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6화
정성국은 예정도 없이 방문한 조용한 곰을 보고 무슨 일로 방문했는지를 물었고.
조용한 곰이 꺼낸 이야기에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뭐? 오스만 제국이 병력을 동유럽으로 집중시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은 진중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오스만 제국이 병력을 동유럽으로 집중시킨다는 건 결국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하겠다는 뜻 아닌가?”
“아마 그럴 겁니다. 그렇지 않고선 굳이 동유럽에 병력을 배치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에 정성국은 예상과는 다른 오스만 제국의 움직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이 전쟁이 점차 확대되어 프랑스의 확장을 저지하려는 여러 국가들이 소위 반프랑스 동맹을 구성해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하자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고립된 프랑스도 새로운 동맹국을 찾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나라는 오스만 제국뿐이었고, 오스만 제국 역시 유럽으로의 진출에 관심이 있었기에 프랑스의 제의에 전쟁을 준비했고.
헌데 북미왕국에서 유럽 각국에 신식 소총을 판매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신식 소총의 위력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것이 알려지고, 신성로마제국도 신식 소총으로 무장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이런 상황에서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을 하게 되면 패배하거나, 승리한다 하더라도 피해가 막심해질 것을 우려해 전쟁을 미루고 북미왕국과 외교 관계를 맺어 신식 소총을 확보하려 했고.
그리고 북미왕국 입장에서는 현 유럽의 정세에서 오스만 제국이 프랑스와 손을 잡고 유럽으로 진격하게 되면 균형은 깨지고 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해질 것을 우려해 북미왕국은 오스만 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신식 소총을 거래하는 대신, 물량 부족을 이유로 신식 소총을 넘겨주는 시기를 최대한 늦추었다.
그렇기에 외무청에서는 신식 소총을 모두 넘겨주는 2년 후에나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시작할 거라 예상했고.
헌데 예상과는 달리 오스만 제국이 전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이해가 가지 않아 입을 열었다.
“아니. 아직 신식 소총을 다 넘기지도 않았잖아?”
“예. 기껏해야 5천 자루만 넘겼을 뿐이지요.”
북미왕국에서 오스만 제국에 넘기기로 한 신식 소총은 총 3만 자루로, 4년에 걸쳐 이를 넘기기로 했는데 물량 부족을 이유로 작년에는 2천 자루, 올해는 3천 자루, 총 5천 자루가 넘겼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이 보유한 신식 소총은 2만 자루라 턱없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고.
해서 정성국이 오스만 제국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조용한 곰에게 질문했다.
“헌데 왜 벌써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하려 드는 거지?”
“오스만 제국은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정성국의 질문에 조용한 곰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고.
이 대답에 정성국은 역시나 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흠. 역시 전쟁이 끝나기 전에 프랑스 편으로 참전해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겠다는 건가?”
이미 유럽에서의 전쟁은 프랑스가 승기를 굳혀가고 있었다.
그러니 오스만 제국이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전쟁에 참여해 신성로마제국을 압박하기만 해도 결국 이번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귀결될 테고, 오스만 제국은 승전국이 되어 여러 이권을 챙길 수 있을 것은 분명했고.
해서 정성국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 오스만 제국이 단독으로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하면, 다른 국가들이 개입할 것은 분명하니 그 점이 부담스러운 모양입니다. 해서 신성로마제국이든, 에스파냐든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병력을 빼기 어려울 때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빈을 함락시키겠다는 생각 같습니다.”
굳이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자잘한 이권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에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이자 유럽의 중심부인 빈을 함락시킬 생각으로 보인다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이거 신성로마제국이 기겁하겠군.”
“신성로마제국뿐이겠습니까.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한 국가들이 모두 기겁한 상황입니다.”
오스만 제국이 빈을 노리고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하면, 신성로마제국은 즉각 반프랑스 동맹에서 빠질 수밖에 없고, 신성로마제국이 반프랑스 동맹에서 빠지면 신성로마제국과 대치한 프랑스 병력이 가까운 저지대 지방으로 이동할 테니, 겨우 버티고 있는 에스파냐나 네덜란드는 즉각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반프랑스 동맹이 오스만 제국의 움직임에 기겁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대답에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음? 이미 유럽 각국도 이 사실을 아는 건가?”
오스만 제국에 파견된 북미왕국 대사가 보내온 정보일 테니 다른 나라들은 아직 모르리라고 생각해 질문하자 조용한 곰이 답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오스만 제국에서 동유럽으로 이동시키고 있는 병력이 거의 10만 명에 달합니다. 이러한 병력 이동을 눈치채지 못할 까닭이 없지요.”
