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3화
“포르투갈 외교관이 결국 중재 요청을 했다고?”
정성국이 조용한 곰의 보고에 눈을 빛내자 조용한 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포르투갈의 외교관이 저희의 제안에 조금이나마 고민할 줄 알았는데 신식 소총 수입 건이 묶여 있어서 그런지 바로 결정을 내리고 하루라도 빨리 앙골라 장가를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는군요.”
“하하하. 그래? 하루라도 빨리 앙골라 장가와 협상을 끝내야 신식 소총을 수입할 수 있으니까?”
“예. 특히 웅크린 늑대가 협상을 완료하고 포르투갈 외교관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신식 소총 5천 자루와 함께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하니 바로 결단을 내렸다는군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호오...생각보다 리스본의 상황이 심각한 모양이네?”
“그런 것 같습니다. 웅크린 늑대가 보기에 포르투갈 외교관은 내전까지도 걱정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최대한 빠르게 일을 진행해달라고 했습니다.”
북미왕국이 내건 조건도 수락했고, 북미왕국이 원하는 대로 중재해주는 대가까지 제대로 지급할 테니, 최대한 빠르게 앙골라 장가를 협상장에 앉혀 달라고 요구했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실소하며 말했다.
“그렇다면야 시간 끌 필요는 없겠지. 바로 앙골라 장가에 외무청 관리를 보내 사정을 알리고 포르투갈과 앙골라 장가의 협상을 중재하도록 하게.”
분명 줌비나 앙골라 장가의 백성들이 포르투갈에 원한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 앙골라 장가는 북미왕국에 받은 도움이 많으며, 줌비도 당장 브라질 북부 해안 지역에 있는 포르투갈 세력을 공격하는 일보다는 막 건국한 앙골라 장가의 기틀을 세우고 내부를 정비하는 일이 더욱 시급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테니 설득은 쉬울 거라고 생각한 정성국이었고.
조용한 곰 역시 그런 정성국의 생각에 동의했기에 별 것 아니라는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그리고 협상이 끝나면 바로 아마존 강 하구에 거점 항구를 건설할 수 있도록 개발청에 이 사실을 전해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하게.”
협상 당시 웅크린 늑대는 휴고의 조급함을 눈치채고 정성국이나 조용한 곰이 생각한 것보다 넓은 지역을 중재의 대가로 챙겼다.
그런 만큼 이 지역을 개발하는 것도 생각보다 큰일이 될 것은 분명했기에 조용한 곰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거 개발청장이 한소리 하겠군요.”
그렇게 웃는 조용한 곰을 보고 정성국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존 강 하구를 확보한 이상 개발청과 마찬가지로 외무청도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 할 테니까.
“자네가 그렇게 웃을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예? 그게 무슨...”
자신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조용한 곰을 보고 정성국이 씩 웃었다.
“아마존 강 하구에 거점을 만들면, 탐사대를 신설할 생각이네.”
“탐사대요? 설마...”
“그래. 아마존 강 유역에 사는 원주민들과 접촉할 생각이야. 아. 물론 이들을 북미왕국에 합류시킬 생각은 없네만...정기적으로 교류하면서 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야. 그러니 외무청에서도 고생 좀 해줘야겠지.”
정성국이 웃으며 일거리를 대폭 떠넘기자 조용한 곰은 밑의 관리들에게 불평을 꽤나 듣겠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끙...알겠습니다. 전하. 나름대로 준비해두도록 하지요.”
그렇게 포르투갈과 관련된 보고를 마무리한 조용한 곰은 다른 용건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런던의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러시아 차르국에서 정변이 일어났답니다.”
“정변? 설마 차르의 자리를 놓고 말인가?”
정성국이 눈을 빛내며 러시아 차르국의 일에 관심을 두자 조용한 곰이 머릿속으로 런던에 나가 있는 북미왕국 대사가 보낸 보고서를 떠올리며 러시아 차르국의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일단 첫째 황후의 자식인 이반은 몸이 병약하고 정신도 온전하지 않아 차르의 자리를 감당하긴 어려운 터라 둘째 황후의 자식인 표트르가 귀족과 동방 정교회의 지지를 얻어 차르의 자리에 올랐습니다만...”
조용한 곰이 말을 흐리자 정성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설마 정신도 온전하지 않은 이반이 정변을 일으켰다는 건가?”
정성국은 혹시 이반을 지지했다는 귀족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이반을 내세우고 정변을 일으킨 건가 의심하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이반의 누이인 소피아 공주 움직였다는군요.”
