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3화
정성국이 마차를 타고 연구청의 연구소 정문에 도착했을 때, 미리 연락을 받고 연구소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박기동이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스승을 보고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스승님.”
그리고 정성국은 그런 박기동을 보고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그래. 오랜만이다. 기동아.”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정성국도 그렇지만 다른 제자들도 워낙 바쁜 터라 최근에는 전화로만 안부를 주고받았기에 정성국은 조금 피곤한 기색은 보이지만, 얼굴색이 나쁘지 않은 박기동을 보고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별일은 없지?”
“예. 딱히 별일은 없지요. 여전히 각종 업무와 연구에 치여 살고...최근엔 스승님께서 다시 일거리를 떠넘기셔서 한숨을 내쉬는 정도?”
박기동은 정성국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면서 투덜거렸고, 이에 정성국은 움찔하며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크흠. 사탕무 수확 기계의 개발 때문에?”
“예. 뭐 땅속 작물을 온전히 수확하는 게 쉽지 않아서 말이죠.”
“흠. 그래?”
땅속에 묻혀 있는 작물을 캐내려면 땅을 헤집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작물의 손상이 커서 상품 가치가 떨어지기에 고민이라는 박기동의 이야기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떤 조언을 해야 하나 싶어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때, 박기동이 씩 웃으며 자신만만한 어조로 답했다.
“그래도 사탕무는 파손되어도 설탕을 추출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어서 조만간 사탕무 수확 기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그게 정말이냐?”
생각해보면 어차피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하려면 사탕무를 잘게 잘라야 하는 만큼, 땅을 헤집으면서 사탕무가 파손된다 해도 상품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기존에 개발했지만, 실패작으로 분류했던 수확 기계를 이용해도 충분하겠구나 싶어 정성국은 반색하며 이를 이야기하자 박기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다만 수확하자마자 바로 제당소로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잘게 부서질수록 사탕무의 진액이 흘러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잘게 부서도 좋을 것은 없어서 실패작을 그대로 사용하기보단 사탕무의 크기에 맞춰 새롭게 수확 기계를 만들 생각입니다.”
“아. 확실히 그러는 편이 효율적이겠네.”
“예. 듣자니 사탕무도 다른 작물들처럼 가을에 수확하는 것 같은데...그때쯤에는 새로 개발한 사탕무 수확 기계로 작물을 수확할 수 있을 겁니다.”
농업 연구소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확인한 정성국은 즉각 행정청장을 불러 논의했고, 시범적으로 누벨 프랑스 지역에서 사탕무를 대량으로 재배해보기로 했다.
여기에 북미왕국의 농부들은 농업 연구소를 무척 신뢰하고 있었기에 농업 연구소에서 나서서 사탕무 재배를 독려하고, 행정청에서 농사에 실패할 경우 보상을 해준다고 약속하자 누벨 프랑스 지역의 농부들은 너도나도 사탕무를 심겠다고 약속했고.
덕분에 시범적으로 재배하지만, 재배면적이 꽤 넓어서 이를 인력만으로 수확하려면 고생해야 했는데, 그때쯤 되면 사탕무 수확 기계를 이용해 빠르고 편하게 작물을 수확할 수 있을 거라 단언하니 정성국은 무척 만족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거 정말 다행이로구나.”
그 이후 정성국은 박기동과 각종 연구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의아하다는 얼굴로 박기동을 바라보았다.
“헌데 지금 어디로 가는 게냐? 네 연구실은 저기로 가야 하잖아? 이 방향은...”
“예. 뒤편의 시험장으로 가는 겁니다. 스승님께서 연구소를 방문하신 김에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박기동이 연구소 뒤편에 마련된 커다란 시험장을 언급하자 정성국은 눈을 빛냈다.
“시험장? 아. 전차의 시제품을 드디어 완성한 거냐?”
검차의 개량형인 전차의 시제품은 일정상 3개월 전에 완성되어야 했으나 중간에 일부 문제가 생겨 시제품 생산이 지체되었었다.
해서 정성국이 이를 언급하며 전차를 기대하자 박기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러 문제를 해결해 결국 전차의 시제품도 완성되었고...상용차의 시제품도 완성되었습니다.”
“아니. 잠깐만. 상용차? 상용차의 시제품이 벌써 나왔다고?”
정성국은 작년에 연구청에서 장갑차를 개발한 이후 이 정도의 기술력이라면 버스나 트럭도 만들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상용차를 개발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상용차의 개발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고작 1년도 안 되는 이 시점에서 벌써 상용차의 시제품이 나왔다는 사실에 정성국이 당황하며 박기동을 바라보다 박기동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뭐 구조 자체는 장갑차와 크게 다를 것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뒤늦게 파악했는데 동력 자전거를 연구하는 부서의 연구원 중 일부가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상용차를 개발하기 위해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동력 자전거의 개발 이후, 말 대신 동력 자전거가 마차와 수레 등을 끌기 시작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뒤에서 채찍으로 말을 조정하는 마부와는 달리 동력 자전거의 운전수는 직접 동력 자전거에 앉아 이를 운전해야 했고, 당연히 비가 내릴 때는 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바람을 해쳐가며 동력 자전거를 운전해야 했으니까.
