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8화
냉방 장치가 가동되는 시원한 집무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정성국은 땀을 뻘뻘 흘리며 나타난 조용한 곰을 보고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이고. 땀이 범벅이군. 자네 괜찮나?”
“어휴. 오늘은 정말 덥군요. 그저 마차를 타고 왔을 뿐인데 이렇게 더울 줄은...”
“일단 앉아서 땀을 좀 식히게.”
이에 조용한 곰은 정성국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티테이블에 앉아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고 있을 때, 정성국이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과 꺼내면서 조용한 곰을 살짝 타박했다.
“이렇게 더운 날에는 그냥 전화로 보고하게. 굳이 집무실까지 오지 말고.”
“하하하. 정말 멀리 있는 거라면 모를까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럼 해가 떨어질 때쯤 오던가...쯧쯧. 일단 아이스크림부터 먹고 열을 좀 식히게.”
“감사합니다. 전하.”
정성국이 아이스크림이 가득 담긴 컵을 조용한 곰 앞에 내려놓자 조용한 곰은 고개를 꾸벅인 후 숟가락을 빠르게 놀렸고, 잠깐 사이에 아이스크림을 해치운 조용한 곰은 웃으며 말했다.
“어째 왕실 숙수가 만드는 아이스크림은 날이 갈수록 맛있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렇지? 나도 그렇고 애들도 아이스크림을 꽤 좋아하다 보니 왕실 숙수들이 새로운 아이스크림 개발에 매진하고 있어서 말이야. 그보다 무슨 보고를 하려고 이 한낮에 나를 찾아온 건가.”
정성국이 용건을 묻자 조용한 곰은 자세를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방금 새진주에 도착한 내용인데 팔마레스의 흑인들이 리우데자네이루를 점령하고 리우데자네이루 인근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합니다.”
“허. 벌써 리우데자네이루까지 장악했다고?”
살바도르를 점령한 이상 그 남쪽의 항구들을 쉽게 점령하리라는 것은 예상했다.
하지만 단순히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점령하고 안정시키는 것은 다른 문제였고 시간이 꽤 걸릴 수밖에 없었다.
헌데 살바도르를 점령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살바도르에서 약 1200km 떨어진 리우데자네이루까지 점령하고 완전히 장악했다고 하니 정성국은 팔마레스 흑인들의 쾌속한 진격에 놀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이 슬쩍 미소지으며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방어하는 병력도 없고, 북쪽에서 나타났다는 것과 팔마레스의 흑인들이 타고 있는 배가 아국의 배이다 보니 이미 살바도르가 함락되었다는 것을 짐작한 포르투갈인들은 섣불리 맞섰다가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흑인들을 자극할까 무척 우려한 모양입니다.”
“그래?”
“예. 그리고 포르투갈인들은 노예 출신이었던 흑인들이 자신들을 적대하며 재산을 몰수하고, 자신들을 노예로 삼을까 걱정했는데, 팔마레스의 흑인들은 오히려 무력을 앞세우기보단 포르투갈인들을 설득하려 했고, 자신들에게 반항하지 않고,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노예들을 모두 해방하기만 하면, 다른 재산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니 순순히 이 제안을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그거 다행이군.”
정성국은 무의미한 피가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이 대꾸했다.
“그렇지요. 그리고 이렇게 항구를 점령한 팔마레스의 흑인들은 갑작스럽게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당장 먹을 것과 잠자는 장소를 고민해야 하는 흑인들, 그리고 원주민들을 모두 고용해 세력을 키워 항구와 인근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고, 그 이후엔 병사 일부만 남겨놓고 남하해 다시 이를 반복하니...빠르게 확장하면서도 안정적으로 해안가를 장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허. 그 정도면 남미 지역은 줌비에게 완전히 맡겨도 되겠어.”
줌비는 노예 시절 포르투갈 수도사 밑에서 말과 글을 배우고 수많은 서적을 읽었기에 꽤 영리하다는 평가를 들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포르투갈인들의 반발을 잘 무마하면서 빠르게 점령지를 안정시키는 것은 놀라울 정도였기에 정성국이 감탄하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다만 팔마레스의 흑인들이 이렇게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보니 에스파냐가 조금 우려하고 있습니다.”