“허어...공주가 말인가? 설마 차르의 자리를 노리고?”
이 시대에 여성이 권력을 잡기 위해 움직였다는 이야기는 꽤 놀라웠기에 정성국이 바로 되묻자 조용한 곰이 그건 아니라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것보단 소피아 공주는 새어머니라 할 수 있는 둘째 황후를 무척 싫어한 모양입니다. 그러니 둘째 황후의 뱃속에서 태어난 이복동생인 표트르가 차르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고 이반을 지지하던 귀족들을 움직여 반정을 일으켜 표트르 1세를 지지하던 귀족들을 모두 숙청하고 자신의 동복동생인 이반을 차르로 추대했다는군요.”
“그럼 표트르 1세는?”
“명목상의 차르 자리는 유지한 모양입니다. 공동 통치자라고 해야 할까요? 다만...지지해주는 귀족들도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10살짜리 아이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흐음...”
조용한 곰의 말처럼 훗날 표트르 대제라고 불라는 표트르 1세는 아직 아이에 불과했다.
그러니 현재 러시아 차르국을 장악한 이복 누나인 소피아 공주를 상대할 수는 없었고.
해서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그의 귓가에 조용한 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소피아 공주가 장악한 크렘린에 계속 있다가는 목숨이 위험해질 것을 우려한 둘째 황후가 표트르 1세를 크렘린에서 내보낸 모양입니다. 그래서 현재 표트르 1세는 시골 마을에서 지내는 모양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 말에 정성국은 눈을 빛냈다.
정성국이 표트르 대제의 일생을 세세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표트르 대제가 어릴 적 모스크바가 아닌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는 것과 이 시골 마을에서 외국인 기술자들, 상인들을 만나며 당시 최신 기술이라 할 수 있는 산수, 기하학, 축성술, 항해술, 전술 등을 배웠고, 이 덕분에 러시아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버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
‘나는 계승권 순위가 낮아서 모스크바가 아닌 시골에서 자란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반란 때문이었군. 그보단 여기까진 전생과 비슷한 것 같은데 그럼 몇 년 후 표트르 1세가 장성하면 전생처럼 섭정인 소피아 공주를 몰아내고 러시아 차르국을 다시 장악할 수 있으려나? 그렇다면 차라리...’
그렇게 정성국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이 표트르 1세에 관심을 보이는 정성국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다 순간 정성국의 속셈을 지레짐작하고 기겁하며 질문을 던졌다.
“설마...러시아 차르국의 일에 개입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시지요?”
조용한 곰은 정성국이 러시아 차르국을 꽤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직 러시아 차르국을 견제하기 위해 스웨덴을 지원할 생각도 했고, 오스만 제국과 관계를 맺은 것도 결국 러시아 차르국을 견제하기 위함이었으니.
그만큼 러시아 차르국의 잠재력, 혹은 성장 가능성을 경계하는 정성국이니만큼, 조용한 곰은 혹시 정성국이 거의 유배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표트르 1세와 접촉하고, 그를 돕는 대신 러시아 차르국을 아예 북미왕국의 영향력 아래에 놓으려는 것이 아닌가 싶어 급히 질문을 던지자, 정성국은 그런 조용한 곰의 반응에 진정하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설마...괜히 남의 나라 일에 깊이 개입할 생각은 없네.”
“휴우. 그렇습니까?”
정성국의 대답에 조용한 곰이 안도하자 정성국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이 기회에 표트르 1세에게 조금만 투자해서 약간의 호의를 사두는 것도 괜찮아 보여서 말이네.”
그 말에 조용한 곰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투자라...혹시 전하께서는 표트르 1세가 성인이 된 이후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래. 소피아 공주가 섭정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지만, 미래는 또 모르는 일 아닌가.”
지금이야 소피아 공주가 러시아 차르국의 권력을 장악했지만, 표트르 1세가 성장한 이후에는 또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조용한 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은 어려울 때 자신에게 손을 내민 자를 잊지 않는 법이니만큼, 표트르 1세가 다시 권력을 잡을 가능성을 생각해 약간의 투자를 해둔다면, 훗날 표트르 1세는 북미왕국에 호의를 가질 테니 나쁠 것은 없어 보였고.
다만 혹시나 해서 표트르 1세와 접촉했다가 이 사실이 현재 러시아 차르국을 장악한 소피아 공주에게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엔 여러모로 골치가 아파질 것이 분명한 터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조용한 곰이 말했다.
