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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655화 (655/850)

655화

새한성에 있는 에스파냐 대사관의 응접실에서 에스파냐 대사, 덴마크 대사, 네덜란드 대사는 커피가 식는데도 불구하고 커피잔엔 손도 대지 않고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하아...결국...”

“이거 정말 곤란하군요. 이러면 신성로마제국은...”

“예. 프랑스와의 국경에 배치된 병력을 뺄 수밖에 없겠지요.”

오스만 제국은 몇 달 전 헝가리 방면에 병력을 이동시키며 긴장감을 조성했고.

프랑스와 스웨덴을 제외한 유럽 각국은 이러한 오스만 제국의 움직임을 걱정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헌데 예상외로 병력 이동이 끝난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기에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생각하기보단 프랑스의 부탁을 받고 신성로마제국을 압박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었고.

오스만 제국의 병력이 헝가리 지역에서 머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러한 의견은 공감을 얻었고, 신성로마제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헌데 오스만 제국이 갑자기 신성로마제국에 선전포고하며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빈을 목표로 진군하기 시작하자 안도하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은 뒤집어졌고,

이 소식을 접한 에스파냐 대사는 즉각 반프랑스 동맹의 대사들을 불러 본국을 도울 방법은 없는지를 논의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의 병력이 빈 인근에 도착해 빈을 포위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에스파냐 대사의 초청을 받아 응접실에 와 있던 다른 대사들은 앞으로의 일이 막막해 한숨만 내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네덜란드 대사는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와의 국경에 배치된 병력을 뺄 거라는 에스파냐 대사의 말에 잔뜩 굳은 얼굴로 반문했다.

“하지만...그걸 프랑스가 그냥 두고 보겠습니까? 생각보다 위험할 텐데요?”

네덜란드 대사는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 국경에 배치된 병력을 빼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에스파냐 대사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방면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면서, 교황청에서 유럽 내의 전쟁을 멈추고, 이교도의 침공을 막는 데 힘써야 한다고 떠들고 있으니, 아무리 무서울 것이 없는 루이 14세라 하더라도 철수하는 신성로마제국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진 못할 겁니다.”

“그야...그렇겠군요.”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방면에 병력을 이동시키면서 교황청은 계속해서 유럽이 분열한다면 오스만 제국의 진격을 막지 못할 거라면서 유럽의 통합을 외치고 있었고, 대프랑스 전쟁을 멈추기 위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물론 가톨릭 국가임에도 프랑스의 이익을 무엇보다 우선시했던 루이 14세는 이런 중재 재의를 들은 체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만 루이 14세가 의도적으로 교황청을 무시한다 하더라도 교황청이 오스만 제국을 막아야 한다고 유럽의 결집을 외치고 있는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을 막기 위해 병력을 이동시키는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하는 것은 부담이 컸고, 당연히 루이 14세는 이러한 선택을 내리진 않을 거라는 에스파냐 대사의 이야기에 네덜란드 대사도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이를 침통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덴마크 대사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건 더 안 좋은 소식 아닙니까. 신성로마제국을 상대하던 프랑스군이 즉각 네덜란드 지역으로 올라올 텐데요.”

“후우...”

덴마크 대사의 말마따나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을 막느라 신성로마제국이 정신없는 틈을 타 네덜란드 지역을 먹어치우려 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리고 이를 막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아는 에스파냐 대사와 네덜란드 대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고.

그때 노크와 함께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잉글랜드 대사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아.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잉글랜드는 반프랑스 동맹에 속하진 않았지만, 잉글랜드를 반프랑스 동맹에 끌어들이기 위해 이전부터 새한성에 있던 대사들은 노력해왔고, 프랑스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불안감을 느끼던 잉글랜드 대사는 종종 이들과 어울렸었기에 이런 모임에도 초대받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잉글랜드 대사가 응접실에 들어오자 다른 대사들은 반색하며 그를 환영했다.

“오오. 오셨습니까.”

“잘 오셨습니다. 여기 앉으시지요.”

