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화
“왜국에서 사절단을 보내고 싶어한다고? 새한성으로?”
정성국은 집무실을 찾아와 보고하는 조용한 곰을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좁히며 되묻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왜국은 새한성에 사절단을 보내 아국의 정보를 수집하고 싶어했습니다만,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기에 그동안은 투로시노가 잘 달래서 이를 막아왔는데 이번 전쟁의 결과가 왜국에 알려지면서 아국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려는 막부에서 수도인 새한성에 사절단을 보내 전하를 알현하고 싶어하는터라...”
이제까지 동양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는 대부분 거대한 중원을 장악한 국가였다.
그렇기에 동양의 나라들은 대부분 청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는 북미왕국의 강력함을 직접 경험해보았던 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헌데 청나라가 조선이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명목으로 갑자기 전쟁을 시작했고, 이 전쟁에 북미왕국이 끼어들었으며, 결국 조선과 북미왕국의 승리로 끝나자, 왜국에서는 북미왕국의 평가를 급격히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국은 조선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만큼, 조선이 청나라군을 막을 수 있었던 데에는 북미왕국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막부의 쇼군인 도쿠가와 츠나요시는 북미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막부를 존속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지금까지 포로나이로 사절단을 보냈던 것과는 달리 새한성으로 보내 북미왕국의 국왕인 정성국을 알현하고 싶다고 요청한 상태였고.
이러한 설명에 투로시노 선에서 이를 막긴 어려우리라는 것을 짐작한 정성국이 알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한 곰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왜국은 조선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새한성에 사절단을 보내고 있다는 것까지 언급했기에 이번에도 저들의 사절단을 거부하게 되면 왜국과의 관계가 무척 경색될 거라고 하더군요. 물론 왜국과의 외교 관계를 끊어버릴 생각이라면 그냥 무시해도 되겠지만, 왜국과의 교역 규모가 큰 편이고 이득도 많이 나는 터라 그렇게 되면 손해가 꽤 큽니다. 해서 투로시노는 왜국 사절단의 새한성 방문을 허용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했습니다.”
“아. 그래?”
정성국이 처음 왜국 사절단이 새한성을 방문하는 것을 막은 이유는 역시나 북미왕국의 사정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북미왕국은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내부 사정이 썩 좋지 않았고 한창 발전에 매진해야 해던 시기였기에 왜국이 작정하고 병력을 동원하면 홋카이도나 아이누 섬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예 정보를 차단해 왜국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다.
다만 그 이후로는 왜국이 전군을 동원해 공격한다 하더라도 3함대나 아이누 경비대로 왜국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고 확신하긴 했지만, 정성국은 왜국 사절단이 북미왕국 본토로 오는 것을 계속해서 막았는데, 이는 새한성을 방문한 왜국 사절단이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상황을 막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왜국은 네덜란드와 꾸준히 교역하면서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나름대로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기감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유럽이나 북미왕국의 지식을 받아들이려는 생각은 없어 보였기에, 정성국은 괜히 왜국 사절단이 새한성을 방문해 여러 가지 기물을 목격하고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한 후 돌아가 안정적이지만 정체되어있는 왜국을 바꾸지는 않을까 경계했던 것이다.
다만 왜국이 조선 사절단까지 언급하며 자신들도 새한성을 방문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이상, 이를 거절하면 당연히 왜국과의 관계는 험악해질 것은 자명했고, 그렇게 되면 북미왕국에도 손해가 꽤 컸다.
왜국과의 교역량은 꾸준히 증가해 쉽게 포기하긴 어려울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북미왕국에서 생산되는 값싼 면직물, 식량 등이 구리와 은으로 되돌아오고 있었으니.
해서 정성국은 투로시노의 의견에 공감하면서도 내심 꺼려지는 부분이 있어 고민하고 있을 때, 그런 정성국을 보고 조용한 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 대신 몇 가지 이권을 취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도 했습니다.”
“음? 무슨 이권을?”
“먼저 투로시노는 이번 기회에 왜국에서 이주민을 모집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더군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잠시 움찔하며 중얼거렸다.
