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2화
북미왕국 특유의 복식을 입은 큰 키의 사내가 런던 항 인근의 한 커피하우스로 들어서자, 한창 열정적으로 토론하던 사람들과 주변에서 이 토론을 경청하며 떠들어대던 사람들은 순간 멈칫하며 슬쩍 큰 키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런던에서 북미왕국의 복식을 입는 이들은 귀족들이거나, 런던 외곽의 북미왕국 대사관에 머무는 북미왕국인들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큰 키의 사내는 아무리 보아도 북미왕국인이 아닌, 같은 유럽인으로 보였기에 큰 키의 사내가 귀족이라고 지레짐작한 사람들은 왜 귀족이 뱃사람들이 주로 방문하는 항구 근처의 커피하우스를 방문한 것인지 의아해했다.
더불어 방금까지 프랑스의 확장을 막기 위해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해 프랑스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찰스 2세를 비판하던 사람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급히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었고.
하지만 큰 키의 사내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은 신경 쓰지도 않고 내부를 둘러보다, 창가 인근에 앉아 있던 한 왜소한 사내가 큰 키의 사내를 보고 손짓하는 모습을 확인한 후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근처의 시종에게 커피를 한 잔 주문한 후 왜소한 사내의 맞은편에 앉은 큰 키의 사내는 시선을 돌려 창밖의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한 척의 선박을 확인 후 묘한 미소와 함께 질문을 던졌다.
“꽤 잘 보이는군. 저건가?”
“그렇습니다.”
잉글랜드 출신의 북미왕국인으로 외무청의 위장 요원이자 정보기관의 요원인 큰 키의 사내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다 저 창밖의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잉글랜드가 시범적으로 건조한 저 한 척의 증기선 때문이었다.
북미왕국의 배들이 증기기관을 이용해 바람과 관계없이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것이 알려진 이후, 유럽 각국은 증기기관 연구와 함께 증기선의 연구도 시작했지만, 둘 다 쉬운 연구는 아니었다.
다만 유럽의 경우 기존에 증기기관을 연구하는 인물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증기기관을 연구한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으니 일부 성과가 있었다.
해서 최근 유럽 각국은 증기기관을 장착한 선박을 실험적으로 건조하고 있는 추세였고.
다만 다른 나라들은 한창 전쟁 중이라 그런지 조그마한 기선만 건조하면서 기술을 축적하고 있다면, 잉글랜드는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기 때문인지 막대한 돈을 투자해 커다란 기선을 건조했기에 정보기관의 요원인 큰 키의 사내는 이 기선의 성능과 잉글랜드가 연구한 증기기관의 수준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직접 이렇게 나왔고 말이다.
그리고 창밖에 정박해 있는 잉글랜드의 기선을 처음으로 확인한 큰 키의 사내는 조금 놀랍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헌데...저건 내 예상보다도 크네? 난 잘해야 2선급 전열함 정도의 크기를 생각했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북미왕국의 인급 함선과 비슷한 크기로 보이니까요.”
현지 정보원이라 할 수 있는 왜소한 사내가 큰 키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큰 키의 사내는 잠시 팔짱을 끼며 창밖으로 보이는 증기선을 응시하다 중얼거렸다.
“그럼 못해도 500톤급은 된다는 소린데, 저 배를 증기기관을 이용해서 움직인다면, 잉글랜드의 증기기관 수준은 우리의 예상보다 대단한 모양이군.”
“그렇죠. 뭐 실제 저 배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긴 해야겠지만...아마 잉글랜드는 100마력의 벽을 넘긴 한 모양입니다.”
그동안 북미왕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증기기관이라는 기물이 얼마나 쓸만한지를 깨달은 각국은 증기기관의 연구와 개량에 힘써왔지만, 아직까지 100마력의 벽을 넘은 나라는 없었다.
헌데 이 100마력의 벽을 잉글랜드가 최초로 넘은 것처럼 보이자 큰 키의 사내는 볼을 긁적이다 입을 열었다.
“100마력의 벽을 넘었다라...이거 의외로군. 난 프랑스가 가장 먼저 100마력의 벽을 넘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유럽의 중심은 프랑스였고, 그만큼 유럽의 여러 인재들은 프랑스로 향했기에 프랑스의 학문, 기술 등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한발 앞서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해서 큰 키의 사내는 100마력의 벽을 넘는 것은 프랑스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고, 이런 큰 키 사내의 말에 왜소한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확실히...그렇긴 하지요. 잉글랜드보다야 프랑스의 기술 수준이 더 높다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다만...”
