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7화
정성국은 한창 네덜란드 대사관을 들락거리느라 바쁘던 조용한 곰이 오랜만에 자신의 집무실을 방문하자 기대 섞인 눈초리로 조용한 곰을 반겼다.
일전에 조용한 곰이 집무실을 방문했을 때, 정성국은 동남아시아 정세를 의도적으로 숨긴 네덜란드가 괘씸해 은근히 네덜란드를 압박해 뜯어낼 수 있는 것은 다 뜯어내라고 조용한 곰을 부추겼으니까.
해서 정성국은 조용한 곰이 네덜란드 대사를 상대하고 얻은 전리품이 궁금했지만, 조용한 곰은 이곳을 방문하느라 더운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기에 정성국은 용건을 묻기 전에 일단 조용한 곰을 위해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조용한 곰에게 내어주었고.
조용한 곰이 정성국이 내어준 아이스크림을 순식간에 먹어치우자 정성국이 추가로 아이스크림을 넘겨주며 물었다.
“자네. 땀을 너무 흘리는 것 같은데?”
“올해의 더위가 심상치 않습니다. 잠깐 자동차를 탔을 뿐인데도 버티기 힘들 정도이니까요.”
“허. 그래?”
관용차가 일반 자동차보다 고급스러운 자동차이기는 했지만, 전생의 자동차처럼 냉방 장치마저 장착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러니 뜨거운 햇볕으로 달궈진 자동차에 탑승한 조용한 곰은 마치 한증막에 들어간 것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대화를 통해 이를 눈치챈 정성국은 혀를 차며 대책을 세우긴 해야겠다고 여기며 조용한 곰이 두 번째 아이스크림을 먹어치우는 것을 바라보다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래. 네덜란드 대사와의 이야기가 잘 끝났고?”
이에 조용한 곰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네덜란드 대사를 압박해 말라카 항과 실론 섬의 땅 일부를 할양받았습니다.”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고생했네. 말라카 항은 꽤 중요할 텐데 네덜란드가 용케 말라카 항의 땅을 넘겼군.”
말라카 해협은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중요한 통로이자 인도, 중동, 아프리카 지역과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항로가 지나는 해협이었기에 그 중요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해상 운송량이 늘어날수록 이 해역은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고.
그러니 정성국은 상황을 봐서 말라카 반도나 수마트라 섬의 토착 세력과 동맹을 맺어서라도 해협 안쪽에 항구를 하나쯤 건설할 생각이었는데, 조용한 곰이 네덜란드 대사를 압박해 그 중요한 말라카 항의 일부를 할양받아 북미왕국의 영토가 되었으니 정성국은 무척이나 기뻐하며 조용한 곰을 칭찬했고.
이에 조용한 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생각보다 설득은 쉬웠습니다.”
“음? 쉬웠다고? 그럴 리가?”
네덜란드가 16세기에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던 동남아시아의 해상 무역을 뺏기 위해 가장 먼저 확보하려 한 곳이 바로 말라카 항이었다.
그러니 정성국은 네덜란드 대사가 말라카 항을 쉽게 내어줄 리 없다고 생각했고.
이에 조용한 곰은 정성국을 보고 씩 웃으며 답했다.
“말라카 항을 요구하기 전에 미리 향신료 제도를 언급했거든요.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조용한 곰의 말 상황을 파악한 정성국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네덜란드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말라카 항의 일부를 이렇게 빨리 할양한 것인지 이해했기에.
“푸하하. 향신료 제도를 일부 넘겨서 향신료 무역의 독점이 깨지는 것보다는 말라카 항의 일부를 넘기는 것이 낫다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전하.”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네덜란드 대사의 선택이 못내 웃겼기에 실실거리며 중얼거렸다.
“흐흐흐. 아국에서 본격적으로 향신료들을 재배하면 네덜란드는 아주 기겁하겠구만.”
