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7화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급히 알현을 청한 총신인 콜베르를 접견실로 불러들였고, 콜베르는 접견실에 들어와 루이 14세에게 인사한 후 곧바로 자신이 방문한 용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뭐? 중재? 잉글랜드가 나서서 우리 프랑스와 반프랑스 동맹 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겠다?”
오스만 제국이 신성로마제국에 선전포고하고 빈을 점령하기 위해 움직이면서 이번 전쟁은 자신들의 승리로 끝나가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수도가 위협받았기에 프랑스의 패권 장악을 저지하는 것보다 수도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고, 덴마크는 스웨덴이 붙잡고 있었으며, 에스파냐와 네덜란드는 프랑스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제 달콤한 과실을 취하기만 하면 그만인데, 이런 상황에서 잉글랜드가 나서서 이를 막겠다고 하니 루이 14세의 얼굴이 결코 좋을 수는 없었다.
물론 지금 잉글랜드의 중재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충분히 이득이기는 하지만, 루이 14세는 달콤한 과실의 일부가 아니라 과실 전체를 원했기에.
해서 루이 14세는 콜베르의 이야기에 인상을 찌푸리자 콜베르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 잉글랜드 대사는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유럽이 분열되었고, 이를 틈타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노리는 현 상황을 기독교 국가로서 결코 좌시할 수 없다며 저희와 반프랑스 동맹 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겠다고 제의했습니다만...”
루이 14세는 피식 웃으며 콜베르의 말을 끊었다.
“실제로는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둬 유럽 전체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막겠다는 속셈이겠지.”
“그렇습니다. 또한, 저희가 네덜란드를 점령하면, 그동안 네덜란드가 장악하고 있던 해양 패권은 자연스레 저희 프랑스로 넘어오게 되는데 그동안 이 해양 패권을 노려왔던 잉글랜드는 이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을 겁니다.”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내길 원했고, 오스만 제국이 유럽으로 세력을 넓히는 것을 결코 두고 볼 수 없는 교황청은 신성로마제국을 도와 프랑스를 압박하고 있었다.
물론 루이 14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런 압박을 무시하고 신성로마제국과의 전쟁을 지속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프랑스의 목표는 네덜란드 지역, 정확히는 현 네덜란드와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의 점령해 유럽의 직물 산업을 장악하는 것이 목적인 만큼, 그리고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라 교황청과 첨예하게 대립해봐야 귀찮고 신경 쓸 것만 많아지는 만큼 교황청이 원하는 대로 신성로마제국과 종전 조약을 맺을 생각으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고.
이 소식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에스파냐나 덴마크도 현 상황을 우려했지만, 네덜란드는 그 수준을 넘어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현재도 겨우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신성로마제국이 잡아주고 있던 프랑스 병력이 추가되는 순간 더는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리고 네덜란드가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는 소식이 들려오자 잉글랜드 귀족들도 더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동안 잉글랜드는 네덜란드가 장악하고 있던 해양 패권을 가져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고, 그 때문에 3차례의 전쟁을 벌이기도 했었는데, 잘못하다간 이 해양 패권이 잉글랜드의 영원한 경쟁자인 프랑스에 넘어가 버릴 것처럼 보였기에.
특히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 대규모 함대를 조직하면서 이 해양 패권 경쟁에 뛰어들고 있었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프랑스는 네덜란드의 영토뿐만 아니라 에스파냐령 네덜란드도 이전부터 노리고 있었으니, 프랑스가 네덜란드 지역 전체를 점령해버리면 잉글랜드는 프랑스에 둘러싸이게 되는 셈이었다.
물론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는 바다라는 천혜의 장벽이 있기에 직접 국경을 맞대는 것은 아니지만, 잉글랜드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프랑스가 네덜란드 지역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것을 결코 용납해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비록 프랑스에 우호적인 찰스 2세였지만, 현재 프랑스의 확장이 위협적인 것은 사실이었기에 못 이기는 척 귀족들의 의견을 따랐다.