잉글랜드 대사는 자리에 앉아 에스파냐 대사가 건네주는 커피잔을 받아들고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방금 막 본국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말에 다른 대사들은 눈을 빛냈다.

이들도 잉글랜드 내부의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고, 현재 잉글랜드는 국왕인 찰스 2세를 제외하면 영원한 경쟁자라 할 수 있는 프랑스의 비상을 배 아파하는 이들이 대다수고, 오스만 제국이 신성로마제국에 선전포고하며 반프랑스 동맹이 흔들리고 네덜란드 지역이 프랑스에 넘어갈 것처럼 보이자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기에.

“결정을 내린 겁니까?”

대사들의 물음에 잉글랜드 대사는 잠깐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프랑스와 우호 관계이긴 하지만, 네덜란드와도 우호 관계라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멸망시키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잉글랜드 대사의 답변에 다른 대사들은 탄성을 질렀다.

솔직히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사이는 빈말로도 좋다고 하긴 힘든데, 이런 네덜란드를 우호 관계라고 이야기하면서까지 개입하려 하는 것은 더는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았기에.

“오오! 그러면...!”

“다만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해 바로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하기보다는 일단 대화를 해볼 생각이라더군요.”

잉글랜드 대사의 말에 반색하던 다른 대사들은 순간 움찔했다.

“대화? 허면 잉글랜드가 중간에서 중재하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저희가 참전한다고 이번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신성로마제국은 이미 반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했다고 봐도 될 텐데 이런 상황에서 저희가 반프랑스 동맹에 들어가 봐야 신성로마제국의 빈자리를 채우는 수준에 불과하잖습니까.”

그러니 반프랑스 동맹에 들어가 프랑스와 싸우기보다는, 바깥에서 프랑스와 반프랑스 동맹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에 덴마크 대사가 미묘한 얼굴로 슬쩍 옆에 있는 네덜란드 대사를 바라보고 말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잉글랜드의 중재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이 기세로 네덜란드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면 막대한 이득을 얻을 텐데요?”

그 말에 에스파냐 대사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대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스는 네덜란드 지역을 완전히 장악해 막대한 이득을 얻기 위해 교황청의 중재 제의마저 무시하고 있었는데, 잉글랜드가 나선다고 과연 받아들이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오히려 대사들은 잉글랜드가 프랑스와 반프랑스 동맹 사이를 중재한다는 구실로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하는 것을 미루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기도 했고.

그런 대사들의 반응에 잉글랜드 대사가 슬쩍 미소지으며 말했다.

“압니다. 아국만으로 프랑스를 설득하긴 어렵다는 것을. 해서 북미왕국도 끌어들일 생각이고요.”

이에 대사들의 안색이 바뀌었다.

“예?”

“북미왕국을요?”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대 프랑스 전쟁이 프랑스에 우세해지면서, 대사들은 북미왕국을 끌어들여야겠다는 생각에 여러 조건을 내걸며 북미왕국을 유혹했지만, 북미왕국은 유럽 문제에 크게 관여하고 싶지 않아 했었다.

헌데 잉글랜드 대사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북미왕국을 끌어들여 함께 중재에 나서겠다고 하니 그게 가능할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물론 다들 아시는 것처럼 북미왕국은 유럽 문제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 전역이 프랑스의 영향력으로 뒤덮이는 것은 북미왕국도 내심 껄끄러울 겁니다. 그러니 유럽의 평화를 위해 우리 잉글랜드와 함께 나서달라고 설득한다면, 승산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요.”

이러한 잉글랜드 대사의 설명에 다른 대사들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으음...”

“뭐 한번 해볼 만은 하군요.”

“그리고 중재의 대가를 두둑하게 내어준다면, 북미왕국이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을 테고요.”

“흠. 그거 괜찮군요. 그럼 바로 조용한 곰을 만나러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 *

“유럽 대사들이 중재를 요청했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오스만 제국의 선전포고 때문에 급한 모양이군.”

“예. 신성로마제국이 이탈하는 순간 반프랑스 동맹은 와해되는 셈이니까요. 특히 네덜란드는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이니...”

