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3화
정성국은 집무실을 찾아와 보고하는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황당한 얼굴을 하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니. 유럽 나라들끼리의 협상을 왜 여기서 해?”
프랑스가 잉글랜드의 중재 제의를 받아들였기에, 해당국의 외교관들이 모여 협상을 시작해야 했는데, 프랑스는 자국에서, 다른 나라들은 타국에서 협상을 진행하길 원했고, 그러다 보니 결국 북미왕국에서 이번 협상을 진행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조용한 곰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일단 아국도 중재국이지 않습니까. 원래 이런 협상은 중재국에서 하는 것이 맞지요.”
“아니. 중재국이래도 가까운 잉글랜드가 있는데...”
물론 중재국이 북미왕국뿐이라면 어떻게 이해할 수도 있다.
헌데 잉글랜드도 중재국이고, 이곳에 더 가까운데 뭐하러 이 먼 곳에서 협상을 하려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고, 이를 언급하자 조용한 곰이 말했다.
“새한성에는 이번 종전 협상에 참여하는 프랑스, 에스파냐, 네덜란드, 덴마크, 잉글랜드의 전권대사들이 모두 모여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따로 전권대사를 다른 지역에 파견하는 것보다는 이들에게 맡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새한성에 주재하는 대사들이 바로 협상을 진행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전하.”
그러면서 전권을 위임할 만한 외교관이 많지는 않은 터라 각국은 차라리 새한성에 있는 대사들에게 협상을 맡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 같고, 분명 새한성은 멀지만, 북미왕국은 정기적으로 연락선을 보내고, 각국 대사들도 북미왕국의 도움으로 이 연락선을 통해 본국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터라 새한성의 대사들에게 맡기는 것도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라고 덧붙이자 정성국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프랑스와 반프랑스 동맹 사이에서 협정을 중재하기로 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투덜거리듯 말했다.
“거참...어쩔 수 없군. 알겠네. 그보다 우리가 따로 신경 써야 할 것은 없지?”
“그럼요. 그냥 외무청 내의 회의장 정도만 빌려주면 됩니다. 어차피 잉글랜드 대사가 일을 주도하기로 했으니까요.”
“그렇다면야...뭐 그러라고 하게.”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한 곰이 이야기의 주제를 돌렸다.
“그리고 전하. 왜국에서 이주민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아. 그래?”
작년 말부터, 조선인들의 유입이 끊기면서 북미 서해안 지역의 인구 증가가 정체하기 시작했기에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보고에 반색하자 조용한 곰이 자세한 사항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 일단은 1만 명을 보냈고...북방 항로가 닫히기 전까지 2만 명을 추가로 보내겠다더군요.”
“흠. 매년 3만 명인가?”
정성국은 조금 아쉽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인들의 이주를 제한하기 전에는 한 해에 10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이주했었으니.
그리고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이 쓰게 웃으며 그를 달랬다.
“그렇습니다. 수가 적어 아쉽긴 합니다만 뭐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그래. 뭐 조금이나마 이주민이 유입된다는 것이 다행이긴 하지.”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한 곰이 안색을 살짝 굳히며 말했다.
“헌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이번에 이주한 왜인들은 옛 아일랜드인들처럼 당장은 노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겁니다.”
북미왕국은 예전 잉글랜드와 협상을 맺은 이후 계속해서 아일랜드 지역에서 이주민을 데려오고 있었다.
헌데 이주 초창기에는 아일랜드인들을 북미왕국으로 데려와도 제대로 일을 시킬 수 없는 상태였다.
잉글랜드가 아일랜드에서 나오는 식량을 대부분 본국으로 가져간 터라, 그리고 그나마 비옥한 아일랜드의 땅은 잉글랜드 농민들에게 내어주면서 아일랜드인들은 척박한 아일랜드 서부로 몰아낸 터라 아일랜드인들 태반이 계속된 굶주림에 몸 상태가 워낙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해서 북미왕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들은 일단 뉴펀들랜드 섬에서 머물며 조금이나마 건강을 회복한 후 북미왕국 각지로 정착했었고, 이를 보고받은 정성국은 괜히 훗날 아일랜드 대기근이 일어난 것은 아니구나 싶어 혀를 차면서 아일랜드로 식량을 보내기도 했었고.
