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7화
원정 함대에 소속된 병사들은 유구국 국왕이 승전을 축하하며 보낸 술과 음식을 즐기며 잠시 휴식을 취했고.
휴식이 끝난 후 김봉길은 아마미 군도에 상륙한 왜인들을 확보하기 위해 원정 함대를 파견했다.
원래는 최대한 빠르게 사츠마 번과 협상하기 위해 아마미 군도를 둘러본 후 곧바로 사츠마 번의 본거지인 가고시마로 이동할 생각이었지만, 갑판 위에 왜인들을 줄줄이 묶어놓고 사츠마 번의 본거지로 향하는 것은 좀 아니다 싶었던 것이다.
해서 임시 포로수용서 건설이나 원정 함대에 고용된 아마미 군도 출신 백성들의 거주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김봉길은 잠시 나하 항에 남아서 서류 작업에 매진해야 했고.
그렇게 김봉길이 임시 막사에서 열심히 서류 작업에 매진하고 있을 때, 바깥이 시끄러워졌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임시 막사를 나서니 저 멀리 나하 항 선착장에 아마미 군도로 떠났던 원정 함대가 정박해 있었고, 원정 함대에서 수병들의 통제하에 수많은 왜인들이 하선하고 있었기에 김봉길은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허. 뭐가 저렇게 많아?”
그렇게 잠깐 멍하니 왜인들이 원정 함대에서 내리는 모습과 줄지어 임시 수용소 방면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봉길은 곧 정신을 차리고 급히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선착장에서 하선하는 왜인들을 바라보고 있던 박중우 함장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김봉길을 확인하고 빙긋 웃었다.
“아. 함대 사령관님. 오셨습니까.”
“그래. 헌데 이들이 다 포로들인가?”
“그렇습니다.”
“근데 뭐가 이렇게 많아?”
4척의 철선에서 계속 내려 저 멀리 보이는 임시 포로수용소로 줄지어 이동하는 왜인들을 보고 질린 기색으로 김봉길이 투덜거리듯 묻자 박중우가 고개를 저었다.
“많긴요. 저게 전부가 아닙니다.”
이에 김봉길은 기겁한 얼굴로 급히 박중우를 바라보았다.
“뭐? 저게 전부가 아니라고? 설마 포로가 더 있어?”
“예. 아직 아마미 군도에는 저희에게 항복한 포로들이 꽤 많습니다.”
박중우의 대답에 김봉길은 고개를 돌려 수병들의 통제하에 줄지어 임시 포로수용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왜인들을 바라보며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척 봐도 수백 명은 넘을 것 같은데 저게 전부가 아니라고? 그렇게 많이 생존했다는 건가? 아무리 왜인들이 물질에 익숙하다고는 해도 이건 좀 의외인데...”
원정 함대와 사츠마 번의 함대가 맞붙은 것은 한밤중이었고, 이곳 주변이 아열대 기후라고는 하나 밤바다의 수온을 생각하면, 그리고 당시는 그믐달에 가까워 무척이나 어두웠고, 덕분에 제대로 주변을 파악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생존자가 그리 많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헌데 생각보다 많은 왜인들이 원정 함대에서 내리고 있고, 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하니 김봉길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표정을 찌푸리고 있을 때, 박중우가 그런 김봉길의 혼잣말을 듣고 사정을 설명하고자 입을 열었다.
“아. 포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희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음?”
“아시다시피 이번 해전은 야간 해전이다 보니 포격보단 근접해서 기관총으로 공격해 침묵시킨 배도 꽤 되지 않습니까.”
“그랬지. 아. 설마?”
자신의 간단한 설명에 김봉길이 상황을 대충 파악한 듯 보이자 박중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짐작하신 것처럼 왜인들은 신형 전선의 탐조등이 자신들의 배를 밝히는 순간 공격당하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바다로 뛰어들었고, 그 후 기관총으로 공격받았던 배에 올라 목숨을 보전한 겁니다. 물론 일부 배들은 기관총에 의해 파손되어 침몰한 예도 있지만, 대다수 배의 경우 돛은 갈가리 찢겼을지언정 바다에는 떠 있었고, 살기 위해 저희의 공격을 피해 바다로 뛰어든 왜인들은 이런 배들에 올라 인근의 아마미 군도로 향한 겁니다. 그 때문인지 아마미 군도 곳곳에 상륙한 왜인들이 무척 많더군요.”
