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화
네덜란드 대사는 조용한 곰이 갑자기 네덜란드 대사관을 방문하자, 무슨 일인가 싶어 곧바로 조용한 곰을 응접실로 안내했고.
응접실로 들어온 조용한 곰의 얼굴이나 분위기가 썩 좋아 보이지 않자 네덜란드 대사는 분위기를 바꿀 겸 하녀에게 손짓해 커피와 디저트를 가져오라고 시켰고, 하녀가 커피와 디저트를 응접실의 탁자 위에 올려두자 네덜란드 대사가 조용한 곰에게 이를 권했다.
“일단 커피와 함께 이 디저트 좀 드셔 보시지요. 이번에 암스테르담에서 유명한 요리사를 데려왔는데 그 요리사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디저트가 바로 이겁니다.”
“그렇습니까?”
네덜란드 대사의 권유에 조용한 곰은 슬쩍 접시에 담긴 격자 모양이 인상적인 디저트를 한입 베어 물었고.
바삭거리는 식감과 함께 입안이 계피 향으로 가득 차자 조용한 곰이 슬쩍 미소지었다.
“맛있군요.”
“하하하. 그렇지요?”
조용한 곰의 반응에 네덜란드 대사는 기회다 싶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바꾸려 들었지만, 조용한 곰은 네덜란드 대사의 이야기에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고 커피를 조금 마실 뿐이었고.
그런 조용한 곰의 행동에 네덜란드 대사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용한 곰이 비록 무뚝뚝한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분위기가 가라앉을 정도로 무게를 잡는 인사는 아니었으니까.
해서 네덜란드 대사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꾸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질문을 던졌다.
“헌데 갑자기 이곳엔 무슨 일로 방문하신 겁니까?”
네덜란드 대사가 조용한 곰이 네덜란드 대사관을 방문한 목적을 묻자 조용한 곰은 이 질문만을 기다린 듯 눈을 빛내며 곧바로 대답했다.
“따질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네덜란드 대사는 조용한 곰의 말에 기겁했다.
따질 것이라니.
현재 네덜란드는 황폐해진 남부 지역들을 복구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었기에 북미왕국과의 무역이 무엇보다 절실한 상황이었다.
해서 네덜란드 본국에서도 네덜란드 대사에게 북미왕국과의 관계를 최대한 신경 쓰라는 훈령을 보내올 정도였고.
헌데 외무청의 수장인 조용한 곰이 갑자기 대사관을 방문해 따질 것이 있다고 하니 네덜란드 대사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빛을 보내자 조용한 곰이 말했다.
“분명 프랑스와의 협상이 시작될 때 대사께서 그러셨잖습니까.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 지역을 거의 장악했다고. 그렇기에 아국이 원하는 지역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말입니다.”
그제야 네덜란드 대사는 조용한 곰의 방문 목적을 깨닫고 움찔했다.
네덜란드는 북미왕국이 프랑스와의 협상에서 중재해준 대가로 북미왕국의 동남아시아 진출을 돕기 위해 땅 일부를 내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최근 북미왕국의 외무청 관리와 협상한 결과 이들이 원하는 땅들이 대부분 네덜란드의 영향력 밖에 있는 땅들이었기에 북미왕국이 원하는 대로 땅을 내어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이를 알게 된 네덜란드 대사는 은근슬쩍 자신들이 확보한 지역의 땅이 더 좋다며 북미왕국의 선택을 바꾸려 했지만, 북미왕국은 보르네오 섬의 동쪽 해안가, 그리고 팔렘방 인근 해안가의 땅이 마음에 든다면서 이 땅들을 내어달라고 요구했고.
문제는 북미왕국이 원하는 보르네오 섬의 동쪽 해안가는 반자르 술탄국의 영역이었는데, 반자르 술탄국의 세력은 무척이나 강대해서 네덜란드조차 섣불리 이들을 건드릴 방법이 없었을뿐더러, 프랑스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더 많은 돈이 필요했던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세력 확장을 시도하고 반자르 술탄국에서 생산하는 후추를 독점적으로 거래하려 했다가 반자르 술탄국과 마찰이 생겼기에 북미왕국을 대신해 보르네오 섬의 동쪽 해안가를 확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팔렘방 인근 해안가는 팔렘방 술탄국의 영토였는데, 팔렘방 술탄국은 기존의 팔렘방 토착 세력이 네덜란드의 침공 때문에 현지의 이슬람 세력마저 받아들여 팔렘방 술탄국이 건국된 터라 네덜란드와는 적대적이었고, 당연히 네덜란드가 나서서 팔렘방 술탄국과 거래를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이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데 예전 에스파냐가 북미왕국과의 협상에서 장난을 쳤다가 뒤늦게 이를 파악한 북미왕국이 이를 따지고 들어 몇 배로 배상해야 했다는 사실은 네덜란드 대사도 잘 알고 있었기에 보좌관과 대책을 마련 중이었고.