“뭐?! 10만 명이나?”
“그렇습니다. 거기에 오스만 제국에 나가 있는 북미왕국 대사가 보고하길, 저희가 넘긴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친위대 역시 파견한 모양입니다.”
북미왕국에서 신식 소총을 넘기자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4세는 이 신식 소총을 친위대에 넘기고 이 친위대와 함께 사냥을 나서는 등 무척 애지중지할 정도였는데 이 병력마저 파견했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
“허. 메흐메트 4세가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빈을 함락시키려고 작정한 모양이군?”
이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요. 절호의 기회이지 않습니까.”
조용한 곰의 말마따나 오스만 제국은 한창 전성기 시절에 빈을 함락시키려 했지만 여러 기독교 국가들이 신성로마제국을 돕기 위해 지원병을 파견했기에 결국 빈 함락에 실패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헌데 지금은 유럽 각국이 프랑스와 전쟁 중이라 섣불리 지원병을 파견하긴 어려운 만큼, 그리고 신성로마제국도 몇 년간 이어진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만큼, 빈을 함락시킬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었고.
해서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거기에 오스만 제국은 프랑스와도 친분이 깊으니 오히려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돕기 위해 계속해서 전쟁을 진행하며 신성로마제국의 병력을 어느 정도 붙잡고 있어 줄 수도 있겠군.”
“예. 분명 그럴 겁니다. 오스만 제국이 빈을 함락하면 프랑스가 가장 경계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이 대폭 꺾이게 될 테니까요.”
루이 14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둘러싸인 상황을 어떻게든 타파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니 신성로마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막기 위해 평화협상을 제의하더라도 무시할 것이 분명했고, 오히려 신성로마제국의 병력을 섣불리 빼지 못하도록 위협할 수도 있었고.
이를 떠올린 정성국이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생에서도 이때쯤에 오스만 제국은 빈을 함락시키기 위해 대병을 동원해 빈을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물러났었다.
다만 전생과는 달리 유럽 각국은 몇 년간의 전쟁으로 세력이 꽤 약화되어 있었고,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기에 섣불리 신성로마제국에 지원병력을 파견하기도 어려웠다.
해서 정성국은 전생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까 싶어 중얼거렸다.
“으음...그럼 신성로마제국은 결국 빈을 잃게 되려나?”
정성국의 중얼거림을 듣고 조용한 곰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요. 오스만 제국이, 정확히는 이슬람 세력이 유럽의 중심부로 진격하는 것을 교황청이 두고 볼 것 같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그렇긴 하겠군. 교황청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기독교 국가들은 교황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
정성국이 자신의 말에 수긍하자 조용한 곰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심장인 빈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한 국가들은 급해졌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 반프랑스 동맹에서 빠지는 순간 프랑스를 막는 것은 불가능해지니까요.”
“그야...그렇겠지. 지금도 겨우 버티고 있는 상황이니.”
솔직히 북미왕국이 신식 소총의 수량을 의도적으로 조절하지 않았다면, 반프랑스 동맹이 저렇게 버티지도 못했을 거라는 것을 아는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한 곰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예. 그래서인지 반프랑스 동맹에 소속된 국가들은 어떻게 해서든 다른 국가들을 반프랑스 동맹에 끌어들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다른 국가?”
“먼저 잉글랜드가 있습니다.”
“잉글랜드라...”
정성국은 조금 회의적인 얼굴을 하자 조용한 곰이 바로 덧붙였다.
“물론 현 잉글랜드의 국왕인 찰스 2세는 프랑스에 우호적이기는 한데, 다른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가 잘나가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프랑스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고 저지대 지방을 장악하거나 영향력을 확보한다면, 잉글랜드는 대륙 무역의 주요 교역로를 잃게 되는 셈이라 타격이 큽니다.”
프랑스는 경제적인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해 저지대 지방인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와 네덜란드를 점령하려 하고 있고, 두 지역이 프랑스에 점령되면 당연히 이 지역들은 프랑스 상인들이 상권을 장악할 테니 잉글랜드는 대륙 무역의 교역로를 하나 잃게 되는 셈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찰스 2세가 친프랑스 적인 성향이 강하다고는 하나 결국 잉글랜드도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정성국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렇긴 한데 이제 와서 잉글랜드가 참전한다고 뭐가 바뀔까 싶긴 한데...”
이미 정세는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고, 여기서 신성로마제국이 빠진 빈자리를 잉글랜드가 메울 수 있을까 싶은 얼굴의 정성국을 보고 조용한 곰이 답했다.
“그건 그렇지요. 해서 반프랑스 동맹에 소속된 국가들은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아국도 반프랑스 동맹에 끌어들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를?”