“다만?”
“잉글랜드가 저렇게 기선을 건조한 이상, 프랑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특히 루이 14세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하하하. 그건 그렇지. 그리고 에스파냐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고.”
파리의 북미왕국 대사관을 통해 알게 된 루이 14세의 성정을 떠올린 큰 키의 사내가 웃으며 왜소한 사내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에스파냐를 거론하자 왜소한 사내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본격적으로 증기기관 연구를 시작한 것은 분명 에스파냐였기에.
“예. 에스파냐는 예전부터 증기기관과 기선 연구에 힘쓰고 있었으니까요. 해서 아마 저 기선을 기점으로 유럽 각국이 본격적으로 기선을 건조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열탄처럼요.”
“작열탄이라...”
프랑스가 북미왕국의 작열탄을 참고해 자신들만의 작열탄을 만들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막대한 이득을 취하자 다른 유럽 국가들도 작열탄 개발에 박차를 가해 결국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은 작열탄을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이번 잉글랜드의 기선 개발도 각국의 기선 건조에 시발점이 되지 않겠느냐는 왜소한 사내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큰 키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불어 작열탄과는 달리 증기선의 경우 증기선을 개발하면서 확보한 증기기관 기술이 한 나라의 발전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대단한 기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큰 키의 사내는 이번 일로 촉발될 유럽의 발전을 경계하며 생각에 잠겼고.
그때 갑자기 생각에 잠긴 큰 키 사내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던 왜소한 사내는 연기를 내뿜던 기선이 마침내 닻을 올리자 큰 키의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어? 저기 보시지요! 드디어 움직이는군요!”
“아...”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큰 키의 사내는 왜소한 사내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창밖의 기선을 바라보았고.
선착장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기선을 보고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굼뜬데?”
물론 저 기선이 북미왕국의 선박들처럼 빠르게 움직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기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동력인 기관인데, 잉글랜드의 증기기관과 북미왕국의 증기기관은 마력 수에서 몇 배나 차이가 날 것이 분명했으니까.
다만 큰 키의 사내는 못해도 범선과 비슷한 성능은 보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보다 못한 느낌이라 조금 김이 새버렸고.
“그렇긴 합니다만 아직 제대로 가속이 붙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냐. 그 점을 고려해도 느려. 저 정도라면 가속이 붙어봐야 겨우 5노트 정도 나올 것 같은데...”
대다수의 북미왕국 선박이 20노트 정도로 움직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저 기선이 느린 것은 사실이었기에 왜소한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슬쩍 반박했다.
“물론 아국의 배에 비하면 굼벵이나 마찬가지긴 한데...그 정도면 쓸 만은 할 것 같은데요? 특히 기선은 바람과 상관없이 일정한 속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니까요.”
이에 큰 키의 사내는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씩 선착장에서 멀어져 가는 굼뜬 잉글랜드의 기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흠. 그렇긴 하지. 그리고 저 인급 전선과 비슷한 크기의 배가 5노트 가까이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잉글랜드가 새로 만든 증기기관이 쓸만하다는 뜻이니...그 증기기관을 이용해 기범선을 건조한다면 정말 쓸만할 것 같고. 이거 바로 본국에 보고해야겠군.”
* * *
정성국은 집무실을 방문한 정보기관의 책임자 중 하나인 게으른 곰을 보고 활짝 웃으며 그의 방문을 반겼다.
“오랜만이군. 게으른 곰.”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그동안 정보기관은 주로 보고서를 통해 정성국에게 보고했지, 서면 보고는 거의 하지 않았기에 오랜만에 만난 게으른 곰을 정성국이 무척 반기며 게으른 곰과 함께 정보기관을 맡은 음흉한 여우의 안부를 물었다.
“그래. 음흉한 여우는 잘 지내고?”
“그렇습니다. 전하. 새진주로 전해지는 각종 정보를 정리하고 분석하느라 정신이 없지요.”
국내의 방첩 업무를 담당하는 게으른 곰과는 달리 음흉한 여우는 해외의 정보 수집을 담당했기에 각종 정보가 들어오는 새진주에서 매일같이 야근하면서 정보를 정리하고 분석하느라 정신없다는 게으른 곰의 이야기에 정성국은 괜히 찔려서 바로 이야기의 주제를 돌렸다.
“크흠. 그거 고생하는군. 내가 따로 포상하도록 하지. 그보다 자네가 갑자기 방문한 이유가 뭔가?”
