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5화
조용한 곰은 회의실로 들어오는 왜국 사절단의 대표인 홋타 마사토라를 자리에서 일어나 반기며 그를 자리에 앉히고 미리 준비해 둔 커피와 다과를 건네주며 말을 걸었다.
“새한성 구경을 잘 하셨습니까?”
“외무청의 배려 덕분에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더욱 공손해진 홋타 마사토라의 반응을 보고 조용한 곰은 기관총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준 것은 역시 잘한 일이라고 속으로 자축하면서 겉으로는 크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아닙니다. 그보다 제가 귀하를 초대한 것은 몇 가지 논의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경청하겠습니다.”
북미왕국은 왜국에서 요청하는 사절단의 새한성 방문을 허용하면서, 몇 가지 논의할 사항이 있다고 알렸고, 북미왕국은 빠른 논의를 위해 이번에 새한성을 방문하는 사절단의 대표는 쇼군을 대리해 북미왕국과 협상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 전권대사급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기에 홋타 마사토라는 조용한 곰이 바로 용건을 꺼내자 조금은 놀라면서도, 대체 북미왕국이 무엇을 논의하기 위해 전권대사를 파견해 달라고 한 것인지 궁금해 허리를 세우며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리자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귀하께서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국은 인구가 꽤 부족한 편입니다.”
“유럽에서 가져온 전염병 때문에 인구가 대폭 줄어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북미왕국의 인구가 영토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에 홋타 마사토라가 대꾸하자 조용한 곰이 씁쓸히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맞습니다. 덕분에 북미왕국의 인구는 영토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고, 그 때문에 아국은 인구를 늘리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타국에서 이주민을 받는 거지요.”
조용한 곰이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홋타 마사토라는 북미왕국이 무엇을 논의하려는지 깨닫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우리 일본의 백성들을 이주민으로 받고 싶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듣자니 일본은 토지가 부족할 정도로 인구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일본의 백성 중 일부가 아국으로 이주한다면, 서로가 좋지 않겠습니까?”
조용한 곰의 말대로 왜국은 식량 생산량보다 인구가 많은 편이었고, 그 때문에 번주는 토지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산의 나무를 베어 밭으로 개간하면서 당장의 식량 생산량은 늘어났을지언정, 시간이 흐르며 토사가 흘러내려 산 밑의 밭까지 묻혀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식량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나마 북미왕국과의 교역으로 식량을 어느 정도 수입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분명 민란이 발생했었을 정도였고.
그러니 북미왕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북미왕국에 도움을 주고 호의를 얻는 것도 괜찮아 보였지만, 문제는 막부가 허락한다고 해서 인두세를 걷기에 백성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번주들이 과연 백성들이 이주하는 것을 허용할까 싶었다.
“으음...그렇긴 합니다만 이건 막부에서 허락한다고 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에 조용한 곰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 물론 아국에서도 귀국의 정치체계가 독특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막부에서 저희가 각 번과 협상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다면 저희가 알아서 각 번과 협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용한 곰의 말은 왜국의 막번체계를 이해하고 있는 만큼 북미왕국이 각 번주들과 개별적으로 협상할 테니 막부에서 이를 방해하지만 말아 달라는 뜻이었는데 북미왕국의 생각과는 달리 이건 막부에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각 번의 번주들은 세금을 내는 백성들이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을 테니, 북미왕국은 번주들에게 반대급부로 무언가를 줄 것이 분명했다.
번주들이 기꺼이 세금을 내는 백성을 북미왕국으로 이주시킬 정도의 대가를.
더군다나 이러한 거래를 통해 각 번이 직접 북미왕국과 접촉하게 된다면, 각 번은 북미왕국과 교역을 통해 세력을 키울 것이 뻔했다.
예전에 아이누인들과의 충돌로 막대한 피해를 보고 빚더미에 깔린 도호쿠 지방의 번주들의 아우성에 어쩔 수 없이 북미왕국의 교역을 허락했더니, 북미왕국과의 교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기며 화려하게 부활한 것을 넘어 세력을 계속 키우고 있었고, 이 때문에 막부에서는 도호쿠 지방의 번주들을 견제하기 위해 번주들에게 넘긴 북미왕국과의 교역권을 회수해야 한다는 소리까지 나오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다만 인구 문제는 북미왕국의 약점인 만큼, 이 이주 문제는 북미왕국이 도와달라고 손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는데 여기서 이 손을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홋타 마사토라는 한참을 고민했고.
그러다 홋타 마사토라는 유럽 대사들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잉글랜드와 에스파냐가 식민지 백성을 북미왕국으로 이주시키는 대신 짭짤한 이득을 얻고 있다며 웃던 것을 떠올리고 눈을 번쩍였다.
‘이거다. 북미왕국과의 거래는 막부에서 하고, 대가 중 일부만 넘겨서 번주들의 불만을 적당히 달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홋타 마사토라는 커피를 마시며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조용한 곰을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만, 막부의 입장에서 각 번이 북미왕국과 직접 협상하는 것을 허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말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막부에서 나서서 이를 돕겠습니다.”
홋타 마사토라의 말에 조용한 곰이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 그렇다면야 아국은 오히려 편해서 좋습니다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맡겨주시지요. 대신 백성을 이주시키면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걷던 번주들이 불만을 터트릴 겁니다. 그러니 이를 달랠 필요가 있는데...”
홋타 마사토라가 말을 흐리며 기대하는 눈빛으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자 조용한 곰은 왜 홋타 마사토라가 막부에서 나서겠다고 나선 건지 이해하고 쓰게 웃었다.
‘막부에 적대적인 번주들의 백성을 우리에게 넘기고 돈은 자신들이 챙길 속셈인가? 뭐 상관없으려나?’