“예. 네덜란드와 덴마크 왕국은 국혼까지 제의하더군요.”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표정을 구겼다.
“뭐? 국혼?!”
“그렇습니다. 전하.”
북미왕국의 국력이 알려지면서, 그리고 북미왕국의 자식인 정안문과 정나리가 나이를 먹자 유럽 각국은 은근슬쩍 국혼을 제의했었다.
다만 정성국은 자신은 몰라도 자식들을 정략결혼을 시키고 싶진 않았을뿐더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를 타국에 보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조용한 곰에게 국혼 제의는 아예 보고도 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었고.
헌데 조용한 곰이 국혼을 언급하자 정성국은 뚱한 표정으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내가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내 자식들의 혼사는 본인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할 생각이니 국혼 제의는 무시하고 굳이 보고할 필요도 없다고?”
이에 조용한 곰은 다시 묘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게...크흠. 덴마크 왕국에서는 전하와의 국혼을 제의해서 말입니다.”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얼빠진 얼굴을 하며 되물었다.
“...응? 내 자식들이 아니라 나를?”
“예. 덴마크 국왕의 누이가 아직 혼인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해서...”
정성국도 덴마크의 국왕인 크리스티안 5세에게 아직 미혼인 누이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허나 그녀를 자신과 연결할 줄은 몰랐기에 황당하다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아니. 덴마크는 독실한 신교도 국가 아닌가? 헌데 아내가 둘이나 있고 무신론자인 나에게 누이를 시집보내겠다고 제의했단 말인가?”
“그 정도로 상황이 절박하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신성로마제국이 반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하는 순간 대프랑스 전쟁은 끝날 테고, 그렇게 되면 덴마크 왕국은 스코네 지방을 토해내야 할 겁니다. 아니. 루이 14세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이것도 일이 잘 풀렸을 때의 일일 겁니다. 아니면 더 많은 영토를 잃겠지요. 그러니...”
이번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프랑스 전쟁은 크리스티안 5세 때문에 발발한 전쟁이었다.
크리스티안 5세가 스코네 지방을 탐내 스웨덴을 공격하면서 프랑스가 동맹인 스웨덴을 돕기 위해 끼어들고, 덴마크는 다른 국가들을 끌어들여 전쟁이 커진 셈이니.
그러니 루이 14세가 덴마크를 가만히 놔두지는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고, 그렇기에 크리스티안 5세는 어떻게든 덴마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강국인 북미왕국과의 동맹이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북미왕국은 유럽의 복잡한 관계에 휘말리기 싫다며 거리를 두고 있는 만큼 남은 방법은 혼인을 빙자해 북미왕국 왕실과 연을 맺고 안전을 보장하는 것뿐이고.
이를 짐작한 정성국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 거참...어떻게든 현 상황을 뒤집기 위해 국혼을 제의했다 이건가?”
“예. 왕자마마와 공주마마의 국혼은 무조건 거절한다는 사실을 덴마크에서도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크리스티안 5세는 누이인 울리카를 무척 아낀다고 들었는데 이런 제의를 했다는 것에 정성국이 고개를 저었을 때 조용한 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전 이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뭐?!”
정성국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자 조용한 곰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대로라면 네덜란드는 명맥을 유지하기도 어려울뿐더러, 프랑스의 영향력이 유럽 전역으로 뻗어 나갈 겁니다. 그게 썩 좋은 상황은 아니잖습니까.”
“흐음...”
“하지만 그냥 반프랑스 동맹을 지원했다간 프랑스가 반발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덴마크와의 혼인을 명분으로 지원한다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조용한 곰의 말마따나 이번 전쟁이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다면 프랑스는 전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 분명했고 이는 썩 달갑지 않긴 했다.
허나 그를 막겠다고 정략결혼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됐네. 그렇게 하면 다른 나라들은 가만히 있겠나. 이 나이에 딸뻘인 아내를 여럿 들이고 싶은 생각은 없네.”
“그렇게 되면 왕실도 더욱 번창할뿐더러...다들 아국의 동맹국이 되어 분쟁이 사라지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조용한 곰이 조금 짓궂게 웃으며 그렇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계속 이 주제로 이야기해봐야 좋을 것이 없겠다 싶어 급히 입을 열었다.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 아닌가. 그리고 아직 잉글랜드는 반프랑스 동맹이 아닌 만큼, 잉글랜드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줘도 되는 거고.”
이에 조용한 곰은 입가에 맺힌 웃음을 지우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수긍했다.
“흠...그건 그렇지요. 허면 프랑스 대사가 반발하지 않는 선에서 반프랑스 동맹을 돕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