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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662화 (662/850)

662화

북방영토, 정확히는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주하기로 마음먹은 오상문과 박강현은 곧바로 움직였다.

겨우내 주변을 정리하고 처분할 수 있는 것은 다 처분해 최대한 돈으로 바꾼 것이다.

그 후 입춘이 지나자 둘은 가족들과 함께 인근 포구로 이동해 원상의 배를 타고 개항장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잠시 머물다 개항장과 북방영토의 거점 중 하나인 해삼위를 오가는 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하루 뒤, 슬슬 해삼위에 도착할 때가 되었기에 오상문과 박강현은 슬쩍 갑판 위로 나왔고.

갑판으로 나오자마자 맞닥뜨린 찬바람에 오상문은 몸을 부르르 떨다 조금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휴. 이거 북쪽이라 그런가? 확실히 춥긴 추운데?”

이런 오상문의 말에 박강현이 몸을 움츠리며 동의했다.

“그러게 말이여. 이거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는 있으려나? 이미 경칩이 지난 지도 꽤 되었는데 이런 날씨라니...”

24절기 가운데 경칩은 만물이 약동하며 새로운 생명이 생기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땅속에서 깨어난다는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본격적으로 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날이나 마찬가지였다.

헌데 경칩이 지난 지도 며칠이 흘렀는데 갑판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싸늘함을 넘어 추울 정도라 북방영토가 춥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던 박강현은 조금 당혹한 얼굴로 앞으로의 농사일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그런 박강현의 고민에 오상문은 어느덧 찬바람에 익숙해졌는지 잔뜩 움츠러든 몸을 당당히 펴며 대답했다.

“뭐 예상은 하지 않았나. 사실상 벼를 재배하긴 어려울 테고...그나마 추위에 강한 콩, 조, 밀 정도를 재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조선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작물은 결국 벼다.

조선인들은 잡곡보단 쌀을 선호했고, 그러니 작물 중에선 쌀을 수확할 수 있는 벼가 최고였고.

하지만 경칩이 지났는데도 솜옷이 없으면 못 버틸 정도의 찬바람이 불어오는 북방영토라면, 벼농사는 꿈도 꾸지 않는 것이 나아 보여 오상문이 이렇게 이야기하자 박강현이 그의 말에 수긍하며 중얼거렸다.

“역시 그런가? 그럼 역시 밀을 재배하는 게 그나마 나으려나...”

콩이나 조보단 밀이 보관도 쉽고 그나마 다른 작물보다야 먹기 편한 탓에 박강현이 밀농사에 관심을 보이자 오상문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니면 첫해는 이것저것 다 심어봐도 괜찮지 않겠어?”

“음? 그건 또 그렇네. 어차피 나라에서 식량을 제공해주니까 크게 부담도 없고.”

농사를 망치면 당장 굶어 죽게 생겼기에 농민들은 보수적으로 작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들은 달랐다.

조선 조정에서 이들이 제대로 정착할 때까지는 식량과 생필품을 넘겨주기로 했으니 한두 해 농사를 망친다고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 기회에 최대한 많은 작물을 심고 여러 경험을 쌓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어 오상문이 이렇게 이야기하자 박강현이 수긍했다.

그리고 이런 박강현의 반응에 오상문이 주변을 둘러보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그리고 어제 개항장에서 얼핏 들었는데, 북미왕국에서도 사람을 보내 농민들을 도울 거라던데?”

“북미왕국에서 우릴 돕는다고? 설마 경운차를 이용해 우릴 도와주는 건가?!”

박강현은 오상문의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북미왕국의 농부들이 대부분 경운차를 보유하고 이 경운차 덕분에 편하게 농사일을 할 수도 있고, 혼자서도 엄청난 크기의 면적을 관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야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해서 박강현은 오상문의 이야기에 지레짐작하며 기대하자 오상문은 웃으며 두 손을 내저었다.

“에이. 그건 아니고. 북미왕국의 관청 가운데는 농업을 연구하는 관청도 있대. 그 관청의 관리가 직접 나와 도움을 준다던데?”

“음...그게 효과가 있을까? 관리하고 해봐야...”

박강현은 오상문의 이야기를 듣고 관리가 농사일을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느냐는 말을 흐리자 오상문이 피식 웃으며 박강현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정정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니지. 생각해봐. 북미왕국은 무척 넓잖아? 거기에 아이누 섬이며, 저 카무이 반도며 다 만주보다 북쪽에 있고. 그럼...”

“아! 이런 쌀쌀한 기후에도 익숙하겠구나? 그러니 어떤 작물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도 이야기해줄 수 있을 테고?”