“그야 그렇지. 아무튼, 잘됐네. 어떻게든 유럽 문제에 개입하긴 해야 했는데 저들이 먼저 요청한 셈이니.”

잉글랜드 대사의 추측처럼 북미왕국은 이대로 프랑스가 유럽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썩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해 유럽 문제에 개입할 뜻을 품고는 있었다.

다만 잘못하면 프랑스와, 이제 막 전쟁을 시작한 오스만 제국이 크게 반발할 수 있어 상황을 살피고 있었고.

헌데 잉글랜드 덕분에 일이 쉬워졌다.

굳이 북미왕국이 프랑스를 설득할 필요 없이 잉글랜드를 앞세우고 그 뒤에서 잉글랜드를 지원해주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리고 조용한 곰 역시 이런 정성국의 생각과 같았기에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지요. 특히 네덜란드 대사는 아국이 중재해서 프랑스와 네덜란드 간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면 후한 대가를 약속했습니다.”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후한 대가라...그럼 이 기회에 본격적으로 동남아에 진출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동남아 진출이요?”

조용한 곰이 뜬금없다는 얼굴로 정성국을 바라보자 정성국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네덜란드가 소유한 섬들의 일부를 할양받아 거점 항구를 만드는 거야.”

“음...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필리핀 북부에 아국의 영토가 존재하고, 또 남태평양 탐사대 덕분에 뉴기니 섬의 원주민들과 조금씩 교류하고 있으니 원주민들을 지원해 거점 항구를 만들고 저희가 이용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인도양에 진출하려면 중간에 보급 거점이 필요하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아국의 배들은 연료 보급이 필요하잖나.”

조용한 곰은 정성국이 인도양 진출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대체 그 먼 곳에 왜 진출하려 하는 것인가 싶기도 했고.

이런 조용한 곰의 의문 섞인 눈빛에 잠깐 고민하던 정성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돌돌 말려 있는 세계 지도를 가지고 와 티테이블에 펼쳐 손으로 인도를 짚으며 말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이 인도 대륙은 넓고, 청나라와 비견될 정도로 많은 인구가 살고 있네. 그 말은 나쁘지 않은 시장이라는 거고.”

“흐음...”

19세기에 비료가 도입되고 종자 개량을 통해 식량 생산량이 늘어 인구가 폭증하기 전까지 인도 대륙은 약 1억 명 내외의 인구수를 유지했다.

이러한 인구수는 청나라를 이어 세계에서 2위에 해당하며, 이렇게 많은 인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괜찮은 시장이란 소리였다.

특히 북미왕국처럼 독특하고 특별한 상품을 독점적으로 파는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기에 조용한 곰은 인도양으로의 진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때 정성국이 슬쩍 손을 옮겨 페르시아만을 짚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곳에는...석유가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되고.”

“예? 석유요?”

조용한 곰은 조금 뜬금없다는 얼굴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최근 석유의 소비량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석유야 북미왕국 땅에도 넘쳐나는 자원 아니던가.

지금이야 새나주에서만 석유를 채취하고 있지만, 개발청의 자원 탐색 부서에 소속된 관리와 장인들이 북미왕국을 돌아다니며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지역을 수도 없이 발견했다는 사실은 조용한 곰도 잘 알고 있었고.

그러니 석유가 부족하면 북미왕국 내에서 캐면 그만이지 뭐하러 이 먼 곳의 석유를 캐야 하나 싶은 것이다.

이러한 조용한 곰의 의문에 정성국이 말했다.

“점차 석유 소모량은 급증할 거야. 그리고 자원은 유한하고. 그러니 미리 최대한 많은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잖나.”

“으음...그거야 그렇지요.”

정성국의 말은 정론이었기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곳에서 석유를 채취할 필요가 있어. 그래야 아국의 배가 어디든 누빌 수 있을 테니까.”

“하긴...최근엔 석유만 사용하는 배가 꽤 늘었지요.”

“그래. 그러니 미리미리 준비하려고.”

“알겠습니다. 전하. 허면 인도양 진출도 염두에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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