“기겁하는 정도가 아닐 겁니다. 네덜란드 대사와 이야기하며 슬쩍 네덜란드 본국의 상황을 확인했는데 저희의 예상보다 엉망인 것 같더군요.”
조용한 곰은 말라카 항과 실론 섬 일부의 할양을 위해 계속해서 네덜란드 대사의 얼굴을 봐야 했고, 쉬지 않고 협상을 진행할 수야 없는 노릇이라 간간이 티타임을 가지며 네덜란드 대사의 한탄을 들었었기에 이를 정성국에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놀라울 것은 없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야 그럴 테지. 전 국토의 1/4 가까이가 완전히 작살이 나버렸는데. 그나마 네덜란드가 대외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어둬서 복구가 가능한 거지 다른 나라였으면 그대로 삼류 국가로 전락했을걸?”
네덜란드는 육로로 진격하는 프랑스군을 막기 위해 댐을 터트리기도 했고, 프랑스는 계속된 전쟁으로 재정 상태가 나빠지자 네덜란드 현지인들의 반발을 꺾는다는 구실로 점령한 지역을 무차별적으로 약탈했다.
더불어 북미왕국이 은연중에 네덜란드의 편을 들며 점령했던 네덜란드 지역에서 물러나라고 압박하니, 프랑스는 새한성의 프랑스 대사를 통해 이 소식을 듣고 북미왕국이 네덜란드의 편을 들어준다면 점령한 지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그리고 다시 이 지역을 통치해야 하는 네덜란드에 부담을 가중시킬 생각으로 네덜란드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프랑스군에 약탈 명령을 내렸기에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 남부 지역은 완전히 초토화되어버렸고.
그렇기에 다른 나라였다면, 영토의 1/4이 완전히 초토화되었기에 복구는 엄두도 못 냈을 테지만, 네덜란드는 그동안 전 세계의 해양 패권을 장악하며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기에 아예 복구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고.
해서 정성국이 이런 네덜란드의 저력을 떠올리며 입을 열자 조용한 곰이 정성국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지요.”
“헌데 네덜란드가 빌빌대봐야 좋을 것은 없지?”
북미왕국의 농업 연구소에서는 향신료 종자를 확보하고 향신료를 재배할 장소마저 확보해둔 상태였다.
그러니 정성국이 명령만 내리면 곧바로 향신료를 재배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향신료 무역을 독점해 막대한 부를 쌓은 네덜란드가 흔들릴 수밖에 없기에 조용한 곰에게 질문하자 조용한 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렇지요. 네덜란드가 망해봐야 프랑스만 좋을 겁니다.”
애초에 북미왕국이 프랑스와 반프랑스 동맹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한 것이 프랑스의 과도한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함이었던 만큼, 정성국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럼 향신료의 대량 재배는 조금 미뤄야겠군. 아니면 아국에서 소비할 양만큼만 생산하던가.”
“그러는 편이 나을 듯싶습니다.”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말에 맞장구치면서도 이를 이용해 추가로 네덜란드에 무언가를 뜯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때 조용한 곰의 귓가에 정성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보다 말라카 항과 실론 섬의 땅을 확보했으니 바로 개발에 들어가야지?”
“예. 그래야지요. 해서 전하께 보고를 마친 후 개발청장에게 이 소식을 알릴 생각입니다. 헌데 두 지역의 경우 현지인들이 많기에 이들을 고용해 일을 맡기면 되는 터라 개발이 무척 쉬울 것 같습니다. 기술자와 관리 인원, 그리고 물자만 보내면 되니까요.”
그동안 북미왕국이 확보한 해외 영토들의 경우 현지인들의 수가 많지 않았다.
그러니 인력 확보가 쉽지 않았고, 자연히 개발 기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말라카 항은 말레이 반도의 중심지였기에 인구가 바글바글했으며, 실론 섬 역시 실론 섬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콜롬보 항 인근의 땅을 할양받았기에 돈만 있다면 북미왕국을 위해 일을 할 현지인을 고용하긴 쉬웠다.