“그렇지. 그리고 내가 듣기로 북미왕국에서 농사를 짓는 이들은 그 농업 연구소라는 관청의 관리들이 해주는 조언은 무조건 따른다더라. 그들의 말을 따르면 흉작은 피할 수 있다면서.”

이러한 오상문의 설명에 박강현은 무척 놀랍다는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허. 그런 얘기는 또 어디서 들었어?”

“어디서 듣긴. 개항장을 구경하다 들었지.”

이에 박강현은 완전히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상의 배를 타고 개항장에 도착한 후, 해삼위와 개항장을 오가는 배를 기다리기 위해 개항장에서 잠시 머물렀을 당시, 오상문은 복구공사가 한창이라 무척 북적거리고 활기가 넘치는 개항장을 구경해보고 싶다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떠올렸기에.

그런 만큼, 오상문의 이야기가 단순한 헛소리는 아닌 것 같아 박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땅을 배정받으면 바로 그 농업 연구소 관리들의 조언이나 한번 들어봐야겠네. 근데 관리들을 만나기가 쉬우려나?”

박강현의 중얼거림을 들은 오상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마.”

“음?”

“나라에서 우리가 먹을 식량과 더불어 종자도 나눠주기로 했잖아? 그걸 나눠주는 게 농업 연구소의 관리들이래. 그러니 그때 이런저런 조언을 들으면 되지.”

“오오. 그거 다행이네.”

“그치?”

비교적 수월하게 농업 연구소의 관리들을 만나 농사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 박강현이 안도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옆에 있는 오상문에게 말했다.

“야! 저기 봐!”

그런 박강현의 반응에 오상문은 무슨 일인가 싶어 박강현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자그마한 항구 마을이 보였기에 오상문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기쁜 표정으로 항구 마을을 관찰하다가 감탄했다.

“이야. 저기 생각보다 북적이는 데?”

“그러네. 우리보다 먼저 정착한 이들이 생각보다 많은 모양인데? 그리고 난 허허벌판일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건물이 좀 있네?”

조선이 북방영토를 획득한 것은 작년이었고, 본격적으로 이주민들을 북방영토로 이주시킨 것은 올해였기에 박강현은 목적지인 해삼위가 텅 비어있을거라고 생각했다.

헌데 벌써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었기에 놀란 표정을 짓자 오상문이 해삼위를 한참동안 관찰하다가 대꾸했다.

“음...보아하니 북미왕국에서 도와주는 모양인데? 저 건물들은 개항장에서 본 것과 같잖아?”

“확실히...”

그의 말마따나 지금 저 해삼위에 짓고 있는 건물들은 조선 양식에 따라 지어진 건물이라기보다는 개항장의 느낌이 많이 나는 터라 박강현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 오상문이 손을 들어 다른 곳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길 봐.”

오상문이 가리킨 방향을 확인한 박강현은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커다란 공터에 배의 뼈대가 보였기에.

그리고 주변에 사람이 꽤 많고 분주한 것으로 보면 배를 만드는 것 같았기에 박강현이 물었다.

“어? 저건...배잖아? 그럼 저긴 조선소야?”

“그래. 저 해삼 반도와 인근엔 거목들이 많대. 그래서 저곳에 조선소를 건설하고 커다란 배를 만들어낸다고 하더라고. 우리가 탔던 원상의 배를 말이야.”

“아...그 커다란 배를?”

물론 원상의 배는 옛 인급 함선들이니 지금 이들이 타고 있는 북미왕국의 배보다야 작지만, 조운선들보다야 컸기에 매번 조운선만 봐왔던 박강현은 무척 놀랐었다.

헌데 그런 배를 여기서 건조한다고 하니 박강현은 내심 기대되면서도, 과연 그게 가능할까 하는 얼굴을 하자 오상문은 이 일도 개항장에서 들었는지 곧바로 이야기했다.

“그래. 그래서 딱히 농사를 짓지 않아도 일자리는 넘쳐나고 덕분에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거라고 하더라.”

배를 건조하는 데는, 그것도 여러 배를 동시에 건조하려면 그만큼 많은 인력이 필요했고, 여기에 북방영토의 경우는 워낙 지을 건물들이 많아 언제나 사람이 부족한 만큼, 오상문의 이야기대로 딱히 농사를 짓지 않아도 일을 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박강현은 살짝 호기심을 가졌다.

“그래? 하지만 배를 만드는 일은 무척 고되지 않나? 거기에 삯도 얼마 못 받을 테고.”