물론 이를 고려해 동력 자전거를 최대한 마차에 붙이고 마차 앞쪽에 기다란 차양을 부착해 최대한 비를 피할 수 있게 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동력 자전거 운전수들의 고충을 알게 된 동력 자전거 연구원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박기동의 설명에 정성국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오호라. 궂은 날씨에 동력 자전거를 운전해야 하는 운전수를 돕기 위해 고민하다 자체적으로 상용차를 개발하려 했단 말이지?”
“뭐 처음부터 상용차를 개발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동력 자전거와 연결된 마차의 크기를 더욱 키우고 그 안에 동력 자전거를 장착하려 했다더군요. 뭐 그 정도만으로도 운전자는 비나 눈을 맞을 필요가 없으니 충분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해서 마차를 연구하는 장인들과 시제품을 만들고 몇 번 운용해보았는데 이때 방향이 조금 바뀌었답니다. 굳이 동력 자전거를 안에 넣어 공간을 차지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마차에 동력을 장착하고 이 동력을 바퀴와 연결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온 모양이에요.”
동력 자전거 연구원들과 마차를 만드는 장인들이 뭉쳐서 이런저런 연구를 하다 결국 상용차를 만들기로 했다는 사실에 정성국이 미소를 지었다.
“아하. 내가 이야기했던 상용차와 비슷하군.”
“그렇지요. 해서 방향을 바꿔 연구하던 중에 장갑차가 개발되었다는 것을 듣고 무언가 얻을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 장갑차 연구 자료의 공유를 요청했고, 덕분에 저도 이 친구들이 무슨 연구를 했었는지 알게 되었지요.”
연구청의 규모가 커지고, 부서가 세분화되면서 박기동도 연구원들의 개별적으로 무엇을 연구하는지를 모두 파악할 수는 없었기에 정성국은 박기동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이것이 비효율적으로 여겨졌기에 무언가 대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꾸했다.
“그래서?”
“그래서 이 친구들까지 상용차 연구 부서에 합류시켰고, 덕분에 상용차 개발에 가속이 붙었으며 이렇게 이른 시일 내에 시제품까지 나온 겁니다.”
“그래? 결과물이 궁금한데? 빨리 가자.”
박기동의 설명에 정성국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박기동을 재촉했고, 덕분에 빠르게 연구소를 지나 뒤쪽의 시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성국은 커다란 시험장을 움직이고 있는 전차와 상용차를 보고 나직한 감탄사를 흘렸다.
“오. 저거냐?”
“그렇습니다. 저게 이번에 개발한 전차와 상용차입니다.”
정성국은 먼저 왼편에서 우렁찬 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전차를 유심히 살피며 중얼거렸다.
“흐음. 검차보다는 확실히 크네.”
전체적인 생김새는 이전의 검차와 비슷했지만, 크기는 훨씬 컸기에 정성국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박기동이 답했다.
“예. 검차와는 달리 탑승 인원도 배로 늘었고, 여러 무기를 장착했으며, 더 많은 포탄과 총알을 적재해야 하다 보니 그만큼 덩치가 커졌습니다.”
기존의 검차에 탑재된 무기는 기관총에 불과했지만, 전차는 달랐다.
전차를 개발할 때, 장갑차도 함께 개발했기에 고작 방어력만 높여선 전차의 가치나 효용성이 떨어지지 않겠냐는 생각을 한 연구원들은 화력의 증대를 위해 전차에 이동형 60mm 화포와 기관총 2정을 장착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검차처럼 2명이 운용하는 것은 어려워 탑승 인원은 4명으로 늘렸고, 무기가 많아지다 보니 더 많은 포탄과 총알을 적재해야 하는 터라 전차의 크기가 검차보다 커졌다는 박기동의 설명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근데 처음 검차를 최대한 작게 만든 것은 피격면적을 줄이기 위해서였잖아? 헌데 저렇게 크기를 키운 것은 포탄 정도는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인가?”
“하하하. 그렇습니다. 외무청과 정보기관을 통해 파악한 다른 나라의 화포 정도는 충분히 방어할 수 있지요.”
박기동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만족한 정성국은 문득 박기동의 말이 걸려 다시 질문을 던졌다.
“오. 그건 정말 다행인데...다른 나라? 그럼 아국의 화포는 못 버티는 거야?”
이에 박기동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뭐 기존의 120mm 화포는 버팁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어렵지 않나 싶네요.”
