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0화
날이 추워지고 칼날 같은 찬 바람이 쌩쌩 불기 시작하자 젊은 사내는 잔뜩 움츠러들면서도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고.
한참을 걸은 후 마을 외곽에 있는 허름한 초가집에 도착한 박강현은 즉각 소리쳤다.
“어이! 상문이! 게 있나?”
젊은 사내의 외침에 방문이 열리며 안에 있던 오상문이 젊은 사내의 얼굴을 보고 빙긋 웃으며 손짓했다.
“오. 박강현이. 추운데 어여 들어오게.”
이에 박강현은 짚신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갔고, 오상문은 박강현이 화로 주변에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박강현은 화로에 얼어붙은 손을 내밀며 그 열기에 미소지었고.
“아우. 살겠네. 오. 고구마도 있네?”
화로 주변에는 고구마가 구워지며 달콤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기에 박강현이 히죽거리자 오상문이 피식 웃으며 그가 오기 전까지 굽고 있던 고구마들을 만지면서 말했다.
“조금 출출하기도 하고 입이 영 심심해서 몇 개 가져왔지. 자.”
오상문이 굽고 있던 고구마 가운데 잘 익은 녀석 하나를 박강현에게 넘기자 박강현은 이를 받아들고 반으로 쪼갠 후 안쪽의 샛노란 고구마의 속살을 확인하고 활짝 웃었다.
“오. 잘 익었는데? 고마워.”
그러면서 박강현은 고구마를 빠르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고, 오상문은 그런 먹성 좋은 박강현을 보고 피식 웃으며 다른 고구마도 몇 개 박강현의 앞쪽에 가져다 두었고.
박강현은 그런 오상문의 배려에 고마워하며 다시 고구마를 하나 집어 반으로 쪼개면서 입을 열었다.
“참. 이번 주 세계신문 읽어 봤어?”
이에 오상문은 고개를 저었다.
이 충청도의 시골에서 세계신문을 구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물론 원상에서도, 그리고 보부상들도 세계신문을 팔긴 했지만, 그 수가 많진 않았기에 이곳까지 흘러들어오는 신문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기에 마을 외곽에 사는 오상문은 마을 사람들이 다 돌려보고 난 이후에나 읽거나, 혹은 이렇게 가끔 자신을 찾아오는 친구인 박강현을 통해 세계신문에 적힌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오상문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박강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음? 아니. 왜? 또 뭐 중요한 내용이라도 실려 있어?”
“그럼. 엄청 중요한 내용이 실려 있지.”
“뭔데?”
오상문은 박강현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박강현은 고구마를 먹다 말고 엉뚱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어휴. 이거 목이 좀 막히는데...?”
그런 박강현의 태도에 오상문은 짜증을 냈다.
박강현은 다 좋은데 세계신문에 실린 내용을 말해줄 때는 항상 저렇게 시간을 끌며 마실 것을 원하곤 했었으니까.
“에이. 잠깐만 기다려.”
오상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고.
잠시 후 커다란 그릇을 하나 들고 들어와 박강현에게 넘기자, 박강현은 이를 받아들고 꿀꺽꿀꺽 마신 후 탄성을 내질렀다.
“크으. 역시 탁주도 좋지만, 고구마엔 역시 동치미 국물이라니까?”
이런 박강현의 감탄에 오상문이 재촉했다.
“목도 축였으니 빨리 좀 말해봐. 대체 이번 주 세계신문에 무슨 기사가 실린 건데?”
“하하하. 알았어. 그러니까...자네도 알지? 되놈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서 저 북방에 거대한 땅을 획득한 것을?”
“그걸 모르는 조선 사람이 어디 있나.”
북미왕국은 애초부터 청나라로부터 획득한 영토를 직접 통치할 생각이 없었기에 조선에 청나라로부터 획득한 만주 동부 지역을 넘기겠다고 이야기했었고, 이에 조선은 북미왕국의 양해를 얻어 조청전쟁의 승리와 함께 청나라의 영토를 일부 획득했다고 알렸다.