“전하께서 예전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증기기관의 파급력은 대단하기에 다른 나라에서 고성능의 증기기관을 개발하게 되면 즉각 보고하라고 말입니다.”
“아. 그랬지. 그럼...?”
정성국이 게으른 곰을 바라보자 게으른 곰은 정성국의 짐작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런던에 나가 있는 위장 요원이 보고하길, 잉글랜드가 500톤급 기선을 건조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정성국은 게으른 곰의 대답에 눈을 크게 뜨며 급히 질문을 퍼부었다.
“음? 500톤급 기선이면 인급 함선과 동급이잖아? 그 정도 되는 배를 증기기관만으로 움직였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물론 증기기관의 마력이 얼마 되지는 않는지 무척 느린 편이라고는 합니다만...”
이에 조금 안도한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인급 함선 정도의 배를 증기기관만으로 움직이려면 잉글랜드의 증기기관을 무시할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해서 연구청에 조언을 구해 보았는데 연구청에서는 잉글랜드의 증기기관이 못해도 150마력 수준은 된다고 예상하더군요.”
게으른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탄성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허. 이거 정말 의외네. 150마력이라니. 잉글랜드가 처음으로 100마력의 벽을 깼다는 건가? 난 조선이나 프랑스가 100마력의 벽을 깰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선이야 매년 기술자들이 북미왕국을 방문하면서 눈으로나마 일부 증기기관을 관찰하기도 했고, 프랑스는 기초 과학 기술이 다른 나라에 비해 나았기에 정성국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리자 게으른 곰이 대답했다.
“예. 아마 잉글랜드는 적극적으로 증기기관을 활용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음? 적극적으로 증기기관을 활용했다고?”
“그렇습니다. 잉글랜드가 처음으로 100마력의 벽을 깬 것이 예상외라고 생각했던 런던의 위장 요원은 휘하의 정보원들을 대거 동원해 증기기관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했는데 잉글랜드는 아국처럼 증기기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정보를 확보했습니다.”
게으른 곰의 말에 정성국은 자세히 설명하라고 재촉했고, 게으른 곰은 런던에서 보내온 보고서의 내용을 떠올리며 답했다.
“일단 잉글랜드는 광산에 적극적으로 증기기관을 도입해서 광산의 배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더 깊은 곳에서도 광물을 캘 수 있다고 하더군요.”
애초에 잉글랜드가 처음으로 증기기관을 활용했던 것은 광산이었기에 정성국은 역시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관리청장에게 들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으음...요 근래에 잉글랜드가 수출하는 광물이 늘어난 것이 다 그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또한, 이 광물들을 운반하기 위한 광차에 증기기관을 장착해 써먹고 있고 말입니다.”
게으른 곰의 말에 정성국은 기겁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 광차에 증기기관을 장착해 캐낸 광물을 운반한다고? 그건...기차나 다름없잖아?”
이에 게으른 곰 역시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기차나 다름없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귀족들이 소유한 일부 공방에서는 인력 대신 증기기관의 동력을 이용해 물건을 만들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게으른 곰은 런던에서 보내온 보고서에 담긴 사례를 끊임없지 정성국에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허. 이거 내 예상보다...”
“예. 잉글랜드는 예상보다 증기기관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정성국은 게으른 곰의 대답에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북미왕국을 매년 드나드는 조선도 아직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잉글랜드가 조선보다 증기기관을 제대로 활용할 줄은 미처 몰랐기에.
다만 전생에서도 잉글랜드는 증기기관을 그 어느 나라보다 제대로 활용했고 이를 이용해 패권을 장악한 만큼 잉글랜드와 증기기관은 궁합이 잘 맞나 보다 하고 생각한 정성국은 잉글랜드가 이렇게 증기기관을 활용하며 조금씩 발전해가고 있는 만큼, 잉글랜드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잉글랜드의 발전을 그냥 두고 볼 리 없는 유럽의 나라들도 잉글랜드를 따라 더욱 적극적으로 증기기관을 연구하고 이를 이용하려 들 것이 뻔한 터라, 전생처럼 유럽 대륙은 다른 대륙과는 다르게 급격히 발전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고.
해서 정성국은 게으른 곰을 보고 명령을 내렸다.
“아무래도 유럽에 제대로 된 정보망을 조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네. 잉글랜드도 그렇고, 다른 나라들도 빠르게 발전할 테니까 말이네.”
“흐음...알겠습니다. 뭐 당장 음흉한 여우의 일이 많아지겠지만, 그만큼 음흉한 여우의 권한도 커지는 만큼, 오히려 음흉한 여우는 환영하겠지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