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화
청나라의 예부 상서와 조선의 예조판서가 압록강 인근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과 청나라와의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나자 조선 지원군 사령관인 카무이쿠르는 그동안 먼 이국의 땅에서 고생한 지휘관, 그리고 병사들을 위해 비축해두었던 보급 물자를 넉넉히 풀라고 지시했고.
덕분에 병사들은 오랜만에 마음껏 술을 마시며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었고, 이런 떠들썩한 분위기는 지휘관들이 자리한 회의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고생했네.”
카무이쿠르가 술잔을 내려놓고 회의실에 앉아 있는 지휘관들을 보고 입을 열자 지휘관들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씩 했다.
“아닙니다. 뭐 고생이랄 것까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전쟁 초기에나 조금 고생했지, 그 외에는 뭐...”
“오히려 고생은 3함대가 했지요.”
“글쎄? 걔들도 해전 몇 번 치른 후에는 아무도 없는 항구에 포탄만 쏘는 게 전부라 심심하다고 투덜거리던데?”
그리고 이런 지휘관들의 대답을 듣고 카무이쿠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지.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서 휴가 없이 1년 반을 생활해야 했는데 그 정도면 충분히 고생한 것이 아닌가.”
이에 지휘관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을 때, 지휘관 중 가장 선임인 조병수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하하하. 그건 또 그렇지요. 헌데 공식적으로 전쟁이 끝났으니 저희는 바로 철수하는 겁니까?”
“그렇네. 본국에서 명령이 내려왔어. 아이누 탐사대를 제외하면 바로 아이누 섬으로 복귀하라고. 아. 자네들은 본국으로 복귀하라는 명령도 내려왔고.”
카무이쿠르의 대답에 아이누 탐사대의 지휘관들이 움찔하며 서로를 바라보다 카무이쿠르에게 질문을 하려 했지만, 굳건한 바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음...사령관님. 바로 복귀해야 합니까?”
“조금은 여유가 있네만...왜 그러나?”
카무이쿠르의 질문에 굳건한 바위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조선을 조금 둘러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이들이 막 조선에 도착했을 때는, 전쟁을 앞둔 시기였기에 다른 곳에 정신을 팔 수가 없었고, 그 이후에는 전쟁 중이었기에, 아무리 대치 중이었어도 주둔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해서 이들은 조선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고, 그렇기에 일부 지휘관들은 굳건한 바위와 비슷한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묘하게 아쉬워하는 눈치이자 카무이쿠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예?”
“전하께서 직접 군사청에 이야기했다는군. 이곳에 파견된 조선 지원군은 목숨을 걸고 조선을 지켰는데, 그렇게 지킨 조선을 직접 둘러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야.”
이에 굳건한 바위와 일부 지휘관들은 눈을 빛내며 카무이쿠르를 바라보았고.
“그럼...?”
카무이쿠르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서 우리를 수송할 3함대는 도중에 평양과 제주에 들러 하루를 보낼걸세. 그때 잠시나마 조선을 둘러볼 수 있겠지. 그뿐만 아니라 전하께서는 병사들이 항구에서 기념품이나 조선의 음식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따로 활동비마저 지급해주셨으니 기대하게나.”
“오! 그거 정말 기대되는군요!”
“하하하. 병사들이 무척 좋아하겠습니다.”
카무이쿠르의 말에 다른 지휘관들은 반색했지만, 굳건한 바위는 묘하게 아쉬운 눈치였기에 카무이쿠르가 피식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래도 자네는 아쉬운가 보군?”
“하하하. 조금 그렇긴 합니다. 조선의 수도라는 한양을 방문해보고 싶었는데 말이지요.”
굳건한 바위의 말에 카무이쿠르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아무리 우리 북미왕국과 조선이 혈맹이라고 해도, 수도에 병력을 하선시키는 문제는 민감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리고 한양은 항구 도시가 아니라 3함대가 들르기도 애매하고.”
“아. 그 점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다만 한양이 조선의 도시 가운데 가장 크고 볼 것도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고...개인적으로 조선을 방문할 수도 없다 보니 조금 아쉬워서 그렇지요.”
“어차피 조선과는 계속해서 군사교류를 할 생각이네. 그러니 나중에 조선에 파견될 군사고문관을 지원하면 한양을 둘러볼 수 있지 않겠나.”
카무이쿠르의 말에 굳건한 바위가 알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 옆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아이누 탐사대의 지휘관이 슬쩍 끼어들었다.
“저기...사령관님. 헌데 저희는 계속 남아 있게 되는 겁니까?”
“아. 자네도 알고 있지? 청나라가 만주 일부를 우리에게 넘겼다는 걸?”
