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8화
아마미 군도에 상륙한 왜인들을 모두 포로로 삼아 나하 항으로 데려오자 김봉길은 즉각 원정 함대를 이끌고 나하 항을 나섰다.
그리고 이틀 후, 가고시마 만의 입구에 도달하자 김봉길은 만약을 대비해 함대의 속도를 더욱 늦춘 후 가고시마 만 안쪽으로 원정 함대를 진입시켰고.
견시수가 사츠마 번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가고시마 성을 발견하고 보고하자 그때까지 함교에서 원정 함대를 지휘하던 김봉길은 품에서 망원경을 꺼내 주변 지형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흐음...생각보다 지형이 괜찮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해안가 가까이에 성을 지었다길래 무슨 배짱인가 했는데 믿는 구석이 있었군요. 저기 보이는 큰 섬에 병력과 화포를 다수 배치하거나, 저 섬 뒤편에 전선을 숨겨두었다가 공격하면 꽤 위협적이겠어요. 물론 저희야 상관없지만 말입니다.”
김봉길의 중얼거림을 듣고 부함장이 손을 들어 가고시마 만 안쪽에 자리한 커다란 섬을 가리키며 이렇게 이야기하자 김봉길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고개를 돌려 가까운 선착장을 확인하고 말했다.
“그보다 포로가 이야기했던 대로 동원할 수 있는 선박은 모두 동원한 모양이군. 선착장이 텅 비었어.”
사츠마 번의 거점 항구라 그런지 선착장의 규모는 꽤 컸지만, 선착장에 매여 있는 배는 조그마한 나룻배를 제외하면 전무했기에 김봉길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자 사츠마 번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부함장도 김봉길을 따라 미소를 짓기 시작했고.
그때 망원경을 통해 가고시마 성을 바라보던 김봉길의 부관이 입을 열었다.
“다만 남겨둔 병력이 조금 있는 모양인데요? 저길 보시지요.”
그러면서 부관이 해안가에 인접한 평산성인 가고시마 성을 가리키자 김봉길과 부함장은 망원경을 들고 가고시마 성을 확인했고, 가고시마 성 위에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살짝 안색을 흐렸고.
포로들을 통해 확보한 정보에 따르면 사츠마 번은 동원할 수 있는 병력 대부분을 유구국 원정에 투입했기에 남은 병력은 얼마 안 된다고 했고, 그렇기에 원정 함대가 가고시마 성에 가까이만 접근해도 지레 겁을 먹고 바로 백기를 들어 올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못해도 수천은 되어 보이는 병력이 성 위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니 쉬이 백기를 들어 올리지는 않아 보였기에.
다만 사츠마 번이 병력을 얼마나 준비하든 대세엔 지장이 없었기에 김봉길이 크게 개의치 않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흐음...뭐 패전 소식을 접했으니, 우리가 공격해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급히 병력을 늘린 모양이지.”
“아. 그럴 확률이 높군요.”
부관이 김봉길의 말에 수긍했을 때, 김봉길이 망원경을 눈에서 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보다 듣던 대로 저 가고시마 성은...해안가에 무척 가깝네? 뭐 저렇게 가깝게 지었어?”
“그러게 말입니다. 대략 1km 정도로 보이니...신형 전선에 장착된 화포로 충분히 공격할 수 있겠는데요? 그냥 포격으로 저 성을 날려버리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럼 사츠마 번은 즉각 백기를 들고 항복할 텐데?”
과격한 부함장의 말에 김봉길은 조금 혹하는 얼굴로 저 멀리 가고시마 성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흐음...그것도 조금 끌리기는 하는데 저 성에 사츠마 번의 번주가 살고 있다면서? 포격에 휘말려 번주가 죽으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 그렇게 되면 막부에서도 나서긴 해야 할 테고.”
분명 막부는 이번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조하긴 했지만, 북미왕국이 사츠마 번의 번주를 죽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분명 다른 번주들은 사츠마 번의 번주가 북미왕국의 공격으로 사망했음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막부를 성토할 것이 분명했고, 그럼 막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에 막부를 달래기 위해 이런저런 이권을 내줘야 하는데 굳이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탓이다.
해서 김봉길이 이를 설명하자 부함장이 수긍하며 다른 제의를 했다.
