니다.”
이에 정성국은 눈을 빛내며 일단 가족들에게 먼저 가서 식사하라는 듯 손짓했고.
가족들이 식당으로 이동하자 정성국은 외무청 관리에게 물었다.
“크리스티안 5세와 빌럼 3세. 이 둘이 전부인가?”
“예? 그렇습니다. 전하.”
“쯧. 아쉽군.”
한 나라의 국왕인 정성국이 움직이는 것은 기밀 정보였다.
헌데 조용한 곰이 이를 은근슬쩍 새한성의 대사들에게 알린 것은 바로 정성국의 명령 때문이었고.
페로 제도는 유럽의 땅이나 마찬가지라 정성국이 페로 제도까지 행차한다는 것을 각국에서 알게 되면, 유럽 각국의 군주들은 정성국을 만나 친분을 쌓기 위해 기꺼이 페로 제도를 방문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해서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명령에 따라 잉글랜드, 네덜란드, 덴마크, 프랑스 대사에게 이 소식을 흘렸고.
헌데 네덜란드와 덴마크의 국왕은 예상대로 페로 제도를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잉글랜드의 찰스 2세나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기에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더불어 루이 14세의 경우 워낙 유명한 인물이고 현재 유럽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라 실제로 얼굴을 한번 보고 싶기도 했고.
‘직접 프랑스를 찾아가기에는...위험하겠지. 뭐 어쩔 수 없나?’
“예? 그게 무슨...”
정성국의 반응에 외무청 관리가 고개를 갸웃하자 정성국은 생각을 멈추고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닐세. 그보다 바로 페로 제도에 연락을 보내게. 페로 제도로의 방문을 환영하겠다고 말이네. 그리고 저들이 원한다면 아국에서 배편을 마련해주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의 명령에 외무청 관리가 페로 제도로 연락을 보내기 위해 바로 선착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외무청 관리의 뒷모습을 보며 머릿속에서 이동 거리를 계산해보던 정성국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들이 바로 우리의 배를 타고 움직인다고 가정하더라도 5일은 걸리겠군. 그럼 예정대로 이곳에서 적당히 쉬다 나 혼자 페로 제도로 가서 크리스티안 5세와 빌럼 3세를 만나면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