그렇기에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옛 아일랜드인들의 상황이 떠올라 인상을 확 찌푸렸다.
“거참...아니. 잉글랜드야 아일랜드인들을 식민지 백성으로 생각하니 이해한다고 쳐도 왜인들은 자기네 백성이잖아. 근데 그렇게 엉망이라고?”
정성국의 투덜거림에 조용한 곰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투로시노에게 듣자니 왜국 백성들은 다 비슷하다더군요. 워낙 많은 세금을 내야 해서 말입니다.”
“쯧...아무튼, 상황이 그렇다면 막부에서 지원금을 노리고 숫자만 채워 보냈다는 건데...”
“그렇습니다. 또한, 굶주린 왜인들이야 이쪽에서 몇 달 동안 잘 정양시키면 건강을 회복해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을 테니 상관없는데 몸이 성치 않은 이들이라거나, 병에 걸려 골골대는 이들도 있어 문제입니다.”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이 움찔했다.
굶주리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면역력이 떨어지면 각종 질병에 취약해지며, 그렇게 걸리는 병들 중에 전염병이 있을 가능성이 크니 말이다.
“설마 전염병은 아니지?”
“전염병에 걸린 이들을 보낸다면 저희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막부에서도 그걸 알기 때문인지 저들은 히로사키 번에서 어느 정도 확인을 하고 보냈고, 그 때문에 전염병에 걸린 이들은 없었습니다.”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군. 그렇게 몸 상태가 개판이었다면 면역력이 떨어져 각종 전염병에 걸릴 위험이 컸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튼, 왜국에서 보내는 왜인들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 보니...당장 개발청의 일꾼으로 보내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정성국은 이번에 북미왕국으로 오는 왜인들을 대부분 개발청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아니면 독립한 도로국, 철도국 정도로 보내는 것도 고려했고.
헌데 몇 년 동안 골골대던 이들을 공사 현장에 투입해봐야 제대로 일도 하지 못하고 죽어 나갈 것은 뻔했기에 정성국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끙...어쩔 수 없지. 허면 바로 정착시키도록 하지.”
“헌데 전하. 듣기로 조선인들은 왜인들을 썩 좋아하진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볼을 긁적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좀 그렇지? 조선인들은 예전부터 왜구들에 의해 시달렸고, 또 90년 전쯤엔 왜란으로 고생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예. 그래서 외무청의 일부 관리들은 이들을 우래건 지역으로 정착시키는 것보단, 내륙 지역에 정착시키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건의했습니다만...”
“내륙? 내륙이면 어디?”
“일단은 저 알칸사스 지역이나 미주리 지역으로 보낼까 싶습니다만.”
이에 정성국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정성국이 왜인들의 이주를 허용한 것은 북미 서해안 지역의 인구 증가를 위해서였으니.
하지만 조용한 곰의 말처럼 왜인들을 조선인들이 많은 우래건 지역에 보냈다가 이런저런 말썽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한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흐음...뭐 상관없겠지. 그러도록 하게. 아. 그리고 왜인들을 내륙으로 보내는 김에 아일랜드인들도 내륙으로 보내고...또 일부는 우래건 지역으로 보내게.”
“아일랜드인들을 말입니까?”
“그래. 생각보다 많은 아일랜드인들이 이주하고 있고, 덕분에 북미 동부 지역에서 유럽인들의 비율이 너무 늘어나는 것 같으니 슬슬 이를 조절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네.”
아일랜드인들은 예전부터 잉글랜드에 시달려왔고, 그 때문인지 너도나도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고 싶어 했다.