“아. 그건 그렇군요. 허나 저들의 기세가 삼엄한 것을 보면 그냥 백기를 들어 올릴 것 같지는 않은데...이쪽에서 백기를 올려 협상할 뜻이 있다는 것을 알릴까요?”
이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김봉길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보통 협상을 하자고 먼저 제의하는 쪽이 사정이 급하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럴 수는 없지. 먼저 협상을 제의한다면 저들이 기고만장해질 수도 있을 터이니.”
“허면?”
“일단 속도를 줄이되 저 가고시마 성을 직접 포격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까지 이동하고...위협 사격을 통해 저들이 백기를 들어 올리게 만들자고.”
“알겠습니다.”
부함장은 김봉길의 명령에 함대의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대부분이 비어 있는 선착장으로 이동했고.
선착장에 거의 접근했을 때, 망원경을 통해 가고시마 성 주변을 살피던 김봉길이 말했다.
“흠. 저 가고시마 성 뒤쪽의 산 공터를 포격한다면 알아서 겁을 먹고 백기를 들어 올릴 것 같은데...가능할까?”
가고시마 성 뒤편의 공터를 포격으로 박살 낸다면, 사츠마 번에서는 가고시마 성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백기를 들고 협상을 진행하지 않겠느냐는 김봉길의 의도를 깨닫고 부함장이 망원경을 들고 김봉길이 이야기한 가고시마 성 뒤편의 공터와의 거리를 계산해보고 대답했다.
“흠. 아슬아슬하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다른 전선에 연락해 일제 사격을 통해 사츠마 번에게 원정 함대의 화력을 똑똑히 보여주자고.”
“알겠습니다.”
김봉길의 명령에 부함장은 즉시 원정 함대에 연락했고, 원정 함대에 소속된 선박들은 일제히 우현으로 뱃머리를 틀고, 포탑은 가고시마 성 인근을 조준하기 시작했다.
“준비 끝났습니다. 함대 사령관님.”
“좋아. 그럼...”
김봉길이 막 포격 명령을 내리려 할 때, 부관이 급히 소리쳤다.
“함대 사령관님! 저기 보시지요! 백기가 올라왔습니다!”
“음?”
김봉길이 고개를 돌려 부관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가고시마 성의 외성 문에 백기가 올라왔고, 굳건히 닫혀 있던 문이 열리기 시작했기에 김봉길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어쩔까요?”
부함장의 질문에 김봉길은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하나뿐이었다.
“휴우. 저쪽에서 백기를 들어 올리고 협상할 뜻을 내비쳤는데 공격할 수야 없겠지. 일단 포격은 중지하고, 사츠마 번에서 사람을 보내면 회의실로 보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지.”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 * *
시마즈 미츠히사를 대신해 백기를 들고 북미왕국의 배에 오른 시마즈 가문의 가신인 요쿠보는 북미왕국 병사의 안내를 받아 커다란 선실에 들어섰고, 커다란 선실의 중앙에 자리한 김봉길을 보고 그가 이 함대의 지휘관임을 눈치채고 곧바로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봉길은 동승한 외무청 관리를 통해 말을 건넸다.
“처음 뵙겠소. 그래. 무슨 일로 백기를 들고 온 거요.”
바로 용건을 묻는 김봉길을 보고 요쿠보는 잠시 당황했지만,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쁠 것은 없었기에 바로 용건을 꺼냈다.
“크흠. 항의하러 왔습니다.”
“항의?”
김봉길은 요쿠보의 말을 통역하는 외무청 관리에게 제대로 통역하고 있는지를 눈빛으로 물었고, 외무청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요쿠보를 바라보았고.
김봉길이 자신을 바라보자 요쿠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북미왕국이 왜 우리 사츠마 번을 적대하는 겁니까.”
“적대라?”
“그렇습니다. 북미왕국은 아국의 땅을 강제로 점령하지 않았습니까.”
외무청 관리가 전해 준 말을 듣고 김봉길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우리가 언제 사츠마 번의 땅을 강제로 점령했다고 하는 거요.”
“아마미 군도와 유구 제도는 모두 우리 사츠마 번의 영토나 마찬가지입니다. 헌데 북미왕국에서 이 땅을 관리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와 병사들을 모두 내쫓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슨 헛소리요. 유구 제도와 아마미 군도는 엄연히 유구국의 영토이지 사츠마 번의 영토가 아니오. 그리고 우리 북미왕국은 유구국의 요청을 받아 각 섬에서 패악을 부리는 왜인들을 내쫓았을 뿐이고.”
