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0화
구시카와 조슈는 유구국의 왕궁인 슈리 성의 정전에서 현 유구국의 국왕인 쇼테이 왕을 알현하며 무릎을 꿇고 입을 열었다.
“신 구시카와 조슈. 전하의 명령에 따라 북미왕국과의 협상을 마치고 아국을 보호해 줄 병력과 함께 복귀했습니다. 전하.”
이에 북미왕국의 함대가 나타나 나하 항에 정박했다는 보고를 받은 이후 정전에서 구시카와 조슈를 기다리고 있던 쇼테이 왕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오! 정말 고생했네. 구시카와. 복귀가 늦어져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했었는데 말이네.”
쇼테이 왕의 말에 그 옆에 있던 유구국의 재상이자 섭정인 오자토 초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대로라면 한참 전에 구시카와 조슈가 복귀했어야 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기에, 오자토 초료는 내심 구시카와 조슈가 항해 도중 변을 당한 건가 싶어 다시 기회를 봐서 북미왕국으로 밀사를 보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기에.
이에 구시카와 조슈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저희가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아시아 지역의 외교 문제는 포로나이에서 머무는 외무청 고위 관리인 투로시노가 전권을 갖고 총괄한다고 알려져 있었고, 그렇기에 투로시노를 만나 아국의 제안을 알린다면 바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여겼습니다만...투로시노는 북미왕국에서 아국을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작게는 사츠마 번, 크게는 막부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면서 이 사안을 본인이 결정하기보다는 본국에 떠넘겼습니다.”
비록 포로나이에 있는 투로시노가 외교적인 문제를 총괄한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들의 상식으로는 아무리 본국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해도 신하에게 전권을 맡긴다는 것은 조금 미심쩍었기에 오히려 구시카와 조슈의 대답에 쇼테이 왕은 이해한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그래서 복귀가 늦어진 거로군.”
“그렇습니다. 전하.”
“그래도 자네가 아국을 보호해 줄 병력과 함께 도착했다면, 북미왕국과의 협상이 잘 끝난 모양이군?”
그동안 유구국은 청나라와의 관계에 무척 신경을 썼다.
청나라에 조공을 바침으로써 청나라에 책봉을 받을 수 있었고, 이러한 관계를 사츠마 번이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보았기에.
하지만 삼번의 난 이후 청나라는 외부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고, 조공 무역으로 얻는 이득이 줄어들자 사츠마 번은 더욱 가혹하게 유구국을 수탈하기 시작했고, 이에 유구국은 청나라를 대신해 자신들을 보호해 줄 다른 나라를 찾았는데 현 상황에서 이게 가능한 나라는 북미왕국뿐이었다.
다만 북미왕국과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고, 제대로 알지도 못했기에 일단 유구국은 본격적으로 북미왕국의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정보를 수집하면서 북미왕국이 믿을만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때쯤, 조청 전쟁이 시작되며 북미왕국이 조선을 도와 청나라와 전쟁을 시작했기에 유구국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단 기다렸고, 이 전쟁이 결국 청나라의 패배로 귀결되자 오자토 초료는 지체하지 않고 북미왕국에 신속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쇼테이 왕 역시 사츠마 번엔 원한이 많았고, 이대로라면 나라와 왕실을 유지할 수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이를 받아들이며 북미왕국에 밀사를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렇기에 구시카와 조슈가 북미왕국의 함대와 함께 복귀한 것은 북미왕국이 유구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유구국의 상국이 되어 주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쇼테이 왕이 확인차 묻자 구시카와 조슈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형태는 조금 다르긴 합니다만...”
“음? 형태가 다르다고?”
“북미왕국이 타국과 맺는 외교 관계의 형태는 그동안 아국이 주변 국가와 맺어 왔던 전통적인 외교 관계라 할 수 있는 조공-책봉 관계와는 다르니까요. 해서 겉으로는 아국이 북미왕국의 속국이 되었다고 알려지겠지만, 아국은 북미왕국에 조공을 바칠 필요도 없고, 책봉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 말에 쇼테이 왕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잠깐만. 그게 정말인가? 조공을 바칠 필요도 없고, 내가 내 마음대로 자식을 세자로 책봉할 수 있다고? 북미왕국에 예의상 허락받을 필요도 없다는 건가? 그런데도 북미왕국은 병력을 보내 아국을 돕는다고?”
딱히 얻는 것도 없는데 왜 북미왕국이 자신들을 돕느냐는 얼굴을 하고 있는 쇼테이 왕을 보고 구시카와 조슈가 답했다.
