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5화
섬에 상륙한 사츠마 번의 병사들이 남하하고 있고, 이 소식을 접한 슈리 성에 주둔하던 북미왕국의 병사들과 배에 탑승하고 있던 수병들이 이를 막기 위해 슈리 성을 나서자 이번 전투의 결과에 따라 자신들의 운명이 정해진다고 생각한 유구국의 국왕인 쇼테이 왕과 섭정인 오자토 초료는 잔뜩 긴장하며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충성스러운 신하인 구시카와 조슈를 파견했다.
물론 북미왕국에서는 승리를 자신했고, 슈리 성에 배치된 아이누 경비대를 통해 후장식 소총인 갑오 소총의 화력을 뼈저리게 깨달았기에 이성적으로는 북미왕국이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60년 넘게 사츠마인들에게 시달리다 보니 불안할 수밖에 없던 탓이다.
해서 쇼테이 왕과 오자토 초료는 구시카와 조슈가 슈리 성을 떠난 후 초조한 기색을 애써 감추면서 한시라도 빨리 승전보를 가지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렸고.
헌데 구시카와 조슈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슈리 성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에 둘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면서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급히 구시카와 조슈를 불렀다.
그리고 대전으로 들어오는 구시카와 조슈의 얼굴이 비교적 밝았기에 쇼테이 왕은 마음속에 가득한 불안감을 내려놓고 질문을 던졌다.
“생각보다 일찍 복귀했군. 설마 벌써 전투가 끝난 건가?”
“전투는 없었습니다. 전하.”
“음? 그럼...?”
“북미왕국의 병사들을 보자마자 왜인들이 항복했습니다. 전하.”
구시카와 조슈의 대답에 당황한 쇼테이 왕은 오자토 초료를 바라보았고, 오자토 초료 역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급히 구시카와 조슈에게 질문을 던졌다.
“뭐? 그게 정말인가? 정말 그 사나운 사츠마 번의 병사들이 전투도 하지 않고 백기를 들어 올렸다고?”
60년 전 사츠마 번과 전투를 치러보기도 했고, 그 이후엔 유구국을 감시하기 위해 나하 항에 파견된 사츠마 번의 병사들이 워낙 행패를 부려, 이들의 행패에 분개한 유구인들이 덤비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사츠마 번의 병사들이 자신들에게 이를 드러낸 유구인들을 학살한 덕분에 이들이 얼마나 독하고 사나운지는 잘 알고 있었다.
헌데 그러한 사츠마 번의 병사들이 자신들을 기다리는 북미왕국의 병사들을 보자마자 항복했다는 구시카와 조슈의 보고에 오자토 초료는 무척이나 놀랄 수밖에 없었고.
물론 일전에 북미왕국의 원정 함대가 처음 나하 항을 방문했을 때도 사츠마인들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추방되기는 했지만, 그때는 사츠마인들의 수는 적고 북미왕국인의 수는 많았었기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북미왕국의 병력보다 사츠마 번의 병력이 몇 배는 많은데도 불구하고 바로 항복했다고 하니 오자토 초료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오자토 초료의 반응에 구시카와 조슈는 오히려 당연한 결과라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왜인들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북미왕국 병사들을 보고 당황하면서도 일단 전투 준비를 하는 눈치였습니다만...적장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백기를 들어 올리고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 말에 쇼테이 왕이 감탄을 금치 못하며 끼어들었다.
“허어...이거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항복한 모양이군. 그럼 북미왕국에선 사츠마 번의 항복을 받아들였고?”
“그렇습니다. 전하. 해서 사츠마 번의 병사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북미왕국 병사들의 통제에 따라 나하 항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구시카와 조슈의 대답에 쇼테이 왕이 이채를 띠었다.
“나하 항 방면으로?”
“북미왕국이 확보한 나하 항 인근의 땅에 임시로 포로수용소를 건설해 당분간 포로들을 수용할 거라고 하더군요.”
이에 쇼테이 왕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옆에 있는 오자토 초료를 보고 물었다.
“흐음...우리가 참견할 문제는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사츠마 번의 병사들을 포로로 잡은 것은 북미왕국이니만큼...”
북미왕국이 자신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요청하지 않고, 포로들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끌고 가는 것은 포로들은 자신들의 소관이고, 포로들을 탐내지 말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사츠마 번에 원한이 있다고 한들 포로를 건드려선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오자토 초료의 설명에 쇼테이 왕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츠마 번이 동원한 병력 규모를 생각하면 이번 원정은 수많은 사츠마 번주의 가신들이 참여했을 것이 분명했고, 그러니 포로 중에 잘 찾아보면 분명 자신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이들도 있을 터이니 이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북미왕국의 행동을 보면 복수는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아쉽군. 아쉬워.”
