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6화
정성국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다가 새김포에 원정 함대가 도착했다는 이야기에 바람을 쐴 겸 새김포로 향했다.
그리고 정성국이 새김포에 도착했을 때, 원정 함대에 소속된 병사들의 가족들이 선착장을 가득 메웠기에 정성국은 이를 미처 생각지 못한 것에 혀를 차며 함께 온 호위대원들이 선착장을 정리시킬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왕실기가 보이고 호위대원들이 선착장을 정리하자 백성들은 정성국이 원정 함대를 마중 나온 것을 눈치채고 환호성을 내기 시작했다.
이에 정성국은 배에서 내려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며 원정 함대의 선착장까지 이동했고, 그곳에는 김봉길이 정성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웬일이긴. 그동안 타지에서 고생한 원정 함대를 환영해주기 위해 나왔지.”
“하하하. 그러십니까?”
정성국은 거의 반년 만에 다시 보는 김봉길과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 급히 마련한 단상 위에 올라 원정 함대의 노고를 위로하고 추가적인 보상과 휴가를 약속해 원정 함대 소속 병사들과 선착장에 몰려와 있는 그 가족들의 환호를 받으며 김봉길의 기함인 1만 톤급 철선의 회의실로 이동했고.
“그동안 잘 지냈나?”
“하하하. 그럼요. 무척 잘 지냈습니다.”
김봉길이 활짝 웃으며 그렇게 대답하자 정성국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그런 것 같군. 안색이 환하네. 아주. 그렇게 해전을 치른 것이 좋던가?”
“하하하. 그러믄요. 뭐 야간 해전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긴 합니다만...”
김봉길은 이번 해전이 자신의 마지막 해전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런 김봉길을 보면서 정성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아. 들었네. 꽤 골치 아팠다면서?”
“예. 시야가 제한되고, 적은 아국을 공격하기보단 아국을 피해 움직이려고 하는 탓에 생각보다 많은 배를 놓쳤으니까요.”
“흠...더 강한 탐조등을 개발해야 하려나...아니면...”
정성국이 지금 기술로 레이더를 개발할 수 있을까, 없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김봉길이 입을 열었다.
“더 강한 탐조등이라...기왕 만드는 거 한 3, 4km까지 환하게 밝힐 수 있는 탐조등을 개발했으면 좋겠네요.”
이에 정성국은 굳이 지혜로운 나무를 쥐어짜기보다는 일단 더 강력한 탐조등을 개발하는 것으로 타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따로 연구청장에게 이야기해두지. 그보다 유구국은 어떻던가?”
정성국의 질문에 김봉길은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음...전하께서도 예전에 유구국을 방문하셨던 적이 있는데 기억나십니까?”
“하하하. 물론이지. 처음으로 북미 대륙을 탐험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렀지 않나.”
아련한 눈빛으로 벌써 20년도 더 된 이야기를 꺼내는 김봉길을 보고 정성국은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하자, 김봉길이 빙긋 웃었다.
“역시 기억하시는군요. 그럼 그때 나하 항의 분위기가 다른 항구들에 비해 무척 침체해 있다는 것은 기억나십니까?”
그 말에 정성국은 웃음을 멈추고 잠깐 기억을 되짚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나하 항은 무척 침체해 있었고, 선착장에도 작은 어선 몇 대 정도 있었던 것이 다였으니까.
“음...기억나네. 아마 중개 무역이 쇠퇴하고 왜인들이 나하 항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
“예. 맞습니다. 그랬지요. 그리고 그때로부터 20년 가까이 흘렀습니다만...전혀 변화가 없더군요.”
“으음...그래?”
정성국이 김봉길의 말에서 유구국의 상황을 대충 짐작하고 인상을 찌푸리자 김봉길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예. 그래서 처음 유구국을 방문했을 때는 무척 놀랐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전혀 변한 것이 없었으니까요. 해서 씁쓸하기도 하더군요. 특히 아국과 비교해보니...”