어차피 비옥한 땅은 잉글랜드에 다 넘겨주고 척박한 서부 지역으로 쫓겨난 터라 괜히 아일랜드 지역에서 굶주리며 살기보다는 잉글랜드도, 현재 유럽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프랑스도 눈치를 보는 북미왕국의 품 안에서 사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매년 아일랜드에서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숫자는 늘어났고, 아마 이대로 10년 정도만 흐른다면 북미왕국의 인구 중 원주민들을 제외하고 가장 큰 숫자를 차지하고 있는 조선 출신 정착민들보다 더 많은 수를 자랑하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정성국은 아일랜드인들을 북미왕국 곳곳에 정착시켜 훗날 이들이 세력을 이루지 못하게 할 생각으로 이야기하자 조용한 곰이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얼굴을 하며 되물었다.
“이주민들이 조국을 그리워하며 아국을 배신할까 걱정하시는 겁니까?”
이에 정성국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었다.
“설마 미치지 않고서야 과연 그러겠는가. 특히 유럽인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아일랜드인들의 조국은 이미 망했고, 정보기관을 통해 파악하기로는 아일랜드인들은 아일랜드 왕국을 재건하는 데 딱히 미련이 없어 보인다던데.”
“그거야 그렇지요. 물론 그와는 별개로 잉글랜드에 원한은 조금 있는 모양입니다마는...”
“잉글랜드 때문에 고생하고, 친인들을 잃었으니 그거야 당연한 거고. 아무튼, 지금 당장은 아일랜드인들이 아국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해. 다만 미래는 또 모르는 일이니 적당히 손을 써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어서 말이야.”
정성국은 교육을 통해 피부색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다 똑같은 북미왕국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주지시키고 있긴 했다.
다만 어딜 가나 불만이 많거나 분열을 통해 무언가 이득을 얻으려는 종자들은 있는 법이었고, 그렇기에 정성국은 먼 훗날의 후손들을 위해 이주민들을 분산시킬 생각이었고.
원래 소수라면 쉽사리 목소리를 내긴 어려운 법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조용한 곰은 이런 정성국의 생각을 다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정성국의 말마따나 만약을 대비할 필요는 있다는 생각에 정성국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음...알겠습니다. 어차피 일리노이 지역, 이로쿼이 지역, 누벨 프랑스 지역의 인구는 충분하니 상관없겠지요.”
그렇게 이주 문제를 일단락한 조용한 곰은 다시 이야기의 주제를 돌렸다.
“그리고 전하. 날이 풀리자 조선인들이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주하고 있답니다.”
“아. 그래?”
“예.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반응이 좋아서...아마 저희가 추가로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북미왕국의 제안에 따라 조선은 해삼반도 뿐만 아니라 만주 동부 지역에 거점을 여럿 건설하고, 이곳에 이주민들을 정착시킬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해서 이주민이 늘어나 원상이나 조선에서 예상한 수보다 많아 추가로 물자와 인력을 배정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휴. 이건 정말 사서 고생하는 격인데...”
이에 조용한 곰도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몇 년만 고생하면 될 테니...그 때를 믿고 버텨야지요.”
반쯤 포기한 듯한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만주 동부 지역을 돕는 문제는 외무청에 일임할 테니 자네가 잘 처리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우리가 조선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분명 연합은 알 걸세. 그치?”
정성국이 갑자기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일을 꺼내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음...아무래도 그렇지요. 알바진 인근에 사는 원주민도 그렇고 아무르 강 유역에 사는 원주민들은 사냥감을 쫓아 걸핏하면 강을 넘어 만주 동부 지역을 돌아다니곤 하니까요.”
“그러면 연합은...조금 서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아니면 연합에 속한 원주민들이 여러 혜택을 노리고 조선 측에 붙어버릴 수도 있고. 그럼 좀 곤란할 것 같은데?”
정성국의 지적은 일리가 있었기에 조용한 곰은 신음을 흘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확실히 그렇겠군요. 알겠습니다. 허면 아무르 강 유역에 사는 원주민들도 물자를 일부 지원해서 별다른 불만을 품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생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