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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639화 (639/850)

639화

오랜만에 방문한 포로나이에서 정일신을 비롯해 친분이 있는 지인들과 만나 잠깐 회포를 푼 김봉길은 바로 유구국의 사절인 구시카와 조슈를 원정 함대에 태우고 각종 보급 물자를 실은 수송선 2척과 함께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그리고 4일 후 김봉길이 구시카와 조슈와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유구국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나하 항이 보인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김봉길은 구시카와 조슈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함교로 향했고.

함교에서 전면의 창문을 통해 나하 항의 모습을 확인한 김봉길은 감회가 새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흐음...이거 꽤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로군.”

그리고 김봉길 옆에서 몇 달 만에 도착한 고향의 모습에, 그리고 곧 유구국이 완전히 바뀔 거라는 기대감에 들뜬 얼굴로 나하 항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구시카와 조슈는 김봉길의 중얼거림을 용케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함대 사령관님께서 나하 항을 방문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약 20년 전쯤에 처음으로 나하 항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요.”

김봉길의 대답에 구시카와 조슈는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약 20년 전이면...북미왕국이 건국되기도 전이로군요?”

“맞습니다. 북미왕국이 건국되기는커녕, 처음으로 북미 대륙을 발견하고 북미 대륙에서 복귀했을 때의 일이지요.”

이런 김봉길의 대답에 구시카와 조슈가 무척 흥미를 보이며 더 이야기해달라는 눈빛을 보내자, 김봉길은 예전 생각이 나는지 조금 아련한 눈빛으로 나하 항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범선을 타고 항해했기에 해류와 바람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해서 북미 대륙에서 조선으로 복귀하기 위해 해류와 바람을 따라 이동해 하와이를 발견하고, 식수와 식량을 보급한 후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다 발견한 섬이 바로 유구 섬입니다.”

“헉! 그게 정말입니까?”

“예. 당시만 하더라도 처음으로 태평양을 횡단하다 보니 해류와 바람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해 하와이 제도에서 유구 섬까지 도착하는 데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었고...덕분에 물자가 조금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저기 보이는 나하 항에 정박해 보급을 시도했었지요.”

“허어...”

구시카와 조슈는 예전에 북미왕국의 선박이 나하 항을 방문했었다는 사실에 놀란 얼굴을 하자 이를 보고 김봉길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으로 나하 항을 방문했을 때는 정성국도 있었던 만큼, 이것까지 말해준다면 아마 구시카와 조슈는 기겁하리라 생각했고.

다만 조선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정성국은 조선을 떠나 처음으로 북미 대륙을 발견한 후 복귀하지 않았다고 알려진 터라 이를 말했다가 훗날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근질거리는 입을 애써 다문 김봉길은 어느덧 가까워진 나하 항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당시 유구국의 관리는 기꺼이 저희의 보급 요청을 승낙했습니다. 해서 저는 겨우 한숨을 돌리면서도 계속해서 태평양을 횡단해야 하는 만큼, 나하 항을 중간 거점으로 생각하고 태평양을 횡단할 때마다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지요. 위치도 괜찮았고, 유구국의 관리도 호의적이었으니까요. 해서 그 이후 몇 년간은 가끔 들렀었지요.”

“그런 인연이 있었을 줄은...”

김봉길의 설명에 구시카와 조슈는 어쩌다 한 번 들른 것도 아니고 꽤 여러 차례 나하 항을 들렀다는 사실에 놀라며, 왜 이런 사실이 보고되지 않았는가 한탄하자 김봉길이 고개를 저었다.

“당시엔 북미왕국이 건국되기 전이라 마찰을 피하고자 다른 나라의 상선으로 위장했었으니 몰랐겠지요.”

“아...”

김봉길의 말에 구시카와 조슈가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구시카와 조슈는 아이누 섬에서 머물면서 아이누인들이 어떻게 왜국에 독립할 수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기에 20년 전,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도움을 요청했었다면, 유구국의 역사가 완전히 바뀌지 않았을까 싶었던 것이다.

물론 정성국은 한창 북미왕국을 발전시키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시점에서 유구국 문제에 개입해 사츠마 번과 투닥거릴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제가 처음으로 나하 항을 들렀을 때도, 그리고 선단을 구성해 방문할 때마다 저 왜인들이 언제나 호들갑을 떨곤 했었는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로군요.”

김봉길의 말처럼 나하 항 인근에는 유구인들과는 복식이 달라 확연히 눈에 띄는 왜인들이 북미왕국의 배를 가리키며 무어라 소리치고 있는 모습이 멀리서도 보였기에 구시카와 조슈가 쓰게 웃었을 때, 김봉길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만 왜인들이 저렇게 나하 항에서 얼쩡거리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겠군요. 부관.”