조용한 곰이 갑자기 에스파냐를 입에 올리자 정성국은 고개를 갸웃하다 무언가 떠오른 것인지 인상을 썼다.
“음? 에스파냐가? 아...설마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들먹이며 브라질 내륙 지역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려는 것은 아니지?”
원래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르면 포르투갈이 건설한 브라질 식민지의 대다수는 에스파냐의 땅이 된다.
다만 에스파냐가 안데스 산맥에 막혀있는 사이 포르투갈이 아마존 하구를 따라 내륙으로 진출하면서 곳곳에 깃발을 꽂았고, 여기에 필리페 2세 시절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동군연합으로 묶이면서 포르투갈이 건설한 식민지도 결국은 필리페 2세의 것이었기에 에스파냐는 포르투갈이 내륙으로 진출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고.
덕분에 포르투갈은 거대한 브라질 지역을 식민지로 건설할 수 있었고, 포르투갈이 독립 전쟁 끝에 떨어져 나가면서 에스파냐가 꽤 커다란 손해를 보게 된 셈이었다.
다만 개척할 곳은 많기에 에스파냐는 굳이 포르투갈과 식민지에서 싸워 브라질 지역을 되찾을 생각은 하지 않았고.
헌데 갑자기 북미왕국이 등장했고, 북미왕국은 에스파냐와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북미대륙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유명무실해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인정했기에, 에스파냐가 혹시 이를 빌미로 브라질 지역을 노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정성국이 인상을 찌푸리자 조용한 곰이 씩 웃었다.
“물론 저희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인정하고는 있습니다만 브라질 지역의 경우는 상황이 좀 다르죠. 에스파냐는 포르투갈이 서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기에 이미 브라질 내륙 지역의 권리를 포기한 것과 같고, 그렇기에 이 지역을 주장해봐 저희가 무시하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안도하며 되물었다.
“그거 다행이군. 그러면 뭐가 문젠데?”
“팔마레스의 흑인들이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해 페루 부왕령의 영역을 침범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겁니다.”
“페루 부왕령의 영역이라면...”
물론 팔마레스의 흑인들이 빠르게 확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페루 부왕령의 영역 대부분은 안데스 산맥 서쪽에 국한되었다.
해서 정성국은 이런 에스파냐의 걱정이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자 조용한 곰은 가져온 보고서를 펼쳐 보고서에 첨부된 남미 지역이 그려져 있는 지도에서 전생의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삼각강을 가리켰다.
“이 라플라타 강 인근 지역이 일단은 페루 부왕령의 영역이라서 말입니다.”
“아. 이곳 말인가? 헌데 이곳과 리우데자네이루까지는 꽤 거리가 떨어져 있잖아? 왜 벌써 난리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라플라타 강 유역까지는 대략 1800km가량 떨어져 있었으니, 정성국의 입장에서는 에스파냐 대사가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조용한 곰이 말했다.
“한 달 만에 살바도르에서 리우데자네이루까지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그러니 한두 달 후면 팔마레스의 흑인들이 라플라타 강 인근까지 진출할 수도 있다고 보고 걱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조용한 살짝 얼굴을 찌푸리자 정성국이 되물었다.
“그리고?”
“듣자니 이곳은 에스파냐인들과 원주민들의 마찰이 꽤 심하다고 합니다. 식민지 항구를 건설하겠다고 라플라타 강 유역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내쫓았고, 이에 분노한 원주민들이 에스파냐가 건설한 항구나 마을을 공격해 불태운 적도 있고요. 헌데 아국은 원주민들에게 극히 호의적이고 이를 에스파냐도 잘 알고 있다보니...”
그제야 정성국은 상황을 이해하고 씁쓸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팔마레스의 흑인들을 지원해 라플라타 강 인근의 원주민들을 도울까 걱정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해서 아국이 페루 부왕령의 원주민들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팔마레스의 흑인들과 불가침 조약을 맺을 수 있도록 중재해주었으면 하는 눈치입니다만...어찌할까요.”