지휘관급들은 북미왕국과 청나라와가 맺은 평화조약의 내용을 다 알고 있었기에, 카무이쿠르가 만주를 언급하자 아이누 탐사대 지휘관은 본국에서 무슨 명령을 내렸을지 짐작이 되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저희는 바로 만주에 배치되는 겁니까? 육로로 이동해서?”
이곳에서 1년 반이나 고생했는데, 바로 만주로 배치하는 것은 좀 너무한 것 아니냐는 얼굴이었기에 카무이쿠르가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육로로 이동하는 것은 맞는데...만주에 배치되는 것은 아니네. 어차피 만주는 조선에 넘기거나 독립시킬 생각이니.”
“그럼...만주 지역을 탐사하라는 거겠군요?”
그나마 계속해서 주둔하는 임무가 아니라는 사실에 아이누 탐사대의 지휘관이 조금 안도하자 카무이쿠르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지. 3개월 안에 만주 지역을 탐사해야 하니 아이누 탐사대는 당분간 조금 고생해야 할 것 같네.”
“흠. 겨울이 오기 전에 탐사를 끝내란 거군요.”
“그래. 그리고 북방에 있는 아이누 탐사대장이 주변 부족들과 접촉해 만주의 정보를 꽤 확보했으니 자네들은 만주 전체가 아니라 토문강, 송화강, 우수리강 안쪽의 지역만 탐사하면 될 걸세.”
이에 아이누 탐사대의 지휘관은 안색이 조금 밝아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야...알겠습니다. 빠르게 만주 지역을 탐사하고 가족들과 함께 겨울을 나면 되겠지요.”
“그래. 자네들이 만주 지역의 탐사를 끝내면, 내가 책임지고 푹 쉴 수 있게 해주지. 약속하겠네.”
“하하하. 사령관님만 믿겠습니다.”
* * *
알바진 요새를 둘러보던 아이누 탐사대장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에벤 족 족장인 투란을 보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리고 아이누 탐사대장의 이런 반응에 투란은 씩 웃으며 손을 들었다.
“여! 오랜만일세.”
“아니...왜 여기 계십니까?”
저 북쪽에 있어야 할 양반이 왜 여기 있느냐는 물음에 투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연합의 일 때문에 이르쿠츠크에 들렀다가, 자네를 본 지도 오래되어서 잠깐 들렀지.”
투란의 대답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저를 보기 위해 그 먼 거리를 이동했다고 하니...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하하하. 영광으로 생각하게. 헌데 자네는 뭐 하는 건가? 당연히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을 줄 알았더니?”
“잠시 둘러보는 거죠.”
“그래? 그럼 가치 둘러보자고.”
그러면서 투란은 자신과 함께 온 부하들에게는 관사로 가서 먼저 쉬라고 이야기한 후 아이누 탐사대장에게 다가가자, 아이누 탐사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발걸음을 옮기다 입을 열었다.
“근데 정말 저를 보러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이에 북적이는 알바진 요새를 흥미로운 얼굴로 둘러보던 투란이 아이누 탐사대장에게 말했다.
“뭐 그것도 있고...막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는데, 청나라가 아무르 강 유역에 배치했던 병력을 철수시키고, 그 대신 평화 협상을 위한 사절단을 파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말이야.”
그제야 투란이 이곳을 방문한 진짜 목적을 파악한 아이누 탐사대장은 빙긋 웃었다.
“아하. 그것 때문에 오신 거군요. 하지만 한발 늦으셨습니다. 이미 청나라와의 협상은 끝났고, 청나라 사절단도 어제 돌아갔거든요.”
“어? 그래? 그럼 협상은?”
투란의 반응에 아이누 탐사대장이 고개를 갸웃하다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 족장님께서는 레나 요새로 보낸 보고서를 못 보신 모양이로군요.”
“음?”
북미왕국이 청나라와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모든 전쟁은 끝났음을 파악한 아이누 탐사대장은 이를 레나 요새로 알리기 위해 보고서를 보냈는데, 투란은 이 보고서를 못 본 것 같았기에 아이누 탐사대장이 입을 열었다.
“이미 청나라는 북미왕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이번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먹었기에 별다른 협상은 없었습니다. 그저 청나라는 알바진을 포기하고, 아무르 강 북쪽은 연합의 땅이라는 것은 인정했고, 이후, 아무르 강에서 50km까지는 청나라 병력을 배치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이 다입니다. 아. 그 외엔 예물로 가져온 비단 5만 필 정도?”