다만 찰스 2세는 잉글랜드가 적극적으로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한다고 해도, 현재의 분위기를 뒤집을 수 없다는 판단에, 먼저 북미왕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새한성에 머무는 잉글랜드 대사에게 연락을 보내 결국 북미왕국을 끌어들였고 말이다.
“흠. 뭐 잉글랜드가 우리가 네덜란드 지역 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원치 않고, 그래서 나선 것은 알겠는데...우리가 굳이 저들의 중재를 받아들여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그리고 콜베르의 이야기를 들은 루이 14세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중재하겠다고 나서는 국가가 강력하다면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잉글랜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루이 14세는 잉글랜드가 즉각적인 선전포고가 아니라 이렇게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선 것으로 잉글랜드가 겁먹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저들의 제안을 무시한다고 해서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고.
이런 루이 14세의 말에 콜베르가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현재 잉글랜드는 대륙 파병군을 조직 중이라고 하더군요.”
“뭐? 대륙 파병군? 설마 우리가 잉글랜드의 제안을 거절하면 반프랑스 동맹을 돕겠다는 뜻인가?”
의외의 말에 루이 14세가 되묻자 콜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잉글랜드 대사는 대륙 파병군을 언급하며 저희가 이번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반프랑스 동맹을 돕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허. 이것 참 웃기는군. 유럽의 평화를 위한다면서 오히려 전쟁을 키우겠다고?”
루이 14세는 잉글랜드 대사의 선언에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리자 콜베르가 담담히 대꾸했다.
“뭐 유럽의 평화 따위야 어차피 그럴싸한 명분에 불과하니까요.”
이에 루이 14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헌데...이제와서 잉글랜드가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나? 잉글랜드의 육군은 보잘것없잖나. 이들이 신성로마제국의 빈자리를 채우진 못할 텐데?”
실제로 잉글랜드의 육군 규모는 신성로마제국보다 작았고, 2만 자루의 신식 소총을 보유한 신성로마제국에 비해 잉글랜드는 고작 1만 자루를 보유했다.
그러니 이들이 참전해봐야 대세에는 지장이 없으며, 이를 잉글랜드도 모르지 않을 텐데 덤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은 루이 14세였다.
이런 루이 14세의 의문에 콜베르가 어두운 안색으로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잉글랜드가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한다고 해도 지금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겠지요. 잉글랜드뿐만이라면 말입니다.”
“음? 그게 무슨 소린가.”
현 상황에서 잉글랜드를 제외하고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할만한 유럽 국가는 없었기에 루이 14세가 의아하다는 듯 콜베르를 바라보자 콜베르가 루이 14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잉글랜드 대사가 저를 찾아왔을 때, 동행한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북미왕국 대사이지요.”
“뭐?! 북미왕국 대사? 설마 북미왕국도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한다는 건 아니겠지?”
루이 14세는 콜베르가 북미왕국을 언급하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예전에 북미왕국에 호되게 당하기도 했고, 새한성에 머무는 프랑스 대사를 통해 더 많은 북미왕국의 정보를 접하면서 북미왕국의 국력이 프랑스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에.
해서 루이 14세가 급히 콜베르에게 질문을 던지자 콜베르가 답했다.
“일단 북미왕국 대사는 말을 최대한 아꼈습니다.”
“말을 아꼈다고? 그럼...”
“예. 북미왕국 대사는 잉글랜드 대사가 중재를 입에 올렸을 때, 북미왕국도 잉글랜드를 도와 유럽의 평화에 일조하겠다는 말만 했을 뿐. 잉글랜드처럼 저희가 중재를 거절한다고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진 않았습니다.”
“휴우...그나마 다행이군.”