“예. 함대 사령관님.”

김봉길과 구시카와 조슈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봉길의 부관이 대답하자 김봉길은 어느덧 가까워진 선착장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다.

“작전대로 함대를 선착장에 정박시키게. 그리고 혹시 모르니 전투를 준비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바로 기관총에 사수를 배치하고 병사들에게도 갑오 소총을 지급해 갑판 위에 배치하겠습니다.”

어차피 현 상황에서 화포를 쓸 일은 없었다.

사츠마 번의 병사들이 일부 나하 항에 주둔해있기는 하나, 이들을 공격하겠다고 120mm 화포를 발사하는 것은 낭비에 가까웠고.

그러니 김봉길의 부관은 화포 대신 기관총과 더불어 수병들도 무장시켜 만약을 대비하겠다고 이야기하자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김봉길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여 명령했다.

“그래. 그리고 아이누 경비대에도 곧 하선해야 한다고 알리고.”

구시카와 조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유구국 중신 중엔 사츠마 번과 손을 잡은 이들도 있었기에 만약을 대비해 유구국 궁궐을 지킬 필요가 있어 김봉길은 아이누 섬에 도착해 아이누 경비대 200명을 원정 함대에 포함시켰다.

그렇기에 정박하자마자 아이누 경비대를 하선시켜 일단 선착장을 장악하고, 그 후 저 왜인들을 무력화시킬 생각이라는 것을 김봉길이 알리자 부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러면서 부관이 함교의 벽에 걸려 있는 전화기를 들었을 때, 김봉길이 다시 시선을 돌려 북미왕국 함대를 보고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왜인들의 무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그럼 저치들은 어떻게 나오려나?”

* * *

사츠마 번이 유구국을 감시하기 위해 보낸 구로사와는 북미왕국의 배들이 나하 항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아침을 먹다 말고 급히 밖으로 나왔고.

선착장 인근에서 북미왕국의 배를 한참 동안 구경하던 구로사와는 선착장에 접근하면서 점차 커지는 북미왕국의 배들을 보고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정말 거대하군.”

“그러게 말입니다. 북미왕국의 배가 다른 배와는 달리 무척 거대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긴 했습니다만 이건...마치 바다 위의 성과도 같군요.”

구로사와의 감탄에 사츠마 번이 유구 섬에 파견한 병사들의 지휘관인 무사 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정신을 차린 구라사와가 북미왕국의 배들을 보고 조금은 의아한 기색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헌데 북미왕국의 선단이 무슨 일로 이 나하 항에 온 거지?”

이에 그걸 자신이 알겠느냐는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던 무사 대장이 무언가 떠오르는 추측이 있었는지 입을 열었다.

“...아마 지나가던 길에 나하 항이 보여서 들르는 것이 아닐까요?”

“지나가던 길에?”

물론 북미왕국의 배가 가끔 인근 해역을 드나들긴 했다.

정확히는 이곳에서 북동쪽에 있는 아마미오 섬과 다네가 섬 사이의 해역을 지나친다는 사실은 사츠마 번에서도 파악하고 있었고.

다만 이 북미왕국의 배들은 언제나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했지, 이 나하 항까지 접근한 적은 없었기에 구로사와가 고개를 갸웃하자 무사 대장이 말했다.

“전에 말씀하셨잖습니까. 북미왕국이 조선을 도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덕분에 북미왕국은 청나라의 5개 항구에서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고.”

그 말에 구로사와는 무사 대장이 하려는 말을 눈치채고 되물었다.

“아. 자네는 저 함대가 청나라와의 교역을 위한 함대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이누 섬에서 청나라 남부로 이동하던 중에 들렀다?”

“그게 가장 가능성이 크지 않습니까? 뭐 북미왕국에서 갑자기 유구국을 점령하겠다고 함대를 보낸 것도 아닐 테고요.”

“흐음...”

이에 구로사와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유구국은 명목상 막부에 신속한 상태였고, 북미왕국과 막부와의 관계는 괜찮은 편이라 북미왕국에서 뜬금없이 막부에 신속한 유구국을 점령하겠다고 함대를 보내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해서 구로사와가 침음을 흘리며 팔짱을 끼고 점차 나하 항의 선착장으로 다가오는 북미왕국 선단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무사 대장이 고개를 갸웃하다 구로사와를 바라보고 말했다.

“어? 봉행님. 어째 북미왕국 선단의 분위기가 조금...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에 구로사와는 고개를 갸웃하다 무언가를 깨닫고 안색을 굳혔다.

“...그렇군. 너무 조용해.”