그리고 이런 쇼테이 왕의 반응에 오자토 초료는 내심 긴장하며 괜한 일로 북미왕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급히 쇼테이 왕을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보다 북미왕국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츠마 번은 이전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동원해 아국을 점령하려 했지만, 그 많은 병력을 모두 잃은 셈입니다. 그러니 사츠마 번은 이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고생해야 할 테고, 더는 아국을 노리지 못할 겁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과가 아니겠습니까.”
쇼테이 왕이 가장 증오하는 이는 사츠마 번의 번주였고, 이번 패배로 사츠마 번의 번주인 시마즈 마츠히사는 죽기 전까지 이번의 패배를 수습하는 데 애를 써야 할 것이 분명했기에 쇼테이 왕은 슬쩍 웃었다.
“하하하. 그건 그렇지.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아마미 군도마저 다시 아국의 손에 들어왔으니 이곳에서 설탕을 생산해 판매한다면 많은 부를 얻을 수 있을 테니 예전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도 있겠어. 정말 북미왕국에 신속하길 잘 한 것 같군.”
쇼테이 왕의 이야기에 오자토 초료는 내심 회의적이었다.
예전에야 중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누리기도 했지만, 북미왕국은 청나라, 왜국, 조선과 직접 교역하는 터라 유구국에서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리고 설탕의 경우도 북미왕국에서 대량으로 생산해 판매하기에 조금씩 가격이 내려가고 있을뿐더러 이미 노예를 모두 해방한 터라 노예를 이용해 설탕을 만들 수도 없었고.
여기에 며칠 전 김봉길 함대 사령관과 잠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을 때, 김봉길 함대 사령관은 이제 조공도 바치지 않는데 이전처럼 세금을 거둘 생각이냐고 물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세금도 낮춰야 했으니, 예전처럼 막대한 부를 얻지는 못할 거라고 본 것이다.
다만 그것만으로도 사츠마 번의 통제 아래에 살아가야 했던 시절보다는 사정이 많이 나아질 것은 분명했기에 오자토 초료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분명 그리되겠지요. 그보다 전하. 일단 전투가 끝난 만큼, 전하께서 친히 북미왕국 병사들을 위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이에 쇼테이 왕이 당연한 일이라는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 우리를 위해 전투까지 치렀는데 당연히 그래야겠지. 바로 음식과 술을 준비하도록 하게. 그리고 북미왕국의 지휘관들은 따로 대접할 준비도 하고.”
“알겠습니다. 전하. 바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 * *
“항복? 적들이 항복했다고?”
“그렇습니다. 함대 사령관님.”
함교에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던 김봉길은 상륙한 갑판장이 보낸 병사의 보고를 통해 남하하던 왜인들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황당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그럴 거면 진작에 항복할 것이지 왜 이제 와서?”
물론 원정 함대와 사츠마 번의 함대가 충돌했을 때는 야간이었고, 사츠마 번의 지휘관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함대를 철저히 분산시켰기에 피해 규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항복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날이 밝고 유구 섬에 상륙하면서 피해 규모를 대충 파악했을 테고, 계산이 섰을 텐데도 항복하기보단 슈리 성으로 진군하더니 이제 와서 항복한 것이 김봉길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워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김봉길에게 보고하던 병사가 대답했다.
“저들도 상륙하기까지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한 모양입니다만...피해가 너무 크다 보니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일단 이곳까지 남하한 모양입니다. 다만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아국의 병력과 무장 상태를 확인하고 슈리 성을 점령하고 유구 국왕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전투를 포기한 모양이고요.”
“아. 그래?”
“예.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번에 항복한 병력의 총사령관이 차후 사츠마 번을 이끌어 갈 소영주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제야 상황을 대충 짐작한 김봉길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영주의 안전 때문에 항복한 거라 이거지?”
“그렇습니다. 저들은 항복 의사를 밝히며 가장 먼저 소영주의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었으니까요.”
듣기로 현 사츠마 번의 영주는 무척 나이가 많다고 들었다.
그러니 해서 자신의 손자를 후계자로 지목해 자신이 죽더라도 후계자인 손자가 사츠마 번을 통치할 수 있게끔 기반을 만들어 두었고.