헌데 대책을 제대로 세우기도 전에 조용한 곰이 들이닥쳤으니 딱히 할 말이 없어 조용한 곰의 눈빛을 슬쩍 피한 네덜란드 대사가 대답했다.
“크흠. 그...그랬지요.”
그리고 네덜란드 대사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더욱 차가운 눈빛과 함께 말했다.
“해서 아국은 최선을 다해 프랑스를 설득했고, 결국 네덜란드는 원하는 데로 점령당한 땅을 모두 되돌려 받을 수 있었지요. 이 부분은 인정하시지요?”
“무...물론입니다.”
“헌데 막상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려고 보니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일부만 장악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아국은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는 데 필요한 땅을 하나도 확보하지 못할 것 같더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용한 곰의 어조는 평온한 편이었지만, 눈빛은 네덜란드 대사를 강하게 노려보며 분노를 표출했고, 이런 조용한 곰의 반응에 네덜란드 대사는 속으로 미친듯이 머리를 굴리면서 일단 시간도 끌고 조용한 곰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음. 그 부분은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만...”
“다만?”
할 말이 있긴 하냐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조용한 곰을 보고 네덜란드 대사는 다시 죽어라 머리를 굴리다가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반자르 술탄국이든, 팔렘방 술탄국이든 네덜란드의 적대 세력이었고, 현재 네덜란드는 프랑스와의 전쟁 후유증으로 골골대고 있었기에 감히 이들을 어떻게 하지 못했지만, 북미왕국은 사정이 전혀 달랐다.
북미왕국이 마음만 먹는다면야 반자르 술탄국이든, 팔렘방 술탄국이든 무슨 수로 버티겠나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네덜란드 대사가 보기엔 북미왕국은 보르네오 섬 동쪽 해안가와 팔렘방 인근 해안가의 땅을 꼭 확보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러니 이를 빌미로 북미왕국을 부추겨 두 세력과 충돌하게 하고, 네덜란드는 떡고물을 노린다면 북미왕국은 원하는 땅을 얻고, 자신들은 세력 확장을 할 수 있었기에 네덜란드 대사는 조용한 곰을 보며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에서 원하는 땅이 전부 우리 네덜란드의 영향력 밖에 있는 땅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해서 네덜란드 대사가 막 북미왕국을 부추기려 할 때, 조용한 곰이 네덜란드 대사의 말을 의도적으로 끊고 말했다.
“호오. 그럼 네덜란드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지역을 아국이 원한다면 기꺼이 내어주시겠군요?”
“어? 아...예.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암요.”
네덜란드 대사는 생각대로 대화가 흘러가지 않는 것이 조금 안타까웠지만 조용한 곰의 말을 들어보니 협상의 여지가 있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고.
네덜란드 대사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럼 향신료 제도의 땅도 괜찮습니까?”
“헉! 거기는 조금...”
조용한 곰이 향신료 제도를 거론하자 네덜란드 대사는 경기를 일으켰다.
본국의 복구에 막대한 재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북미왕국이 향신료 무역에 뛰어들면 향신료 무역의 독점이 깨지고 네덜란드의 수입은 급감할 수밖에 없으며, 향신료 무역의 수입이 급감하면 정말 네덜란드는 망할 수밖에 없었기에.
해서 네덜란드 대사가 손을 내젓자 조용한 곰이 피식 웃었다.
향신료 제도를 언급한 것은 농담이지 정말 향신료 제도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네덜란드야 향신료 무역에 목을 매고 있지만, 북미왕국은 사정이 달랐다.
더불어 네덜란드는 모르겠지만, 이미 북미왕국의 농업 연구소에서는 후추를 비롯해 정향, 육두구, 바닐라, 타마린드 등 각종 향신료의 종자를 입수해 재배하고 있었기에 무리해서 향신료 제도에 땅을 얻을 이유가 없었고.
다만 자신들이 원하는 땅은 다 내어줄 것처럼 이야기해놓고는 슬쩍 뒤로 빼는 네덜란드 대사가 괘씸했던 조용한 곰은 그런 네덜란드 대사를 은근슬쩍 타박하기 시작했다.
“흐음. 이거 갑자기 말이 달라지시는군요? 네덜란드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지역은 기꺼이 내어주시겠다더니?”
이에 네덜란드 대사는 북미왕국이 정말 향신료 제도를 노린다고 착각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사정했다.