항해는 지루하고, 그렇기에 항구에 가까워지면, 갑판 위는 시끌벅적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북미왕국의 선단은 나하 항에 처음으로 방문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나하 항을 구경하려는 선원들이 한둘은 있을법했고.

헌데 6척의 배를 모두 살펴보아도, 갑판 위는 북적인다기보다는 적막만이 감돌았기에 구로사와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내심 긴장하자 무사 대장이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저기 보시지요.”

“음? 작은 화포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헌데 작은 화포 뒤에 선원들이 서 있는 것을 보면...”

무사 대장 역시 안색을 굳히며 말을 흐리자 구로사와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차하면 저 작은 화포를 발사할 생각이라는 거군. 물론 화포의 크기가 작으니 위력은 얼마 안 되겠지만...”

“북미왕국의 화포는 폭발하기에 위력이 꽤 강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후장식 화포라 장전 속도도 빠르다고 들었고요. 그러니...정말 저 화포가 발사된다면 피해가 클 겁니다.”

“쯧...저들을 상대할 수는 없겠지?”

구로사와의 질문에 무사 대장은 뭐하러 당연한 소릴 하느냐는 얼굴로 구로사와를 바라보았다.

딱 봐도 북미왕국의 배는 무척 거대했고, 그러니 저 배에 타고 있는 선원들도 한둘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헌데 이곳에 배치된 병력은 고작 200명뿐이니 어찌 저들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무사 대장의 얼굴을 확인한 구로사와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야...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군. 부디 저들이 지나가는 길에 들렀기를 바라면서.”

구로사와의 말에 무사 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사들을 소집시켰을 때, 북미왕국의 배들은 하나둘 나하 항의 선착장에 정박했고.

북미왕국의 배에서 선원들이 줄지어 내리고, 이 선원들의 손에 총이 들려있음을 확인한 구로사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선원들이 무장한 채로 내리고 있습니다. 이거 정말 심상치 않은데 어쩌지요?”

무사 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구로사와가 다시 눈을 뜨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조심스럽게 무장한 선원들에게 다가가는 유구국 관리를 보고 말했다.

“일단 내가 상황을 파악할 테니 자네는 경거망동하지 말게. 혹시 병사들이 돌발행동하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알겠나?”

“알겠습니다.”

그렇게 당부한 구로사와가 발걸음을 옮겨 한 선원과 대화하는 유구국 관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랍니까?”

“그게...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책임자가 하선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말만 반복할 뿐입니다.”

“그게 무슨...”

구로사와가 유구국 관리의 대답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도 계속해서 선원들이 하선하고 있었고, 이를 보고 구로사와가 유구국 관리에게 말했다.

“일단 책임자가 하선하기 전까지는 저들의 하선을 막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거기에 저들은 무장하고 있잖습니까.”

“당연히 저도 이야기했지요. 하지만 저들은 들은 채도 않고 책임자가 하선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하는 것을요.”

“끙...”

유구국은 궁궐을 지키는 병사들 외에 따로 이 나하 항을 지킬 병력이 없었고, 자신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츠마 번의 병사들로서는 그 유명한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저 북미왕국인들을 막을 수 없었기에 구로사와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유구국 관리와 대화했던 선원이 입을 열었다.

“저기 저분과 대화를 나눠보시지요. 그럼 사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유구국 관리와 구로사와는 선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둘 다 경악했다.

“어?! 저분은?!”

“헉! 구시카와?!”

선원이 가리킨 곳은 여러 사람이 무리를 지어 배에서 내리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은 유구국 관리의 복식을 입고 있어 얼굴을 확인하니 병에 걸려 두문불출하고 있던 구시카와 조슈였기에 유구국 관리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놀란 얼굴을 했고.

다만 구로사와는 구시카와 조슈의 얼굴을 확인한 후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구시카와 조슈는 현 유구국의 재상이자 섭정인 오자토 초료의 심복이나 다름없었고, 오자토 초료는 사츠마 번에 협조적인 인물이라 보긴 어려웠기에, 구로사와는 구시카와 조슈의 얼굴을 확인하고 구시카와 조슈가 오자토 초료의 밀명을 받고 북미왕국을 방문했음을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홀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저렇게 북미왕국의 병사들과 함께 돌아왔으니. 구시카와 조슈가 북미왕국에 어떤 제의를 한 것인지도 대충 짐작했고.

해서 배에서 내리며 자신을 보고 실실 웃고 있는 구시카와 조슈의 얼굴을 보고 구로사와가 속으로 탄식했다.

‘빌어먹을...오자토가 북미왕국을 끌어들였군. 이 사실을 어떻게든 주군께 알려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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