이에 정성국은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흐음...솔직히 나는 이 라플라타 강 유역의 원주민들이 에스파냐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고 하니 이들을 도와주고 싶긴 하네. 하지만 에스파냐는 우리에게 우호적인 국가라 개입하긴 어렵지 싶군.”
정성국의 현실적인 대답에 조용한 곰은 내심 안도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포르투갈이야 노예무역을 계속한다는 구실로 외교 관계마저 단절해버렸기에 저희가 팔마레스의 흑인들을 대놓고 지원해도 유럽 각국은 별다른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에스파냐는 우리의 호의를 얻기 위해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노예 제도마저 폐지한 터라 라플라타 강 유역의 원주민들을 지원하면 분명 유럽 각국은 아국을 무척이나 경계할 겁니다. 그럼 여러모로 곤란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 그러니 에스파냐 대사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페루 부왕령의 원주민들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고, 팔마레스의 흑인들이 페루 부왕령과 불가침 조약을 맺도록 줌비를 설득해 주게.”
“알겠습니다.”
에스파냐인들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고, 줌비는 당장 포르투갈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니 페루 부왕령과 불가침 조약을 맺으라는 요구를 줌비가 거절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한 조용한 곰이 바로 대답하자 정성국이 잠깐 고민하다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외무청에서 이 라플라타 강 유역의 원주민들과 접촉해보게.”
이에 조용한 곰은 잠깐 움찔했지만, 정성국이 라플라타 강 유역의 원주민들에게 무기를 쥐여주려고 외무청을 움직일 리는 없었기에 정성국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조용한 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으음...전하께서는 라플라타 강 유역의 원주민들을 브라질 지역으로 이주시킬 생각이십니까?”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향을 포기하기는 어렵겠지만...그 편이 나을 듯싶은데?”
에스파냐 대사가 예상한 대로 팔마레스의 흑인들은 해안가를 따라 빠르게 확장하고 있는 만큼, 얼마 안 가 라플라타 강 인근까지 영역을 확장할 테니, 그때 에스파냐와 싸우던 원주민들을 이주시켜 분쟁을 없애보겠다는 정성국의 생각에 조용한 곰은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에스파냐 역시 라플라타 강 인근을 안정시킬 수 있으니 이를 거절하지는 않으리라고 보았고.
해서 조용한 곰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에스파냐 대사와 그 문제도 상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보고할 것은 다 보고했느냐는 눈빛을 보내자, 조용한 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아차 하는 얼굴로 말했다.
“아. 그리고 말입니다. 런던에서 흥미로운 소식을 입수했습니다.”
“무슨 소식?”
“러시아 차르국의 차르가 사망한 모양입니다.”
조용한 곰의 보고에 정성국은 순간 눈을 빛내며 질문을 던졌다.
“표도르 3세가 죽었다고? 꽤 어린 친구로 알고 있는데?”
“예. 20세에 불과했으니까요. 다만 썩 건강한 편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흠. 그렇게 젊다면...후계는?”
이에 조용한 곰은 가져온 보고서를 정리하면서 입을 열었다.
“자식이 없는 터라 아마 동생 중 한 명이 차르로 즉위할 것 같습니다. 다만 한 명은 표도르 3세의 동복동생이고, 한 명은 이복동생이라 런던에서는 차르의 자리를 놓고 권력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예상하더군요.”
“그렇단 말이지?”
표도르 3세가 사망하면서 그 동생이 차르의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표도르 3세의 이복동생이 바로 그 유명한 표트르 대제였기에 정성국은 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만 아직 표트르 대제는 어린아이일 뿐이고, 이미 역사가 뒤틀린 만큼, 표트르 대제가 전생처럼 권력을 잡고 러시아 차르국을 일신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기에 정성국은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흐음...알겠네. 런던에 나가 있는 대사에게 말해 러시아 차르국의 소식을 더욱 수집해보라고 하게. 그리고 러시아 차르국의 차르가 결정되면 바로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보고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곰을 보고 정성국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리고 언제까지 팔마레스의 흑인들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 줌비에게 제대로 된 국명을 정하라고 하게.”
“하하하. 그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