그러니 매번 인력 확보를 위해 고생해야 했던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고.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보다 말라카 항을 확보한 이상...새로운 함대를 창설하고 말라카 항에 새로운 함대의 사령부를 두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새로운 함대의 창설을 거론하는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은 잠깐 고개를 갸웃하다 물었다.
“말라카 항에 새로운 함대를요? 혹시 해적 때문입니까?”
북미왕국이 서인도제도, 그러니까 카리브 해에서 날뛰던 해적들을 토벌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해적들이 도저히 북미왕국의 해군은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동안 카리브 해에서 활동하던 해적들은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로 도망쳤고.
이렇게 카리브 해에서 활동하면서 북미왕국 해군의 강력함을 직접 목격한 해적들이 이 지역들로 도망치자 자연스레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하던 해적들도 북미왕국 해군의 강력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북미왕국이 에스파냐와 협상해 필리핀 북부 지역을 할양받고 이곳에 거점을 세우자, 그동안 필리핀 북부 해안가에서 해적질하던 필리핀, 그리고 중국 남부를 거점으로 움직이는 해적들마저 일제히 북미왕국의 전선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피신했고, 호주 연합에 나가 있던 외무청 관리들이 남태평양 탐사대의 배를 타고 뉴기니 섬을 들락거리자 뉴기니 인근에 거점을 두고 가끔 향신료 제도를 드나드는 배를 공격하던 해적들 역시 해적질을 관두거나 다른 지역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렇게 해적들이 북미왕국의 전선이 보이면 기겁하며 도망치자 자연히 해적들이 활동하는 해역은 점차 줄어들었고, 그만큼 해적들의 밀도는 높아졌으며, 이 해적들이 서로 싸우기도 했지만, 또 일부는 뭉쳐 커다란 해적단을 구성해 아예 항구를 습격하기도 했고.
이러한 소식은 여러 대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조용한 곰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묻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리카와 인도, 동남아 지역에 해적들이 아주 득실득실하잖나.”
“그건 그렇지요. 헌데 함대를 새로이 창설할 필요야 있겠습니까? 그냥 다른 해외 영토처럼 전선 몇 척만 배치하면 충분할 것 같은데...”
조용한 곰이 조금 과한 것 아니냐는 듯 묻자 정성국은 그건 아니라는 얼굴로 말했다.
“말라카 항은, 아니 말라카 해협은 인도양과 동아시아의 통로잖나. 그러니 이곳을 장악하면 최소한 아프리카, 인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해적과 동아시아에서 활동하는 해적의 교류는 차단할 수 있겠지.”
“아...그건 그렇네요.”
조용한 곰이 정성국의 말에 수긍하자 정성국은 덧붙였다.
“그리고 점차 대외 무역이 활발해지면 항로의 안전을 위해 각 지역에 해역을 배치하긴 해야 하거든. 그러니 일단은 말라카 항에 새로운 함대를 창설해 배치하고 실론 섬까지 관할하게 하고, 나중에 여유가 되면 인도 지역에도 새로운 함대를 창설해서 관할을 바꾸면 되겠지.”
“허. 전하께서는 전 세계의 바다를 모두 관리하실 작정이십니까?”
정성국의 말을 들어보면 무역로의 안전을 위해 전 세계의 바다에 함대를 파견할 것처럼 들렸기에 조용한 곰이 놀란 얼굴로 되묻자 정성국이 어깨를 으쓱했다.
“필요하다면 그래야지. 다만 나도 그러고 싶진 않으니...외무청에서 우리의 우호국을 많이 만들어줘야지. 그리고 이 우호국들이 자체적으로 해적을 소탕해 바다가 안전해지면 우리가 나서서 고생할 필요는 없을 테고.”
막대한 부담을 주는 정성국의 대답에 조용한 곰은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허허허. 이것 참...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지요.”
“그래. 자네만 믿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