“대신 아국은 나하 항 인근에 북미왕국의 선박들이 정박할 수 있는 전용 선착장과 창고, 상관 등을 건설할 땅을 북미왕국에 넘겨줘야 합니다. 또한, 북미왕국은 노예 제도를 인정하지 않기에 아국의 영토에 있는 모든 노예를 즉시 해방해야 하며, 아국의 백성을 노예로 파는 일도 금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타국과 외교 관계를 맺을 땐 북미왕국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그게 북미왕국이 아국을 보호해주는 대신 아국이 지불해야 할 대가이지요.”
이런 구시카와 조슈의 대답에도 쇼테이 왕이나 오자토 초료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북미왕국의 보호를 받는 대가가 별거 아니었으니까.
나하 항에 빈 땅은 많았기에 전용 선착장과 창고 등을 건설할 땅을 내어주는 것은 크게 부담스러울 것 없었고, 현재 유구국의 영토에 있는 노예들은 대부분 사츠마 번의 소유였기에 노예를 해방한다고 자신들이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다만 타국과 외교 관계를 맺을 땐 북미왕국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점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속국이 된 이상 북미왕국의 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거나, 혹은 북미왕국의 우호국과 분쟁을 일으키게 되면 북미왕국이 곤란해지는 터라 이러한 조건을 내건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러니 쇼테이 왕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전부라고?”
“예. 뭐 다른 자잘한 사항들이 있긴 합니다만 핵심적인 것은 저 3가지가 전부입니다.”
구시카와 조슈도 포로나이에서 새한성에서 올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투로시노와 이러한 협상을 하면서 처음엔 무척 놀랐었던 만큼, 쇼테이 왕의 반응을 이해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쇼테이 왕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 헛웃음을 짓다가 옆에 있는 오자토 초료를 보면서 말했다.
“허허허. 이거 자네의 말을 듣길 잘한 것 같군.”
“아닙니다. 전하.”
오자토 초료는 쇼테이 왕의 말에 겸양하면서 구시카와 조슈를 바라보고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북미왕국에서 파견한 병력은 얼마나 되는가?”
“북미왕국은 일단 전하의 안전을 위해 슈리 성 주변에 배치할 200명의 병사와 나하 항과 바다를 지키기 위한 4척의 전선을 파견했습니다.”
“4척? 듣기로는 6척의 함대라고 들었는데?”
“2척은 보급 물자를 실은 수송선입니다.”
그 대답에 오자토 초료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흠...물론 북미왕국의 전선이 강력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4척의 전선으로 아국의 바다를 지킬 수 있을까? 사츠마 번에서 작정하고 덤빈다면 이를 다 막지는 못할 것 같은데...”
사츠마 번의 수군은 강력한 편이었고, 그 수도 많았다.
특히 사츠마 번은 유구국을 착취하면서 더 많은 부를 얻었고, 이를 통해 더 많은 병사와 배를 건조하며 세력을 키웠기에 70년 전 유구국을 침공했을 때보다 더 많은 병력과 선박을 동원할 것이 뻔했고.
그러니 오자토 초료는 이를 고작 4척의 배로 막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걱정하자 구시카와 조슈가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아닙니다. 사츠마 번의 수군 따위는 가볍게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음? 가볍게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구시카와 조슈의 얼굴을 본 쇼테이 왕이 흥미를 보이며 끼어들자 구시카와 조슈가 쇼테이 왕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이전에 저 아이누인들이 독립 전쟁을 벌였을 때, 북미왕국의 전선 1척이 왜국의 수군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습니다.”
“아. 들어본 적 있네.”
아이누 독립 전쟁 당시, 고작 배 1척 때문에 왜국은 결국 에조 지역을 탈환하기보다는 에조 지역의 아이누인들이 독립하는 것을 허락했다는 것은 쇼테이 왕도 예전에 들어본 이야기였기에 아는체하자 구시카와 조슈가 말했다.
“헌데 그때 왜국의 수군에 타격을 준 전선은 고작 지급 전선이고, 지금 나하 항에 정박해 있는 전선들은 그 지급 전선의 몇 배나 되는 화력을 자랑하는 신형 전선들입니다.”
“신형 전선?”
“북미왕국이 최근에 심혈을 기울여 새로 건조한 전선들이지요. 더불어 카리브 해의 해적들을 모두 소탕한 것으로 유명한 김봉길 함대 사령관이 지휘봉을 잡았으니 사츠마 번이 전군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결코 나하 항에는 도착하지는 못할 겁니다.”
확신에 찬 구시카와 조슈의 대답에 쇼테이 왕은 믿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들었던 오자토 초료는 그래도 미심쩍은 얼굴로 구시카와 조슈를 바라보다 툭 하니 질문을 던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습니다. 포로나이에서 신형 전선에 탑승해 이곳으로 오는 동안 신형 전선의 사격 훈련을 직접 참관해 보니...사츠마 번이 얼마나 많은 배를 동원하든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었으니까요.”