“평화가 개발 중인 140mm 화포부터는 어렵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박기동의 대답에 정성국이 잠시 고민했지만, 유럽의 기술력을 생각하면 북미왕국의 120mm 화포 수준까지 도달하는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흠. 뭐 그 정도만 해도 나쁠 것은 없지. 그보다 속도와 항속거리는 장갑차와 비슷하고?”
“예. 검차와 마찬가지로 최고 시속은 35km에 항속거리는 150km 정도 됩니다. 그러니 함께 운용하기엔 최적이겠지요.”
박기동의 설명에 정성국이 만족한 얼굴로 다시 전차에 시선을 돌렸을 때, 전차가 갑자기 멈추었고.
‘펑!’
‘콰쾅!’
60mm 화포를 발사해 임시로 건설한 가건물을 박살 내는 모습을 보고 정성국이 탄성을 질렀다.
“오우. 끝내주는군. 헌데 역시 포격할 때는 멈춰야 하는 건가?”
“뭐 이동 중에도 포격할 수야 있습니다만 명중률이 문제라서요. 해서 일단 포격은 멈춘 후 하라고 지침을 내리긴 했습니다.”
“그래? 뭐 상관없겠지. 아무튼, 저 정도면 충분히 잘 만든 것 같네.”
“그럼...?”
정성국의 호평에 박기동과 주변의 연구원들이 정성국을 바라보았고, 정성국은 이를 눈치채고 피식 웃으며 저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래. 저것도 일단 20대 정도 양산해서 한 1년 정도 각지에서 굴려보고, 괜찮다 싶으면 본격적으로 양산하자.”
“하하하. 알겠습니다. 스승님.”
정성국의 명령에 박기동과 연구원들이 환호하고 있을 때, 정성국은 시선을 돌려 시험장 외곽을 빙빙 돌고 있는 상용차를 바라보다 슬쩍 손짓했고.
상용차를 운전하던 연구원이 정성국의 손짓을 확인하고 천천히 속도를 줄이다 정성국의 앞에 상용차를 멈추자 정성국은 눈앞의 상용차를 보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건...흠.”
외형은 전생의 미국 스쿨버스와 비슷했지만 크기는 그보단 훨씬 작아 거의 1.5톤 트럭보다 조금 큰 상용차를 보고 정성국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박기동이 옆에서 상용차의 제원을 읊었다.
“약 2톤에 달하는 화물을 싣거나, 20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상용차입니다.”
“2톤? 생각보다 괜찮네. 헌데 여기에 20명을 태운다고? 조금 좁지 않나?”
정성국이 슬쩍 상용차의 내부를 확인해보니, 텅 비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저 공간에 20명을 태우기엔 조금 좁지 않나 싶어 되묻자 박기동이 설명했다.
“4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5열로 배치하면 됩니다. 다만 그러려면 양옆으로 문을 여럿 달아야 하는 터라 생산 단가는 조금 오르겠지요.”
“아...”
확실히 그러면 겨우 태울 수는 있을 것 같았기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속도는?”
“최고시속은 60km 정도 나옵니다만 제대로 된 도로에서나 가능하고, 비포장도로에서는 시속 30km 이상은 어려울 겁니다.”
생각보다 상용차의 성능이 괜찮아 보였기에 정성국은 박기동의 대답에 흡족해하며 박기동을 바라보았다.
“이거 타봐도 되지?”
“어...의자가 없어서 조금 위험할 텐데요?”
이에 정성국은 상용차에 탑승해 내부를 둘러보고 중얼거렸다.
“아. 딱히 잡을 곳이 마땅히 없구나.”
“예. 뭐 이 의자를 잡는 것이 전부긴 한데 조금 위험하지요.”
박기동이 운전수가 앉는 의자를 가리켰는데 꽤 빈약해 보였기에 정성국이 묘하게 실망한 눈치이자 박기동이 쓰게 웃으며 그를 달랬다.
“며칠 후 이 상용차에 의자를 일부 장착해서 사람을 태우고 달려볼 생각인데 그때 타시지요.”
“끙...어쩔 수 없지. 알겠다.”
정성국은 박기동의 말에 아쉬움을 달래며 자그마한 상용차 안을 한두 번 둘러본 후 내리면서 박기동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잘 만들었네. 고생했다.”
“하하하. 그렇죠?”
“그럼 이것도 바로 20대 정도 양산해서 운용해보고, 별문제 없으면 대량생산하는 거로 하자. 다만 이건 단거리 수송을 책임질 중요한 운송수단이니만큼, 어마어마하게 생산해야 할 테고, 그만큼 거대한 공방이 필요할 테니 바로 공방부터 세워야겠다.”
정성국의 이야기에 박기동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력 자전거도 계속해서 공방을 확장하고 있지만, 그 수요가 감당이 안 되는 판국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미리 커다란 공방을, 그것도 몇 개씩 건설해두는 것이 낫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허면 바로 개발청과 논의해 공방을 건설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