“...왜인들을 아국의 백성으로 받아들여라?”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아시아에서는 조선인들만 이주민으로 모집했지만, 이번 전쟁으로 조선은 넓은 땅을 확보하게 된 셈이잖습니까.”
정성국은 굳이 조선인과는 풍습이 전혀 다른 왜인들을 받아들여야 하나 하는 얼굴을 했었지만, 조용한 곰이 이번에 확보한 만주를 언급하자 순간적으로 투로시노가 왜 이런 제안을 한 것인지 이해하고 탄성을 질렀다.
“아! 그럼...”
“예. 지금까지 조선 조정은 아국에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렇기에 꾸준히 조선의 백성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했음에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랬지.”
공식적으로는 10년 넘게, 그리고 비공식적으로는 20년 가까이 조선인들을 꾸준히 북미왕국으로 이주시켰기에, 현재 조선에서 유민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으며, 양민들도 하나둘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고 있어 지주들은 소작농을 구하기 위해 조금씩 나은 조건을 제시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지방의 양반들은 양민들이 고향을 떠나 유민이 되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청했지만, 북미왕국의 도움을 워낙 많이 받았고, 또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조선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섣불리 거론하지 못했다.
특히 북미왕국은 인구가 부족한 것이 약점이라 이를 위해 조선인들이 필요하다면서 도와달라고 이야기했던 탓에 더더욱.
이러한 사정을 떠올린 정성국이 흐뭇한 미소를 짓자, 조용한 곰이 말했다.
“허나 아국은 이번에 확보한 만주 일대를 전체든, 일부이든 조선에 넘길 생각이고, 그렇게 되면 조선은 이 만주 일대를 장악하기 위해 만주로 이주할 백성들을 모집해야 하니 자연히 아국으로 이주하는 백성들을 통제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물론 만주를 넘기는 대신 아국으로 이주하길 원하는 백성은 건드리지 말라는 조건을 달 수는 있겠습니다만...”
조용한 곰이 말을 흐리자 정성국이 고개를 저었다.
“조선과의 관계나 조선의 발전을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되겠지.”
“그렇습니다. 그러니 북미 서해안 지역으로 유입되던 조선인들은 대폭 줄어들 테고, 자연히 북미 서해안 지역의 발전이 정체되겠지요.”
세계신문을 통해 북미왕국인들이 값비싼 초콜릿이나 설탕이 듬뿍 들어간 음식들을 매일 먹을 정도로 풍족하게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선인들은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면 자신들도 북미왕국인들처럼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땅을 처분하고 가족들과 함께 개항장으로 이동했고, 이러한 조선인들은 점차 늘어났기에, 최근엔 매년 10만 명가량의 조선인들이 이주해 북미 서해안 지역에 골고루 정착했고, 이들이 북미 서해안 지역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
헌데 이들의 유입이 대폭 줄어들면 북미 서해안 지역의 개발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기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니 차선으로 왜인들을 받아들이자는 거군? 북미 서해안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
“맞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꾸준히 유럽인들이 이주해 정착함으로써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 북미 동해안 지역과는 달리 북미 서해안 지역의 발전은 늦춰질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뭐 균형 발전을 위해 유럽인들을 북미 서해안 지역에 정착시키는 방법도 있기는 합니다만...”
이에 정성국은 슬슬 이주민들을 뒤섞어 북미왕국 곳곳에 정착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뭐 유럽인들을 북미 서해안 지역에 정착시키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이긴 해. 다만 이건 지금 논의할 문제는 아닌 것 같고...아국의 인구 증가가 궤도에 오르긴 했지만, 목표인 1억 인구를 생각하면 외부에서 인구가 유입되는 것을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 헌데 왜국에서 백성은 영주의 재산이나 다름없을 텐데 과연 그러한 권리를 내어줄까?”
왜국은 백성들에게 봉건적인 인두세와 더불어 과도할 정도로 많은 세금을 걷었기에 백성은 일종의 재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과연 막부나 지방의 번주들이 백성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용인하겠느냐고 묻자 조용한 곰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막부, 그리고 각 번의 영주와의 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요.”