“아. 걱정하지 마시지요. 번주들을 달랠 수 있게 대가를 지급하겠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예상대로 조용한 곰이 대가를 지급하겠다고 이야기했기에 홋타 마사토라가 반색하자 조용한 곰이 진정하라는 듯 손짓했다.
“예. 자세한 협상은 일단 실무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고...저희는 다른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지요.”
“다른 문제라면?”
“유구국을 아시지요?”
조용한 곰이 갑자기 유구국을 거론하자 홋타 마사토라는 뜬금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 유구국이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왜 북미왕국에서 유구국을 거론하냐는 얼굴을 하고 있는 홋타 마사토라를 보고 조용한 곰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에 유구국이 아국의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해서 아국은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고요.”
조용한 곰의 말은 협상하자는 것이 아니라 통보에 가까웠기에, 홋타 마사토라는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급히 입을 열었다.
“자...잠시만요. 유구국이 단순히 북미왕국을 상국으로 모시겠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북미왕국의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이야기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국은 독립국인 유구국이 왜구들에 시달린 나머지 아국에 보호를 요청했다고 판단해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고요. 해서 유구국을 보호하기 위한 함대도 곧 파견할 생각입니다.”
원래 조용한 곰은 유구국 문제를 협상을 통해 풀어나갈 생각이었지만, 북미왕국의 군사력을 확인한 홋타 마사토라가 은근히 저자세였기에, 일단 통보하고 나중에 막부가 불만을 품지 않도록 달래는 것이 빠르게 협상할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해 계획을 수정하고 이렇게 통보하자 홋타 마사토라는 신음을 흘렸다.
“으음...”
처음 조용한 곰이 유구국을 거론했을 때는 자신들이 조청전쟁의 결과를 확인하고 북미왕국과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사절단을 보낸 것처럼, 유구국도 북미왕국을 상국으로 모시는 대신 교역을 하려는 것인가 싶었지만, 조용한 곰의 말을 들어보니 아예 북미왕국의 밑으로 들어가겠다는 의사를 보였고, 북미왕국으로서는 이를 반대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냥 받아들인 것 같았다.
즉, 이미 북미왕국은 유구국을 속국으로 받아들였으니 자신들이 이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면 북미왕국에 시비를 거는 것과도 같고, 이번에 확인한 북미왕국의 군사력을 생각하면 이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기에 홋타 마사토라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다만 유구국은 막부에도 조공을 바치고 있었기에 유구국이 완전히 북미왕국의 속국이 된다면, 막부는 그동안 받아왔던 조공을 더는 받지 못하게 되는 만큼, 이번 사절단의 대표인 자신도 질책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떠올린 홋타 마사토라는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때 잠시 침묵하며 홋타 마사토라가 생각할 시간을 주었던 조용한 곰은 그의 안색이 썩 좋지 않자 슬슬 그를 달랠 때라고 판단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유구국은 그동안 청나라와 귀국에 이중으로 속국을 자처하며 조공을 바쳤다고 하던데...유구국이 아국의 보호국이 되어 버리면 귀국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겠지요.”
이에 홋타 마사토라는 기회다 싶어 급히 입을 열었다.
“그...그렇습니다. 아국의 영토에선 사탕수수 재배가 어려운지라...”
“예. 해서 말인데...막부에서 입은 피해는 아국이 보상하겠습니다. 그러니 유구국이 아국에 보호국이 되는 것을 인정해주셨으면 합니다.”
“보상이라면?”
“유구국이 막부에 조공으로 바쳤던 설탕의 2배를 20년간 막부에 지급하겠습니다.”
“헉! 20년 동안 2배나요?”
“그렇습니다. 그 정도면 아국도 귀국에 충분히 배려해드린 것 같습니다만...”
북미왕국의 입장에선 플로리다에서 설탕이 쏟아지고 있었기에, 그동안 유구국이 막부에 조공으로 바친 설탕의 양은 보잘것없었다.
거기에 유구국은 막부보단 사츠마 번에 더 많은 조공을 바쳐야 했으니.
“으음...”
그리고 이러한 북미왕국의 제안을 듣고 홋타 마사토라는 고민했지만, 이 정도면 북미왕국에서도 적당히 막부의 체면을 세워준 만큼,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유구국은 독립국이고, 이들이 결정을 내린 것을 가지고 저희가 왈가왈부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요.”
홋타 마사토라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유구국 문제는 막부 뿐만 아니라 인근의 사츠마 번도 관련되어 있었기에 이를 말해야 하나 싶어 고민하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귀하께서 신형 전선에 탑승해보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조용한 곰이 신형 전선을 언급하자 홋타 마사토라는 고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기대 어린 눈초리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아. 그랬습니다만...”
그런 홋타 마사토라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실소하며 말했다.
“유구국을 보호하기 위해 신형 전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파견할 생각입니다. 돌아가실 때 신형 전선을 타고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허허허. 유구국에 신형 전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파견하시겠다고요?”
“그렇습니다.”
자신을 보고 빙긋 웃는 조용한 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 홋타 마사토라는 북미왕국은 유구국이 왜구에 시달렸다고 언급했던 것을 떠올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 북미왕국은 이미 유구국과 사츠마 번의 관계를 알고 있었구나. 그리고 사츠마 번을 왜구로 칭한 것과 신형 전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보낸다는 것을 보면 이권을 주어서 달랠 것 같지는 않으니...그냥 두고 보는 것이 낫겠군.’
어차피 사츠마 번은 막부에 적대적인 만큼, 모른 척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홋타 마사토라가 자신을 보고 빙긋 웃는 조용한 곰을 보고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