그러면서 김봉길이 말을 흐리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아국이야 한창 발전 중이라 유구국과는 비교하기 어렵지. 솔직히 예전 조선도 정적이었잖나. 변화와는 거리가 좀 있었지.”
그 말에 잠깐 멈칫했던 김봉길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긴 하군요. 아무튼, 유구국 전체의 분위기가 무척 침체되어 있어 과연 유구국이 발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는데...왜인들을 모조리 추방하고, 돈을 풀기 시작하니 최소한 나하 항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어 가더군요.”
“호오. 그래?”
“예. 그리고 다시 나하 항에 활기가 돌기 시작하자, 이 활기가 유구국 전체로 퍼져나가더군요. 덕분에 저희가 유구국을 떠날 때쯤에는 유구국의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유구국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김봉길을 통해 유구국의 현지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해 정성국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쯤, 김봉길이 깜박했다는 듯 말했다.
“아. 그리고 유구국 왕실에서 왕실 인사를 북미왕국에 보내고 싶어하더군요.”
“왕실 인사?”
“예. 솔직히 말씀드리면 유구국 국왕이 직접 북미왕국을 방문해보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만...아무리 작은 나라라 하더라도 나라를 비우고 멀리 떨어진 아국을 방문하긴 어렵잖습니까. 해서 차선으로 왕실 인사를 아국으로 보내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더군요.”
사츠마 번과의 평화 협상이 끝나자 유구국 국왕인 쇼테이 왕은 더는 사츠마 번을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에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자신과 유구국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원정 함대의 사령관인 김봉길과 여러 번 궁으로 초대해 대화를 나누며 북미왕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김봉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북미왕국은 마치 별천지와 같았기에 북미왕국에 방문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다만 아무리 작은 나라라도 왕이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을뿐더러, 예전에 사츠마 번이 막부에 입조하라면서 강제로 유구국 국왕을 끌고 간 적이 있었기에 쇼테이 왕이 북미왕국을 방문하긴 어려웠다.
해서 차선으로 방계 왕족을 북미왕국으로 보내 북미왕국과의 우호 관계를 다지고, 무언가라도 배워왔으면 하는 마음에 김봉길에게 이를 이야기했었고.
해서 김봉길이 정성국에게 이를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확인차 물었다.
“음...설마 국혼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덴마크에서도 국혼을 노렸고, 다른 왕실에서도 자신이나 자식들을 노리고 있었기에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며 묻자 김봉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유구국 왕실이야 북미왕국 왕실과 혼인으로 맺어지면 좋긴 하겠지만...워낙 양국의 차이가 큰 터라 그 부분은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더군요. 특히 저희는 공녀를 받지도 않다 보니까요.”
“그럼...”
“예. 볼모에 가까울 겁니다.”
김봉길의 대답에 정성국은 난처하다는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아. 그래? 흠...굳이 볼모는 필요 없는데...”
“그렇다고 이를 마다하면 오히려 유구국에서 불안해할 테니 그냥 받아들이시지요.”
“쯧. 그렇겠지. 그럼 외국인 학교에 넣어 잘 가르쳐 돌려보내면 되겠군.”
“예. 그게 나을 듯싶습니다.”
외국인 학교는 각 부족의 후계자들에게 여러 학문을 가르치고 있었으니, 이곳에 보내 제대로 가르쳐 돌려보낸다면 유구국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 김봉길이 정성국의 의견에 동의했고.
“그리고 사츠마 번은?”
이에 김봉길은 씩 웃으며 답했다.
“아마 10년은 고생해야 할 겁니다. 인명 피해도 꽤 크고, 전쟁 배상금과 포로들의 몸값으로 그동안 모아두었던 재물을 상당수 소비해야 했을뿐더러, 유구국와 아마미 군도를 잃어버림에 따라 수입의 3할이 영구히 사라진 셈이니까요.”
“3할? 그 정도였어?”