즉 북미왕국이 땅을 넘겨준 것이 아니라 조청전쟁의 승리로 얻게 된 땅이고 알린 셈이다.
이에 승전의 기쁨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고.
물론 그 이후 조선과 북미왕국 간의 영토 할양 협상이 완전히 끝나고 조선이 아무르 강 이남 만주 동부 전체를 획득했다는 사실과 그 지도가 세계신문에 실리자 조선인들은 이번에 청나라로부터 획득한 영토가 조선보다 크다는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설마...?”
거대한 땅을 얻었으니, 당연히 대규모 사민 정책이 있을 거란 것쯤은 예상한 오상문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박강현을 바라보자 박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정에서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이 북방 영토를 개발할 생각이래. 해서 북방 영토에 정착할 백성들을 모집한다더군.”
북방 영토에 정착할 백성들을 모집한다고 하는 것을 보니 걱정과는 달리 강제로 백성들을 이주시키진 않을 것 같아 오상문은 안도하면서도 조금은 불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다행이네. 강제로 이주시키지 않아서. 근데 북방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없을 테니 어쩌면...”
지금이야 지원자를 받지만, 북방 영토로 이주하려는 백성이 없다면, 조정에서 강제로 이주시킬 가능성도 없진 않았기에 오상문이 불안해하자 박강현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오상문을 바라보았다.
“응?”
“아니. 그렇잖아? 누가 북방 영토로 이주하겠어? 그나마 가까운 함경도나 평안도도 추위 때문에 못 살겠다고 이주를 꺼리는 판국에 그보다 더 북쪽에 있는 북방 영토로의 이주? 이주해봐야 제대로 농사나 지을 수 있겠어?”
오상문의 말에 박강현은 들고 있던 고구마를 내려놓으며 반문했다.
“뭐 쌀농사는 어렵겠지만 잡곡은 가능하지 않을까?”
평안도나 함경도 같은 북쪽에서 아예 농사를 못 짓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쌀은 어렵지만 콩, 수수, 조 등의 잡곡은 어느 정도 재배할 수 있었고, 여기에 추위에 비교적 강한 감자까지 생각하면 먹고 사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지 않겠느냐는 박강현의 방문에 오상문은 수긍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바꾸진 않았다.
“흠. 뭐 그렇다 하더라도 북방 영토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다고 했는데 그런 땅을 개간하는 게 어디 쉽겠어? 거기에 농사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겨울엔 무척 추울 테니 제대로 된 집도 지어야 할 테고, 작게는 관청부터 크게는 만약을 대비한 목책이나 요새, 성 같은 방어시설을 축조해야 할 수도 있을 거란 말이야. 그럼 분명 고된 요역에 시달려야 할 테고. 그러니 누가 북방 영토로 이주하겠어. 그럴 바엔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것이 백배는 낫지.”
오상문의 이야기에 박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 일단 북미왕국으로의 이주는 불가능해.”
“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오상문이 깜짝 놀라 되묻자 박강현은 그런 오상문의 반응에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지금까지야 북미왕국과의 관계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유민들로 위장하고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묵인했지만, 이제 북방 영토를 개척해야 하잖아. 그런데 북미왕국으로 이주할 수 있다면 누가 북방 영토로 가겠어. 자네 말마따나 북미왕국으로 이주하지. 그래서인지 이제부터 개항장으로 오는 유민들은 무조건 북방 영토로 보낸다고 하더라.”
이 부분은 조선 측에서 북미왕국의 양해를 얻었고, 어차피 북미왕국에서도 조선의 상황을 알기에 이해해 주었다.
다만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북미왕국으로 이주한 정착민의 직계가족에 한해서는 이주를 허용했지만, 어차피 북미왕국으로 이주한 이들은 대부분 직계가족과 함께 이주했기에 북미왕국으로 이주할 수 있는 조선인은 거의 없었고.