김봉길의 말을 외무청 관리가 통역해 전달하자 요쿠보는 그게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당시에는 외교적인 문제와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 섬을 관리하기 어려웠기에 유구국을 존속시켰을 뿐이지, 실제 유구국을 통치하는 것은 우리 사츠마 번이었고, 그러니 유구국의 영토는 우리 사츠마 번의 영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유구국도 인정했기에 우리 사츠마 번의 관리와 병사들의 진주를 허용한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사츠마 번이 유구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것이 맞긴 하지만 이를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는 김봉길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올시다. 유구인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를뿐더러,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유구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주변 국가인 청나라, 조선, 왜국에 직접 확인해본 결과, 유구국은 청나라와 왜국에 조공을 바치는 조공국이지 지금 당신이 이야기하는 사츠마 번의 괴뢰국이란 소리는 듣지 못했소.”
“그거야...”
청나라는 왜국과의 무역을 엄금했고, 그 때문에 사츠마 번은 유구국의 상황을 숨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유구국은 청나라와 조공을 주고받으며 무역을 하고 있는 만큼, 유구국이 건재한다면 청나라와 무역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었으니까.
해서 사츠마 번은 청나라 사신들이 유구국의 상황을 알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속였고, 당연히 다른 나라들은 유구국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막부는 유구국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겠지만, 타국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청나라가 자신의 속국인 유구국을 멋대로 점령한 왜국에 역정을 내며 난리 칠 것은 분명했기에 침묵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북미왕국의 물음에 유구국은 사츠마 번의 괴뢰국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 것은 분명했고.
해서 요쿠보가 말을 흐리자 김봉길이 눈을 빛내며 계속 이야기했다.
“해서 아국은 유구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했고, 유구국이 보호를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였을 뿐이오. 헌데 사츠마 번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병력까지 동원해 우리를 공격하려 들었으니 사츠마 번이 먼저 우리를 적대한 것이 아니겠소.”
“하지만...”
요쿠보가 김봉길의 말에 무어라 반박하려 했지만, 김봉길은 요쿠보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함대를 이끌고 온 것은 유구국이 독립국인지 아닌지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오. 아국의 말을 무시하고 아국이 보호하겠다고 천명한 유구국을 공격한 간 큰 사츠마 번을 토벌하기 위해서이지. 그러니 잘못을 인정하고 항복할 것이 아니라면 그냥 돌아가시구려. 난 더는 시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크윽...”
통역된 김봉길의 말에 요쿠보는 분기를 애써 감추었다.
시마즈 미츠히사는 갑자기 북미왕국의 배가 일제히 선회해 측면을 보이자 화포 공격임을 직감했고, 어쩌면 가고시마 성까지 화포 공격이 닿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급히 백기를 들어 올리라 명령하면서 자신을 불러 신신당부했다.
북미왕국이 포격을 시작하면 가고시마 성은 몰라도 최소한 사츠마 번의 거점 항구인 가고시마 항은 모두 박살 날 테니 손해가 막심할 수밖에 없는 만큼 어떻게든 북미왕국과 화친을 맺으라고 말이다.
해서 요쿠보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김봉길을 바라보고 물었다.
“허면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 관한 배상을 한다면 북미왕국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겁니까?”
김봉길은 외무청 관리가 전한 요쿠보의 항복 선언에 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아. 그리고 포로들의 몸값도 내놔야 할 거고.”
김봉길이 포로를 언급하자 요쿠보는 눈이 번쩍 뜨였다.
“포로? 이번 원정에 참여한 사츠마 번의 병사들 말입니까?”
“그렇소. 대략 4천여 명에 달하는 포로와 사츠마 번의 소영주, 가신들 역시 포로 신분이니만큼...”
포로가 4천여 명에 달한다는 사실에 혹시나 하는 얼굴을 하고 있던 요쿠보는 김봉길이 소영주를 언급하자 환희에 찬 얼굴로 급히 되물었다.
“헉! 소영주께서 살아 계시다는 겁니까?”
이에 김봉길이 고개를 끄덕이자 요쿠보는 조급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협상을 시작하지요.”
그리고 이런 요쿠보의 반응에 김봉길은 씩 웃었다.
“좋은 생각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