유구국을 점령해 얻은 여러 수입을 챙기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수입의 3할에 달할 줄은 몰랐기에 정성국이 놀라자 김봉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아보니 그쯤 되더군요. 그러니 당분간은 꽤 휘청이겠지요. 뭐 자업자득입니다만...”
“그건 그렇지. 헌데 사츠마 번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후예들은 어떻게 되었나?”
정성국은 전쟁 배상금으로 왜란 당시 왜국으로 끌려갔던 조선인들, 정확히는 그들의 후손을 원했고, 사츠마 번은 마다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이를 승낙했다.
해서 정성국이 이에 관해 묻자 김봉길이 계속된 이야기에 목이 타는지 물을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인 후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왜국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대부분 따로 조선인 마을을 만들어 살고 있더군요. 해서 원정 함대의 사관 일부가 사츠마 번의 안내를 받아 이 조선인 마을을 방문했고,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원한다면 고향이나, 혹은 아국으로 이주할 수 있다고요. 물론 원한다면 지금처럼 왜국에 남아 있어도 되고. 그러자 처음엔 조금 당황하더군요. 사츠마 번에 의해 강제로 정착해야 했던 조선인들은 대부분 기술자라 조선인 마을을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렇겠지. 해서?”
“해서 조선인 마을을 방문한 사관들이 열심히 설명했고...덕분에 조선인 마을에 사는 조선인 후예 중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이주를 결정했습니다.”
김봉길의 이야기에 정성국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들이 비록 조선인들의 후예라 하더라도 사츠마 번에서 태어났고, 사츠마 번에서 살고 있었으며, 기술이 있는 이상 사츠마 번에서도 적당히 대우는 해줬을 테니 태반은 남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어? 그래? 얼마나 되는데?”
“3개의 마을을 합치니 대략 900명에 가까웠고, 이중 대략 700명 가까이 되는 조선인들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길 원했습니다.”
김봉길의 대답에 정성국은 당황했다.
물론 사츠마 번에 있는 조선인 후예들을 무조건 조선으로 돌려보낼 생각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들은 사츠마 번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후예이지 당사자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꼭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집념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막연한 동경이나 향수가 있을 거라 여겼는데 조선으로 이주하는 대신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길 원한다고 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서 정성국은 급히 질문을 던졌다.
“뭐야. 왜 죄다 북미왕국으로 이주해? 조선으로 이주하려는 사람은 없어?”
이에 김봉길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생각해보시지요. 할아버지, 부모를 통해 조선을 들었을 이들이 과연 조선으로 돌아가려 하겠습니까?”
“아...”
지금이야 조선이 개혁을 시작하면서 기술자를 우대하는 풍토가 생겼지만, 왜란 시절은 달랐다.
제대로 대우도 받지 못했고 덕분에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웠고.
그러니 아무리 조선이 자신의 뿌리라 한들 이주하길 꺼릴 수밖에 없을 것이 분명했다.
여기에 원정 함대의 사관들이 직접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면 어떠한 혜택이 있는지를 설명하고, 조선인들도 북미왕국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을 들었으니 대다수 조선인들은 북미왕국으로의 이주를 결정했을 것이 뻔했고.
해서 정성국이 납득한 얼굴을 하자 김봉길이 말했다.
“해서 이들을 임시로 유구국으로 데려왔고, 일단 아이누 섬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니 북방 항로가 열린다면 곧 본토로 오겠지요.”
원정 함대는 북미왕국의 해군력을 과시하기 위해 남방 항로로, 그것도 마리아나 제도와 하와이를 거치는 항로가 아니라 필리핀 북부, 호주 연합을 거쳐 귀환하는 항로를 이용했기에 이번에 확보한 조선인들과는 함께 이동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아는 정성국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럼 행정청에 미리 말해둬야겠군.”
“대신 전쟁 배상금과 시마즈 가문이 보유하고 있던 여러 미술품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니 직접 확인해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정성국이 미술품 감상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김봉길이 히죽 웃으며 그렇게 제의하자 정성국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하하. 그래? 그럼 어디 구경이나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