김봉길은 이러한 박중우의 설명에 관심을 보이며 질문을 던졌다.
“얼마나 되는데?”
“이번에 수송선에 태워 데리고 온 포로들이 1천 명인데, 공간이 부족해 태우지 못한 포로들도 그 정도는 됩니다. 그러니...”
“허. 그럼 다 합쳐서 대략 2천 명이나 된다고?”
김봉길이 박중우의 대답에 무척이나 놀라며 중얼거리자 박중우가 그 말을 받았다.
“예. 그 정도는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일부는 저희가 아마미 군도를 둘러보기 전에 가고시마로 향했다고 하니 생존자는 더 많을 것 같고요.”
이러한 박중우의 대답에 김봉길이 미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흠. 그럼 사츠마 번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파악했겠군?”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가고시마로 돌아간 생존자들은 유구 섬에 상륙하려다 실패한 이들에 불과했지만, 이들을 통해 해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테니, 생각보다 적은 수의 병력만 유구 섬에 상륙했다는 것쯤은 짐작할 거라 여겼다.
해서 김봉길은 패전 소식을 접한 사츠마 번이 어떻게 행동할까 잠시 고민해보았지만, 포로들을 심문해 확보한 정보에 따르면 사츠마 번은 이번 원정에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선박을 동원했기에 패전 소식을 접했다 한들 별다른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뭐 상관은 없겠지. 그보다 왜인들이 순순히 항복하던가?”
이에 박중우는 씩 웃으며 답했다.
“저희에게 호되게 당했는데 어찌 덤비겠습니까. 일부는 저희를 발견하고 즉각 배를 타고 도망치려 했지만, 위협 사격을 하니 포기했고요.”
“흐음...그래? 내륙으로 도망치지도 않았다고?”
“물론 내륙으로 도망친 왜인들도 있었습니다. 다만 저희가 해안가에 정박해 있던 왜선을 포격으로 모두 부숴버리자...곧 백기를 들고 해안가로 나오더군요.”
섬에서 탈출할 유일한 수단인 배를 부수는 모습에서 북미왕국이 자신들의 탈출을 용인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한 왜인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항복했다는 박중우의 설명에 김봉길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하하하. 잘 했네. 덕분에 사츠마 번과의 협상에서 포로들의 몸값으로 두둑하게 뜯어낼 수 있겠군.”
김봉길의 칭찬에 박중우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박중우와 대화하는 사이 원정 함대 갑판 위에 가득하던 왜인들이 어느덧 모두 하선해 임시 포로수용소로 이동하는 뒷모습을 본 김봉길이 저들까지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휴우. 그보다 포로만 4천여 명에 달한다면...이거 최대한 빠르게 협상을 진행하는 것이 낫겠는데?”
김봉길의 의견에 박중우도 동의했다.
“예. 포로들을 관리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포로들이 소모할 물자까지 수송할 것을 생각하면...최대한 빠르게 협상을 진행해 포로들을 반환하는 것이 낫긴 하겠지요.”
“내일까지 포로들을 모두 이곳에 끌고 올 수 있겠지?”
이에 박중우는 잠깐 머릿속으로 계산해보고 대답했다.
“아마 가능할 겁니다.”
“좋아. 그럼 모래 사츠마 번과의 협상을 위해 원정 함대 전체를 움직일 테니, 그 전에 포로들을 수송하고...아! 수병들 일부를 차출하도록 하게.”
당장 3천여 명, 그리고 내일 아마미 군도에 남겨둔 포로들을 모두 데리고 온다면 4천여 명에 달하는 포로를 관리해야 하는데 이들 전부를 아이누 경비대만으로 관리하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임시 포로수용소의 위치를 생각하면 포로들이 임시 포로수용소를 탈출할 것 같지는 않긴 했다.
포로들이 임시 포로수용소를 탈출해봐야 왜인들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 유구인들에게 맞아 죽을 것이 뻔했고, 이를 포로들도 모르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괜히 문제가 일어나서 좋을 것은 없었기에 미리 수병을 추가로 차출해 포로들을 철저히 관리하겠다는 김봉길의 뜻을 파악한 박중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함대 사령관님.”
* * *
유구국 원정에 나섰던 병력 중 일부가 가고시마로 돌아오자 사츠마 번의 가신들은 생존자들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고 번주인 시마즈 미츠히사에게 보고했고.