커다란 배를 건조하는 데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고 이들에게 후하게 삯을 지급하면 그만큼 건조비는 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선주들은 항상 일꾼들에게 내어주는 삯을 후려친다는 것은 박강현도 알고 있었기에 묻자 오상문이 고개를 저었다.

“전혀. 물론 일이 고되긴 할 거야. 하지만 고된 만큼 제대로 삯을 지급할걸? 저 조선소는 나라에서 만든 게 아니라 원상에서 만든 거라고.”

조선은 이미 대부분의 상단에 대외무역을 허용했고, 그러자 다른 상단들은 원상처럼 커다란 범선을 건조하려 애를 썼지만, 그게 쉬울 리 없었다.

해서 다른 상단들은 원상에서 인급 함선을 건조해 판매해달라고 요청했었고, 이에 원상은 조선 조정과 협상해 산림 자원이 풍부한 만주 동부 지역에 커다란 조선소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날이 풀리고 바다가 녹자마자 즉각 해삼위로 사람을 보내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건조하기 시작했고 말이다.

“원상에서? 그럼 네 말마따나 고생한 만큼 대가는 받을 수 있겠네?”

원상이 소속 상단원들에게 후하게 삯을 준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박강현이 중얼거리자 오상문이 대꾸했다.

“그럼. 그러니 농사를 계속 망쳐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야.”

그리고 이런 오상문의 대답에 박강현은 내심 안도할 수 있었다.

밭을 일구는 일 말고도 다른 일을 해서 먹고살 수 있는 길이 존재하니 말이다.

그때 오상문이 점차 가까워지는 해삼위를 보고 몸을 돌렸다.

“자. 슬슬 도착할 것 같은데 일단 하선할 준비부터 하자고. 잘못하면 고생 좀 할 테니까.”

“아. 그러자.”

* * *

“이...이게 정말 제 땅이 되는 겁니까?”

이 드넓은 땅이 자신의 땅이라는 사실에 오상문이 입을 크게 벌리며 주변을 살피다 관리에게 질문하자 관리는 이런 반응을 여러 번 경험했던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네. 저기 보이는 하얀 깃발들 안쪽의 땅이 다 자네 땅이 되는 거네. 그리고 저 하얀 깃발과 검은 깃발 사이의 땅은 자네의 땅이고. 좀 넓지?”

“예. 엄청 넓군요.”

“이 넓은 땅을 저와 가족들만으로 일구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아전의 말에 오상문과 박강현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에서 내어준 땅이 생각보다 넓은 탓이었다.

나라에서는 북방영토로 이주한 백성들에게 3결에 해당하는 땅을 내어줬는데, 조선의 토지 1결은 절대 면적이 아니라 곡식 1결, 즉 300두를 생산할 수 있는 면적을 의미했고, 북방영토의 경우 기후 때문에 가장 등급이 낮은 6등전으로 분류되다 보니 땅 크기가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그렇겠지. 뭐 우리가 이렇게 넓은 땅을 내어주는 것은 이 땅을 다 일구라는 의미가 아닐세.”

“그럼...”

“이곳에다 자네들이 살 집도 짓고, 텃밭도 일구고, 축사도 지으라는 거지.”

“아...”

관리의 말마따나 앞으로는 이곳에서 살아야 하니 집도 짓고 채소 등을 기를 텃밭도 일궈야 했고, 가축을 기를 축사도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박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상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땅이 많이 남을 것 같은데...”

“남은 땅은 그냥 놀리게. 다음 해엔 남은 땅을 사용하고.”

그 말에 오상문이 눈을 빛냈다.

“아. 땅을 나눠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라는 뜻이로군요?”

“그렇지. 그리고 자네도 알겠지만, 이 땅들은 북미왕국의 경운차로 한번 뒤집어엎은 땅일세. 그리고 날이 풀리면 경운차를 이용해 다시 갈아엎어 줄 테고. 그러니 자네들은 파종만 하면 그만일세.”

“오오...”

박강현이 관리의 말에 탄성을 질렀을 때, 오상문이 입을 열었다.

“그럼 당분간은 저희가 살 집을 건설하는 것에 집중해야겠군요.”

“그렇지. 언제까지 천막생활만 할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 빨리 머물 집부터 짓도록 하게. 필요한 도구와 자재들은 아까 오면서 봤던 창고에 있으니까. 그리고 대목수들도 일부 있으니 집을 짓는 것이 자신 없으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나으리.”

오상문과 박강현이 관리에게 머리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하자 관리는 되었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됐네. 정 고맙다면 부디 잘 정착해 나중에 제대로 세금을 내도록 하게.”

“물론입니다. 나으리.”

“꼭 그리하겠습니다. 나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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