해서 세계신문은 더는 북미왕국으로 이주하지 못한다고 알렸고, 이를 전해 들은 오상문은 탄식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미적거리지 말고 바로 북미왕국으로 이주할 걸 그랬나?”
이에 박강현은 뜬금없다는 얼굴로 오상문을 바라보다 말했다.
“음? 설마 북미왕국으로 이주할 생각이었어? 너 관심 없었잖아?”
처음 세계신문을 통해 북미왕국의 존재를 알게 되고, 유민으로 위장하면 북미왕국으로 이주할 수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면서 박강현은 슬쩍 오상문에게 함께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다만 그때 오상문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타국으로 갈 필요가 있겠느냐고 답했었고.
헌데 오상문의 생각이 바뀐 것 같았기에 박강현이 묻자 오상문은 자신이 예전에 한 이야기가 생각나는지 조금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크흠. 그게 최근에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북미왕국으로 이주할까 했었지. 쩝.”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내 오촌 당숙이 이번 조청 전쟁에 참전했었거든?”
이에 잠깐 눈을 깜박이던 박강현은 곧 아는체했다.
“아! 어영청 하급 군관이라는 그?”
“그래. 그리고 북방에서 북미왕국 병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봤는데...북미왕국으로 이주하면 정말 먹고 살 걱정은 없다더라. 물론 이주하고 나서 자리 잡기까지 몇 년은 조금 고생해야겠지만, 가장이 고생하면 가족들은 비교적 편안히 지낼 수 있기도 하대. 그래서 오촌 당숙은 여기서 계속 남의 땅을 부칠 바에는 북미왕국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
“그렇긴 하지. 요새는 소작료가 꽤 줄어서 입에 풀칠은 할 수 있긴 하지만...”
세계신문을 통해 북미왕국의 정보를 알게 되면서, 처음 땅의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만을 준다는 것에 실망하며 북미왕국으로의 이주를 고려하지 않던 백성들이 하나둘 유민으로 위장하고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북미왕국으로 향하는 조선인들이 많아지면서 예전보다는 소작농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지주들은 어쩔 수 없이 소작료를 낮추기 시작했다.
덕분에 오상문이나 박강현 같은 소작농의 사정이 나아질 수 있었고.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지속될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기에 박강현이 말을 흐리자 오상문이 그 말을 받았다.
“그래. 또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니까. 근데 북미왕국으로의 이주가 막혔다면...”
그러면서 오상문이 안색을 흐리자 박강현이 괜찮다는 얼굴로 말했다.
“대신 북방 영토로 가는 건 어때? 북미왕국 대신 북방 영토로 이주하는 것도 난 괜찮아 보이던데?”
“야.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북방 영토로의 이주를 권하는 박강현을 보고 오상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자 박강현이 손가락을 들어 흔들었다.
“물론 들었지. 근데 네가 예상했던 것과는 상황이 다르기에 하는 소리야.”
“음? 그게 무슨 소리야?”
오상문이 관심을 보아지 박강현이 입을 열었다.
“넌 허허벌판을 개간하는 게 쉽지 않다고 했잖아?”
“그렇지. 너도 잘 알잖아? 맨땅을 개간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래. 그건 알지. 근데 북방 영토로 이주하면 잘 개간된 땅을 나눠준다더라.”
박강현의 대답에 오상문은 뜬금없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뭔 헛소리야? 북방 영토에 잘 개간된 땅이 어디 있어서 그걸 나눠줘?”
이에 박강현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북미왕국에 신기한 기물들이 많다는 거는 알잖아?”
“설마...”
오상문이 눈을 크게 뜨며 세계신문을 통해 알게 된 경운차라는 기물을 머릿속에서 떠올렸을 때, 박강현이 말했다.