“어? 아무르 강을 경계로 50km까지는 청나라군이 주둔할 수 없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아무르 강을 통해 각종 물자를 수송하고 있는 만큼, 청나라군이 아무르 강 남쪽 인근에 자리 잡으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어서 그러한 조건을 내걸었고, 청나라는 당장 이곳에 병력을 배치할 수 있는 여유도 없는 탓에 별다른 반발 없이 이 조건을 받아들였습니다.”
어차피 연합에서 청나라를 공격한 것은 북미왕국을 돕기 위해서였지, 무슨 이득을 챙기고자 함은 아니었기에, 영토를 확정 짓고 비단 5만 필을 받았다면 나름대로 괜찮은 조건이었다.
헌데 여기에 청나라군이 아무르 강 인근에 주둔하지 않는다는 조건까지 걸려 있으니 연합 입장에선 무척 만족스러운 조건이었고, 이는 청나라엔 꽤 불리한 조건이었는데도 이를 청나라가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놀란 투란이 중얼거렸다.
“허. 이거 놀랍군. 부랴트 대족장의 말을 들어보니 청나라는 공포의 대상이었다던데...”
“그것도 다 옛날 일이지요.”
아이누 탐사대장이 피식 웃으며 그렇게 대꾸하자, 투란도 비슷하게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잠시 침묵하며 알바진의 북적거리는 거리에서 발걸음을 옮기던 아이누 탐사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청나라와의 전쟁이 끝난 터라 막 레나 요새로 전령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족장님께서 오셨으니, 따로 전령을 보낼 필요는 없겠군요.”
“그렇지. 아. 헌데 전쟁이 끝났으면 자네는 어떻게 되는 건가?”
투란이 살짝 기대하는 눈빛으로 아이누 탐사대장의 거취를 물어보자, 아이누 탐사대장은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기에 미안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당연히 아이누 섬으로 복귀해야지요.”
아이누 탐사대장이 그동안 연합을 위해 해준 일을 생각하면 투란은 아이누 탐사대장이 연합에 남았으면 하지만, 원래 아이누 탐사대장은 북미왕국인이고, 소속도 북미왕국의 소속이었으며, 가족들도 북미왕국에 있는 만큼, 무리하게 잡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한 투란이 애써 아쉬움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탐사대도 함께?”
“그렇습니다. 이번에 북미왕국에서 전쟁 배상금으로 청나라에게 저 남쪽의 땅을 얻었기에 그곳을 탐사하라는 명령을 받아서 말입니다. 해서 탐사대는 바로 남쪽으로 보낼 예정입니다.”
아이누 탐사대장의 대답에 투란은 시선을 돌려 한 상인과 한 사냥꾼이 가죽의 값을 놓고 흥정하는 모습을 슬쩍 바라보다 말했다.
“그럼 이 알바진은 어쩌고?”
“이미 주변 부족을 규합해 두었기에 알바진을 방어하고 관리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연합에서 따로 알바진의 관리자를 파견하기 전까지는, 제 부관이 이곳을 관리할 거고요.”
아이누 탐사대장의 대답에 투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연합에서 따로 알바진에 관리자를 파견하라고? 주변의 족장 중 한 명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제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이 알바진의 발전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알바진은 연합이 직접 관리하는 것이 나을 겁니다.”
투란은 아이누 탐사대장이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이 알바진을 주변의 부족에 맡기면 알바진을 관리하는 부족이 훗날 알바진을 이용해 영향력을 키울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까지 자신들을 걱정하는 아이누 탐사대장의 마음에 슬쩍 미소지었다.
“하긴...딱 봐도 엄청 활기차 보이는 도시라 여기서 더 발전할 것 같긴 하네.”
“예. 주변의 부족들이 거래하기 위해 모두 몰려올뿐더러, 아국은 멀리 떨어져 있고 여름 한때만 방문할 수 있고, 항해할 때마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레나 요새보다는 이곳에서 교역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보니 장기적으로는 연합과 거래를 이곳에서 할 생각입니다. 그럼 엄청나게 커지겠지요.”
아이누 탐사대장의 말에 투란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확실히 이 알바진 요새를 연합이 직접 관리하는 것이 낫겠군.”
“예. 레나 요새를 연합의 북쪽 거점으로, 이 알바진 요새를 연합의 남쪽 거점으로 사용하면 될 겁니다.”
“알겠네. 듣자니 큰 나라는 수도를 여러 개 두고 운영한다던데...우리도 그런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낫겠군. 레나 요새로 돌아가면 바로 이 문제를 논의해야겠어. 그건 그렇고...자네가 북미왕국으로 복귀하면 당분간 얼굴 보기 힘들 테니 오랜만에 코가 삐뚤어지게 술이나 마시는 것이 어때?”
이별의 아쉬움을 술로 털어내자는 투란의 이야기에 아이누 탐사대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러시지요. 제가 좋은 술집으로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