루이 14세는 북미왕국이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새한성에 나가 있는 프랑스 대사가 보내오는 정기 보고서를 통해 총알을 비처럼 퍼붓는다는 기관총이나 두꺼운 강철로 만들어져 포탄에도 끄떡없어 보인다는 신형 전선 등을 생각하면, 북미왕국이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하는 순간 프랑스의 패배는 확실했으니까.
그리고 이런 루이 14세의 반응에 콜베르는 아직 안도해서는 안 된다는 듯 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북미왕국은 직접 이번 전쟁에 개입하지 않더라도 무기와 물자를 판매함으로써 지금의 흐름을 뒤바꿀 수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말에 루이 14세는 움찔하며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중재를 거절하는 순간 북미왕국이 반프랑스 동맹에 신식 소총을 대량으로 판매할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 물론 북미왕국의 신식 소총 생산량을 생각하면 단기간에 막대한 신식 소총을 넘겨주진 못하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적들은 신식 소총으로 무장해 더욱 강해진다는 소리군.”
프랑스도 북미왕국으로부터 신식 소총을 구매해 이를 사용했기에, 신실 소총이 얼마나 대단한 무기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반프랑스 동맹이 더 많은 신식 소총으로 무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는 식은땀이 흐를 수밖에 없었고.
그때 콜베르가 말했다.
“맞습니다. 그리고 신식 소총의 총알을 북미왕국이 공급하고 있으니, 어쩌면 저희가 가진 신식 소총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지요.”
“헉! 그...그건...”
물론 북미왕국은 신식 소총을 판매하면서 성실히 총알을 판매하겠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각국에서 신식 소총을 구매해 운용하기 시작하면서 총알의 소모량도 급격히 늘어났고, 이 때문에 현재는 원하는 수량을 확보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러니 북미왕국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를 빌미로 프랑스에 공급하는 총알의 양을 대폭 줄일 수 있다는 사실에 루이 14세는 가슴이 철렁했고.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은 같은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이 아니라면 솔직히 상대하기 어려웠기에.
해서 루이 14세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콜베르가 다시 말했다.
“또한, 북미왕국이 무기와 물자를 지원해준다면 반프랑스 동맹은 끝까지 버틸 겁니다. 그럼 문제가 커지겠지요.”
네덜란드는 몰라도 에스파냐나 덴마크, 잉글랜드는 지형을 이용해 끝까지 버틸 수 있었고, 북미왕국을 통해 더 많은 신식 소총을 공급받는다면, 그 이후엔 프랑스가 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루이 14세는 신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콜베르를 바라보았다.
“으음...그럼 자네는 저들의 중재 제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에 콜베르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네덜란드 지역을 완전히 점령해 저희 프랑스의 땅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무척 아쉽습니다만...현 상황에서 저들의 중재 제의를 거절하면 그 뒷일을 감당하긴 어렵습니다. 그러니 일단은 이 정도에 만족하고 반프랑스 동맹과 협상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잉글랜드, 북미왕국의 제의에 따라 반프랑스 동맹과 종전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는 콜베르의 의견에 루이 14세는 아쉬워하면서도 북미왕국이 끼어든 이상 방법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잉글랜드나 북미왕국의 행동을 보아하니 저들은 자신들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중재를 제의한 만큼 은연중에 자신들보단 반프랑스 동맹의 편을 들 것 같았고, 그러면 협상에서 불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루이 14세가 우려스럽다는 얼굴로 콜베르를 바라보았다.
“협상을 통해 이번 전쟁을 통해 우리가 확보한 영토를 모두 지킬 수 있을까? 그리고 덴마크가 스코네 지역을 스웨덴에 반환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겠나?”
이번 전쟁으로 프랑스가 획득한 영토는 꽤 많았고, 스코네 지역의 경우는 이번 전쟁을 시작한 원인이기에 프랑스로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해서 루이 14세가 이를 묻자 콜베르는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쉽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반프랑스 동맹을 압박해 최대한 저희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진행하겠습니다. 국왕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