“그렇다면야...”
“그리고 왜국의 사절단에게 아국의 국력을 제대로 알려 개항장을 늘리거나 관세를 조정할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청나라의 해안가 곳곳에 개항장을 확보해 청나라 상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된 만큼, 투로시노는 이 기회에 왜국 역시 북부 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왜국 곳곳에 개항장을 확보해 왜국의 상관을 장악할 뜻을 밝히자 정성국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개항장을 따로 늘리지는 말게.”
“예?”
“막부는 쇄국을 원하는 만큼, 개항장을 늘려달라는 요구는 막부의 입장에서 무척 부담스러울 걸세. 그리고 개항장이 늘어나면 다른 지역과도 직접 교역할 수 있으니 자연히 우리에게 우호적인 북부의 영주들은 이득이 줄어들 테고, 내심 불만을 품겠지.”
이미 북부의 번주들은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게 도와준 북미왕국을 무척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이들이 적극적으로 북미왕국을 돕고 있었기에 괜히 이들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은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정성국이 이를 설명하자 조용한 곰이 수긍했다.
“음...그건 그렇겠지요.”
“그러니 개항장을 늘려달라는 구실로 막부를 압박해 관세만 낮추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정성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조용한 곰은 또 할 말이 있느냐는 눈빛을 보내는 정성국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건 조금 다른 문제인데...전하께서도 유구국을 아시지요?”
갑자기 조용한 곰이 유구국을 언급하자 정성국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유구국? 알기야 하는데 갑자기 유구국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건가?”
“유구국에서 포로나이로 외교 사절을 보냈습니다.”
“외교 사절? 허. 사츠마 번의 감시가 심할 텐데 용케 포로나이로 사람을 보냈군.”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조금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츠마 번은 유구국을 복속시켰고, 혹시 유구국이 다른 생각을 할까 걱정해 류큐재번봉행을 보내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었는데, 유구국에서는 이를 뚫고 무척 멀리 떨어져 있는 포로나이로 외교 사절을 보낸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이 슬쩍 미소지으며 말했다.
“유구국은 생각보다 아국을 많이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유구국의 외교 사절은 야음을 틈타 미리 준비해 둔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했습니다.”
“어? 아하! 그리고 제주도에서 사정을 설명하고 제주도에 들르는 아국의 배를 이용해 포로나이로 온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은 손으로 탁자를 톡톡 건드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포로나이까지 오는 것이 비교적 수월했다고 하더라도 걸리면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한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외교 사절을 보낸 것은...역시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겠지?”
“그렇습니다. 유구국의 사절은 아국에 신속할 테니, 아국에서 3함대를 파견해 사츠마 번으로부터 유구국을 지켜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흐음...유구국을 돕게 되면 사츠마 번뿐만 아니라 막부와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이미 마리아나 제도와 필리핀 북부 지역을 확보했기에 유구국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유구국이 북미왕국의 속국이 되면 남방 항로를 이용해 개항장으로 이동할 때, 괌에서 류큐를 거쳐 곧바로 제주도로 이동할 수 있으니 그만큼 항로를 단축할 수 있었기에 유구국을 돕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 정성국이 조용한 곰에게 질문을 던지자 조용한 곰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국 사절단이 새한성을 방문한 이후 유구국의 문제를 논의하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겁니다.”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묘한 표정으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사격 훈련 이후에나 이 문제를 거론할 생각인 모양이군?”
“하하하. 뭐 그렇지요.”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살살 하게. 살살. 막부를 너무 압박하지 말고. 알겠나?”
“하하하. 알겠습니다. 다만 막부와는 달리 실질적으로 유구국을 통치하고 있는 사츠마 번은 쉽게 물러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막부면 모를까 지방의 영주까지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정성국이 의외로 강경하게 나오자 조용한 곰은 조금 놀라면서도, 사츠마 번이 예전에 조선을 침공했던 사실을 떠올리고 이러한 정성국의 반응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