시마즈 미츠히사는 가신들의 보고를 듣고 탄식하며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가 병력을 준비하라는 짤막한 명령만 내리고 며칠간 두문불출했다.
이런 시마즈 미츠히사의 행동에 가신들은 당황하면서도 일단 번주인 시마즈 미츠히사의 명령대로 병력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며칠 후 시마즈 미츠히사가 칩거를 풀고 제일 먼저 가신들을 소집한 후 질문을 던졌다.
“병력은 얼마나 준비가 되었나.”
이에 한 가신이 대답했다.
“5천 명의 병력이 준비되었습니다. 주군.”
요 며칠 사이에 5천 명의 병력을 준비한 것은 분명 대단했지만, 시마즈 미츠히사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5천 명? 턱없이 부족해. 못해도 1만 명은 준비시키게.”
이에 가신들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물론 지금은 추수가 거의 끝난 농한기나 다름없으니 추가로 병력을 모집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허나 북미왕국의 강력함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되는 병력을 모집하든 북미왕국이 쏟아내는 총알에 찢겨나갈 것이 분명해 보였기에 가신들은 어떻게든 시마즈 미츠히사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오나 주군. 생존자들의 이야기나 그들이 타고 온 배를 살펴보면 북미왕국의 전투용 선박에는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엄청난 병력이 탑승하고 있거나, 그게 아니면 끊임없이 총알을 발사하는 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헌데 마구잡이로 병력을 모집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방금까지 입을 열었던 가신은 시마즈 미츠히사의 중얼거림에 서늘함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주군을 설득하기 위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주군. 어차피 유구국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북미왕국과 협상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에 무심한 눈빛으로 가신들을 바라보던 시마즈 미츠히사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협상할 생각이네.”
“예?!”
시마즈 미츠히사의 대답에 가신들은 당황했다.
가신들은 유구국 원정의 실패로 소영주인 시마즈 츠나타카의 생사가 불분명해지자 복수를 위해 병력을 모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마즈 미츠히사가 병력을 모집하라는 명령만 내리고 며칠간 두문불출한 것은 시마즈 츠나타카를 잃은 슬픔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말이다.
특히 시마즈 미츠히사는 아들이자 시마즈 츠나타카의 아버지이자 시마즈 츠나히사를 잃었을 때도 크게 슬퍼했었으니 말이다.
또한, 시마즈 츠나히사는 병으로 사망했는데 시마즈 츠나타카는 북미왕국과의 전투로 사망한 셈이니 시마즈 미츠히사가 결코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고.
헌데 가신들의 예상과는 달리 시마즈 미츠히사가 북미왕국과 협상할 거라 이야기하지 가신들은 무척이나 당황했고, 시마즈 미츠히사는 그런 가신들을 보고 입을 열었다.
“내가 병력을 준비하라고 명령한 것은 아직 전투를 치를 역량이 남아 있음을 과시해 북미왕국과의 협상에서 조금이나마 주도권을 잡기 위한 술책일 뿐이네.”
시마즈 미츠히사가 비록 손자를 아끼긴 했지만, 손자의 복수를 하겠다고 가문 전체를 말아먹을 수는 없었다.
특히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북미왕국의 전투용 함선이 몇 배는 강력했으니, 괜히 북미왕국에 저항해봐야 피해만 더 늘어나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시마즈 미츠히사가 병력을 준비하라고 명령한 것은 아직 병력은 많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려 북미왕국과의 협상에서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지는 않으려는 술책에 불과했고.
이런 시마즈 미츠히사의 설명에 가신들도 그제야 자신들의 주군이 무엇을 의도하고 병력을 모집하라고 이야기했는지를 깨닫고 알겠다는 듯 탄성을 지르며 한마디씩 했다.
“아...”
“그렇군요. 허면 최대한 빠르게 병력을 추가로 모집하도록 하겠...”
그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시마즈 마쓰히사와 가신들은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을 지었고, 한 무사가 허겁지겁 달려와 보고했다.
“주군! 북미왕국의 함대가 가고시마 만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헉!”
“맙소사!”
가신들은 생존자들을 통해 북미왕국의 함대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파악할 수 있었기에 무사의 보고에 당황하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고.
그런 가신들의 행동에 조금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바라본 시마즈 미츠히사가 한숨을 내쉬고 명령을 내렸다.
“당장 가고시마 성에 병력을 배치해 만약을 대비하라. 그리고...일단 백기를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