헌데 이 소영주가 이번 전투에서 사망하면 사츠마 번은 외부 문제와 내부 문제로 심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사츠마 번의 가신들은 어떻게든 소영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사츠마 번은 유구국을 가혹하게 통치했기에 유구인들은 사츠마 번에 강한 원한을 품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소영주가 포로가 된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기에 항복하는 대신 소영주의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그럼 다른 요구는?”
“이번에 항복한 자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차후 몸값을 지불하면 풀어주었으면 한다는 요구였습니다.”
이것 역시 크게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기에 김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 요구를 들어줬고?”
“예? 예. 어차피 저희야 포로들을 따로 해코지하진 않잖습니까. 그리고 포로들이 몸값만 지불한다면 풀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고요. 해서 포로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사츠마 번에서 포로들의 몸값을 제대로 지불한다면 풀어주겠다고 약조했습니다만...”
자신의 질문에 불안한 표정을 짓는 병사를 보고 김봉길이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 딱히 책망할 생각은 없으니 그렇게 내 눈치를 볼 필요는 없네. 그보다 2천 명의 포로를 관리하려면...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필요할 것 같은데?”
사츠마인들이 순순히 항복했다 하더라도 2천 명을 제대로 관리하려면 꽤 많은 인원이 필요했는데,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따로 수병을 차출하긴 난감했던 김봉길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김봉길에게 보고하던 병사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누 경비대에서 포로들을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어? 아이누 경비대에서?”
아이누 경비대는 슈리 성을, 정확히는 유구 왕실을 지켜야 했기에 김봉길이 고개를 갸웃하자 병사가 대답했다.
“예. 어차피 남은 병력이 항복하고 사츠마 번은 더는 전쟁을 지속할 능력이 없으니 슈리 성에 굳이 많은 병력을 배치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시더군요. 해서 슈리 성에 배치했던 병력을 대부분 임시 포로수용소에 배치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이누 경비대의 말도 일리는 있었기에 잠깐 생각에 잠겼던 김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뭐 상관없겠지. 알겠네. 포로 관리는 아이누 경비대에 맡기겠다고 전하게. 뭐 소영주가 포로가 된 이상 사츠마 번도 빠르게 협상하려고 할 테니 잠시만 고생하면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함대 사령관님.”
김봉길이 가보라는 듯 손짓하자 병사는 김봉길에게 경례한 후 함교를 나섰고, 김봉길은 고개를 돌려 함교에 있던 다른 사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구 섬에 상륙한 병력이 모두 항복한 이상, 빠르게 협상을 진행해 전쟁을 끝내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이에 김봉길의 부관이 김봉길에게 질문을 던졌다.
“빠르게 협상을 진행한다는 뜻은...?”
“직접 원정 함대를 이끌고 가고시마 만까지 들어간다면, 사츠마 번에서도 원정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닫겠지. 안 그래?”
사츠마 번에서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 김봉길의 말처럼 원정 함대를 끌고 가고시마 만으로 진입한다면, 사츠마 번에서도 이번 원정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 분명했기에 다른 사관들을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 부관이 조언했다.
“그러고 보면 사츠마 번과 협상하기 전에 아마미 군도를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음? 아마미 군도를?”
“예. 원정 함대의 공격을 받은 왜인들이 모두 물귀신이 되진 않았을 겁니다. 일부는 분명 아마미 군도에 상륙했겠지요.”
“아. 그렇긴 하네. 어차피 어둡고 바쁜 터라 배만 대충 박살 내거나 갑판만 공격하고 이동했으니까.”
김봉길이 수긍에 부관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그러니 협상 전에 이들도 모두 포로로 삼는다면 더 많은 몸값을 받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에 김봉길은 피식 웃었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 그럼 바로 출항해서 아마미 군도를 싹 뒤져서 포로들을 더 확보하고, 그 후에 가고시마 만으로 가자고.”
김봉길의 말에 원정 함대가 막 출항 준비를 시작할 때, 유구국 관리가 급히 김봉길을 찾았고, 김봉길은 무슨 일인가 싶어 선착장으로 나가 유구국 관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후 김봉길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함교로 돌아와 한창 출항 준비에 바쁜 사관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쩝...동작 그만. 출항은 미룬다.”
“예?”
“유구국에서 고생한 아국의 병사들을 위해 음식과 술을 대접하겠다고 하니 일단은...”
“와아아아!”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환호하는 사관을 보고 김봉길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잠깐은 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