“허어...”
구시카와 조슈는 포로나이에서 신형 전선에 탑승한 이후 김봉길이 갑작스럽게 상황을 설정하고 훈련하는 모습에 놀라면서도 김봉길의 배려 덕분에 함교에서 훈련을 참가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 훈련이 끝나자 확신할 수 있었다.
혹시 사츠마 번이 유구국을 점령하기 위해 다시 한번 병력을 잔뜩 태우고 나하 항을 향해 항해한다 하더라도 북미왕국의 원정 함대가 충분히 막을 수 있으리라고.
적이 멀리 있으면 포탑을 회전시켜 120mm 화포로 공격하고, 가까워지면 배 곳곳에 장착되어 있는 기관총이 끊임없이 총알을 쏟아내는데 그걸 무슨 수로 막겠나.
이를 떠올린 구시카와 조슈가 확신을 갖고 다시 한번 대답하자 오자토 초료는 일단은 믿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나하 항에 있는 사츠마 번의 관리와 병사들은 어떻게 되었나? 그들이 북미왕국의 함대와 선착장에 상륙하는 병사들을 보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오자토 초료는 북미왕국의 함대가 선착장에 정박한 후 병사들이 상륙하며 선착장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츠마 번의 병사들과 대치 중이라는 보고만 받았기에, 선착장의 상황을 묻자 구시카와 조슈가 슬쩍 미소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가만히 있더군요. 정확히는 북미왕국의 경고에 따라 무장을 해제했습니다.”
“뭐?”
호전적인 사츠마 번의 병사들이 아무런 충돌 없이 북미왕국의 경고에 따라 무장을 해제했다는 구시카와 조슈의 대답에 오자토 초료와 쇼테이 왕이 당황하자 구시카와 조슈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류쿠재번봉행인 구로사와는 똑똑한 인물입니다. 무장에서도 밀리고, 수에서도 밀리는 상황에서 순순히 무장을 해제한다면 추방하는 것으로 끝내겠다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요.”
“추방? 그놈들을 다 잡아 죽이지 않고 추방한다고?!”
쇼테이 왕은 방자한 구로사와나 걸핏하면 사고를 치는 사츠마 번의 병사들에게 원한이 깊었기에 북미왕국에서 이들을 죽이지 않고 추방한다는 이야기에 분노한 기색을 보이자 구시카와 조슈가 쇼테이 왕을 진정시키기 위해 급히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나하 항에 정박해 있는 신형 전선들은 북미왕국에도 아직 몇 대 없는 최신 전선들입니다. 그러니 이곳에 언제까지 배치해둘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이에 쇼테이 왕은 순간 멈칫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그럼 함대를 잠깐 파견한 거라고?”
그리고 옆에서 듣고 있던 오자토 초료도 인상을 찌푸리며 슬쩍 끼어들었다.
“아국이 북미왕국의 속국이 된 이상, 북미왕국은 아국을 보호해주기 위해 계속 함대를 파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에 구시카와 조슈는 이들이 혹여 오해할까 싶어 바로 입을 열었다.
“물론 함대와 병사는 계속 파견할 거라고 하더군요. 다만 사츠마 번을 완전히 박살 내면 이곳에 배치하는 함대나 병사의 규모를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에 오자토 초료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그럼 사츠마 번의 관리와 병사들을 추방하는 것은...”
“뭐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제일 중요한 이유는 그들을 추방해 사츠마 번에 이곳의 사정을 알려 하루라도 빨리 사츠마 번이 군사를 움직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으음...”
정보를 차단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츠마 번에 정보를 알려 하루라도 빨리 사츠마 번과의 관계를 끝내려는 북미왕국의 뜻임을 짐작한 오자토 초료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다시 구시카와 조슈가 덧붙였다.
“그리고 김봉길 함대 사령관의 말로는 저들을 추방한다 하더라도, 사츠마 번이 항복했다는 구실로 처단하거나, 아니면 공을 세워 죄를 씻으라며 다시 이곳에 침공하는 데 앞장세울 테니, 어차피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더군요.”
이렇게까지 말하자 쇼테이 왕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끙. 그렇다면야...어쩔 수 없지. 그보다 김봉길 함대 사령관은 아직 선착장에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제가 전하께 보고할 시간은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이에 쇼테이 왕이 명령을 내렸다.
“그럼 바로 부르게. 그리고 우리를 돕기 위해 이렇게 와 주었으니 감사의 연회라도 열어야 할 것 같은데...”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