“흐음...알겠습니다. 허면 위장 상단을 움직여 정보를 파악한 후 조심스럽게 표트르 1세와 접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괜히 소피아 공주를 자극할 필요는 없으니까.”
정성국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고 정성국과 조용한 곰은 고개를 돌렸다가 집무실로 들어오는 이를 확인하고 반갑게 맞이했다.
“어? 장인어른께서 여긴 어쩐 일로...?”
“허허허. 잠깐 궁에 들른 김에 전하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그래요? 일단 앉으시지요.”
정성국이 푸른 안개에게 자리를 권할 때, 조용한 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보고할 것은 다 했으니까요.”
조용한 곰은 푸른 안개가 왕실의 일로 찾아왔다고 생각해 푸른 안개가 정성국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자리를 비워주려 하자, 오히려 푸른 안개가 그런 조용한 곰을 막았다.
“아닙니다. 청장께서도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니 바쁜 것이 아니라면 앉아 계시지요.”
“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조용한 곰이 다시 엉덩이를 의자에 대면서 의아한 얼굴로 푸른 안개를 바라보자 푸른 안개가 입을 열었다.
“방금 에스파냐 대사와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만...대화 도중에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유럽 각국이 청나라를 노리고 있답니다.”
“예?!”
“헉!”
푸른 안개의 이야기에 정성국과 조용한 곰은 기겁했고, 그런 둘의 반응에 푸른 안개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전이라면 감히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청나라의 내부 사정이 좋지는 않아도, 청나라의 국력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나라는 감히 청나라와 맞서기는 불가능하니까요. 허나 상황은 변했고, 이 새한성에 있는 대사들은 북미신문을 통해 청나라가 이번 조청 전쟁에서 얼마나 피해를 보았는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잖습니까. 그러니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푸른 안개가 여기까지 말하자 정성국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급히 되물었다.
“허면 유럽 각국이 연합해 청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겁니까?”
전생에서 1차 아편 전쟁을 통해 생각과는 달리 청나라가 허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 유럽 각국은 청나라를 뜯어먹기 위해 연합해 청나라를 공격했고, 결국 청나라를 반신불수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을 잘 아는 정성국은 이번 조청 전쟁으로 인해 청나라의 약세를 인지한 유럽 각국이 연합해 청나라를 침공해 청나라의 항복을 받아낸 후, 이권을 챙기려 하지 않을까 싶어 묻자 푸른 안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유럽 내에서도 대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터라 섣불리 병력이나 함대를 뺄 수도 없을뿐더러, 설사 그게 가능하더라도 유럽에서 청나라까지 병력을 파견하는 일이 어디 쉽겠습니까.”
푸른 안개의 대답에 정성국이 안도하는 사이 유럽 대사들과 꽤 친분이 있음에도 이러한 이야기를 처음 듣는 조용한 곰이 미간을 찡그리며 질문했다.
“그러면...청나라 입장에선 반란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주나라와 동녕국을 뒤에서 지원하겠다는 겁니까?”
“비슷합니다. 유럽 각국은 동녕국과 주나라에 화약, 머스킷, 화포 같은 각종 무기를 판매해 두 나라를 도와 청나라를 압박할 생각이라더군요.”
이에 정성국이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던졌다.
“유럽에서 한창 전쟁 중인데 그러한 군수 물자를 판매한다고요?”
“식민지에서도 어느 정도는 생산할 수 있으니까요.”
“아...”
정성국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을 때, 조용한 곰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후우. 현 청나라의 상황에서 유럽 각국이 주나라와 동녕국에 무기를 팔기 시작하면, 다시 균형이 깨질 수도 있겠군요.”
청나라는 북미왕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 이후 곧바로 북방과 압록강 유역에 배치한 병력을 빼서 시급한 외몽골 지역과 일부 지역에 투입했고, 덕분에 겨우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헌데 이런 상황에서 두 나라에 화약 무기가 대거 흘러 들어간다면, 균형은 다시 깨질 수밖에 없었기에 조용한 곰이 한숨을 내쉬자 푸른 안개가 공감한다는 얼굴로 말했다.
“예. 그럴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청나라 곳곳에 개항장을 얻은 아국의 이권이 상실될 우려가 있고요.”
그 말에 조용한 곰이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을 때, 정성국이 말했다.
“그렇다고 주나라와 동녕국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우리가 청나라를 도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일단은 상황을 조금 지켜보지요.”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