“그게...아시다시피 향신료 제도는 우리 네덜란드의 목숨줄과도 같은 곳이기에 향신료 제도의 영토 할양은 본국에서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네덜란드 대사의 반응에 이쯤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지역을 언급했다.
“흠. 허면 말라카 항은요?”
말라카 항은 말레이 반도에 위치한 항구로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무역의 핵심 거점이었다.
아시아 무역을 위해선 말라카 해협을 이용해야 했는데 말라카 항을 장악하면 말라카 해협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기에.
해서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던 말라카 항을 점령하기 위해 끊임없이 침공한 끝에 겨우 말라카 항을 확보할 수 있었고.
하지만 네덜란드 대사가 판단하기엔 말라카 항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향신료 제도였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라카 항이요? 그럼요. 당연히 내어드릴 수 있습니...아. 설마 말라카 항 전체를 원하시는 것은 아니시지요?”
물론 말라카 항보다 향신료 제도가 중요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말라카 항 전체를 넘겨준다면 동남아시아 무역 네트워크가 어그러지기에 네덜란드 대사가 설마 하는 얼굴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자 조용한 곰이 빙긋 웃었다.
“예. 그건 아닙니다. 다만 북미왕국의 선박들이 드나들 수 있는 전용 선착장과 창고, 연료를 보관할 저장고 등, 각종 시설을 건설해야 하니 꽤 넓은 부지를 내어주면 좋겠습니다.”
이에 네덜란드 대사가 활짝 웃다가 순간 떠오른 생각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북미왕국 전용의 선착장이라면, 다른 배들의 입항은 금지하실 겁니까?”
“음? 아. 입항료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렇습니다.”
입항료마저 신경 쓰는 네덜란드 대사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속으로 혀를 차며 대답해줬다.
“뭐 아국은 딱히 입항료 때문에 말라카 항을 원하는 것이 아니니...아국과 아국의 동맹국의 배를 제외한 타국의 배는 입항을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덜란드 대사가 조용한 곰의 대답에 무척 만족했다.
북미왕국의 배들이 머물 말라카 항 일부를 내어주는 것으로 북미왕국이 중재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조용한 곰은 고작 말라카 항 일부를 받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기에 다시 네덜란드 대사를 보고 말했다.
“그리고 실론 섬의 땅도 좀 얻었으면 합니다만?”
“예? 실론 섬이요? 그곳은 동남아시아 지역이 아닌데...”
실론 섬은 인도의 남동쪽에 위치한 섬으로 16세기 초에는 포르투갈이 섬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뒤이어 인도양에 진출한 네덜란드가 실론 섬 동쪽의 토착 세력과 연합하고 포르투갈을 공격해 20년의 전쟁 끝에 포르투갈 세력을 실론 섬에서 완전히 소멸시키고 실론 섬의 토착 세력인 칸디 왕국과 섬을 양분했다.
이를 파악한 북미왕국의 외무청은 어차피 오스만 제국과 협상해 페르시아 만 인근의 땅을 확보할 생각이니만큼, 중간 거점으로 실론 섬이 적격이라고 판단했고.
다만 네덜란드가 약속한 땅은 동남아시아 지역이었는데 실론 섬은 인도 지역에 위치한 섬이었기에 네덜란드가 꼭 실론 섬을 내어줄 필요는 없었다.
해서 조용한 곰은 네덜란드 대사를 조금 과하게 압박한 것이었는데 네덜란드 대사가 슬쩍 이를 빠져나가려 하자 조용한 곰은 네덜란드 대사를 다시 째려보며 말했다.
“압니다. 다만 아국은 프랑스를 설득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는데 그 노력을 고작 말라카 항 일부를 내어주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면 조금 섭섭합니다만...”
이에 네덜란드 대사는 실론 섬 일부를 북미왕국에 내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크흠. 물론 그렇지요. 아국도 고작 말라카 항 일부를 내어주는 것으로 귀국의 도움을 잊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귀국은 보르네오 섬 동쪽 해안가와 팔렘방 인근 해안가를 꼭 원하고 있었기에 귀국이 이 지역을 점령할 수 있게끔 도울 생각이었습니다만...”
네덜란드 대사의 말에 조용한 곰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병력을 동원해 현지의 토착 세력을 공격하는 것을 정성국이 쉬이 허락할 리가 없었기에.
더불어 조용한 곰은 북미왕국의 힘을 이용해 동남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는 네덜란드 대사의 속셈을 파악했기에 네덜란드 대사에게 이용되고 싶지도 않았고.
“됐습니다. 그보다는 실론 섬에 거점 항구를 건설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이는군요.”
해서 바로 이를 끊어내자 네덜란드 대사는 안타까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 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