“그래. 북미왕국에서 경운차라는 기물을 이용해 북방 영토의 땅을 개간해 준다더군. 이 땅을 나라에서 북방 영토로 이주한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거고. 그러니 땅을 개간한다고 고생할 필요도 없고...경작권만 주는 북미왕국과는 달리 북방 영토의 경우 땅의 소유권을 정착민에게 나눠주는 만큼 나중을 생각하면 오히려 북방 영토로 이주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어.”
“으음...”
오상문은 박강현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촌 당숙의 권유가 있기 전까지 오상문이 북미왕국으로의 이주를 꺼린 것은 땅의 경작권만을 내어주는 북미왕국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리고 네가 걱정했던 노역의 문제도 당분간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북방 영토로 이주하는 백성들은 5년간 전세와 요역, 공납을 부과하지 않겠다고 밝혔거든.”
“헉! 그게 정말이야?”
오상문은 박강현의 말에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5년간 모든 세금을 부과하지 않겠다니.
언제나 각종 명목으로 세금을 걷던 조정이 과연 그러겠는가 하는 얼굴을 하는 오상문을 보고 박강현이 동치미 국물을 마신 후 손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그래. 세계신문에 떡하니 쓰여 있었어. 북방 영토로 이주하면 그러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그러니 북방 영토에 정착하는 이들은 온전히 농사와 자기들이 살 집을 짓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는 거지.”
박강현의 이야기에 오상문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오상문은 북방 영토로의 이주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으나 이 정도의 혜택이 있다면 북방 영토로 이주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쌀과는 달리 다른 잡곡은 가격이 저렴한 편이긴 하지만, 북방 영토는 텅 비어 있다고 하니 많은 땅을 얻을 수도 있을 테고, 자신의 땅이니만큼 지주에게 바칠 식량도 없을 테니 지금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특히 북미왕국으로의 이주도 불가능해진 상황이었으니.
“흐음...조건 자체는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그리고 이런 오상문의 반응에 박강현이 눈을 빛내며 덧붙여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야. 북방 영토에 정착하는 백성들은 최소 3년간 나라에서 식량과 각종 생필품을 정착 지원금 조로 제공한다더군.”
“그건 또 무슨...뭐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니야? 나라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준다고? 세금도 걷지 않는데?”
백성들을 북방 영토로 정착시키기 위해 세금을 걷지 않는 것까지는 이해하겠지만, 식량과 생필품을 준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오상문이 놀라며 되묻자 박강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뭘 그리 놀라. 이런 지원을 해서라도 조정은 백성들을 북방 영토에 정착시키고 싶은 거야. 그래야 북방 영토를 개척할 수 있고 5년 후부터는 세금을 걷을 수 있을 테니까.”
“으음...”
박강현의 이야기에 오상문이 생각에 잠겼을 때, 박강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라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최소 3년간 지원해주고, 5년간 어떠한 세금도 걷지 않는다 했으니 북방 영토로 이주하고 2, 3년만 고생하면 남은 2, 3년 동안은 큰돈을 벌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난 바로 관청으로 가서 북방 영토로 이주하겠다고 알릴 생각이고.”
“...그래?”
생각보다 빠른 결정과 행동에 오상문이 조금 놀란 듯 하자 박강현이 슬쩍 말했다.
“세계신문에 북방 영토로 이주하면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잘 나왔으니 나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거란 말이지? 마을 분위기도 그렇고. 그러니 늦게 신청하면 오히려 북방 영토로의 이주도 불가능해질 수도 있어. 너무 많은 백성이 북방 영토로 이주하는 것도 조정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까.”
그 말에 고민하던 오상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괜히 미적거리다 북미왕국으로의 이주도 막혔는데 여기서 또 미적거렸다가 북방 영토로의 이주도 막히면 곤란했으니까.
해서 오상문은 박강현을 바라보다 마음을 굳혔다.
“그럼 관청에 같이 가자.”
오상문의 대답에 박강현은 오랜 친구와 헤어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활짝 웃으며 답했다.
“잘 선택했어. 바로 가자.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