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화
투로시노가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 조정에서는 투로시노와 친분이 깊은 유철을 바로 제물포로 보냈고, 유철은 커다란 천급 전선에 올라 자신을 반기는 투로시노를 보고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투로시노 공.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유 공. 자자. 일단 들어갑시다.”
투로시노는 유철을 반기며 근처의 회의실에 들어와 미리 준비해두었던 커피를 내리며 유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고.
투로시노가 내린 커피를 받아 한 모금 마신 유철은 투로시노를 보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헌데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청나라와 평화 조약을 맺고 오는 길입니다.”
“예?! 그게 갑자기 무슨!?”
유철은 갑작스러운 투로시노의 이야기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들고 있던 커피를 살짝 흘렸고, 이를 보고 투로시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유철에게 건네며 그를 진정시켰다.
“자자. 진정하시고 일단 제 이야기부터 들어보시지요.”
이에 유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흘린 커피를 손수건으로 대충 닦은 후 투로시노의 이야기를 경청하겠다는 모습을 보였고, 투로시노는 그런 유철에게 강소성의 수군 진영에서 청나라의 예부 상서인 연목과 만나 평화 협상을 진행했다는 이야기와 결국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번 평화 조약으로 북미왕국에서 얻게 된 것들을 설명하자 유철은 이를 듣고 기함했다.
“헉! 정말 청나라가 이 넓은 지역을 전쟁배상금으로 넘겼다는 겁니까?”
유철은 투로시노가 이번에 조약을 체결하며 얻게 된 만주의 절반이 그려진 지도를 보고 경악한 얼굴로 되묻자 투로시노가 빙긋 웃었다.
“그렇습니다. 뭐 요동 반도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한데...유 공의 말씀대로 청나라에서는 심양과 요동, 요서 지역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들었기에...”
“아마 그렇겠지요.”
심양은 청나라 황실의 묘가 있고, 요동과 요서는 만주에서 중원으로 입성하는 관문에 해당하는 터라, 청나라로서는 절대 이 지역을 넘기려 들지 않을 것은 예상했었던 만큼 유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투로시노가 입을 열었다.
“해서 무리하게 요동 반도를 노리기보단, 이 송화강과 그 지류인 눈강을 기준으로 동쪽의 땅을 받는 것으로 청나라와 화친을 맺었습니다.”
이러한 설명에 유철은 북미왕국이 청나라를 압박해 만주 절반을 얻어냈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북미왕국이 청나라와 아예 평화 조약을 체결한 터라 이미 북미왕국과 청나라와의 전쟁이 끝난 셈이라 청나라가 이를 빌미로 자신들을 압박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하며 투로시노에게 질문을 던졌다.
“으음...허면 저희 조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리고 투로시노는 그런 유철을 보고 살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나라와 동녕국이 빠르게 영역을 확장하고 있어, 청나라는 이들을 막기에 급급한 상황입니다. 해서 청나라는 곧바로 압록강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을 철수시키기로 했지요.”
“휴우. 그렇습니까?”
“예.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청나라가 정식으로 화친을 제의하기 위해 곧 조선에 사절을 보낼 겁니다. 그러니 조선은 이때 정식으로 청나라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면 될 테지요.”
“으음...”
투로시노의 말에 유철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전쟁이 끝났고, 그 전쟁이 조선의 승리라는 점은 만족스러웠지만, 청나라가 흔들리고 있는 이 기회에 본격적으로 청나라를 공격하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웠기에.
그런 유철의 생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투로시노는 유철의 미지근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별일 아니겠거니 싶어 넘기고 진지한 얼굴로 유철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음? 중요한 문제라고 하시면...”
“전에도 말씀드렸지요? 아국은 이번에 확보한 땅을 직접 통치할 생각은 없다고?”
투로시노의 말에 유철은 예전에 투로시노와 만났을 때, 이번 전쟁으로 북미왕국이 만주의 땅을 확보하면 이를 조선에 넘길 생각이 있다고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지요.”
“그리고 이번에 얻은 땅 가운데 아무르 강을 기준으로 북쪽의 땅은 모두 연합에 넘길 생각입니다. 뭐 연합이야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만큼 딱히 얻는 것이 없긴 한데...연합은 최근 영토를 대폭 늘린 탓에 굳이 이 지역의 땅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거든요.”
투로시노의 말처럼 연합은 러시아 차르국과의 전쟁으로 영토를 대폭 넓혔기에, 그리고 그렇게 넓힌 영토를 장악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탓에 그들의 입장에선 이 변방의 영토에는 관심이 없다는 설명에 유철도 연합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투로시노가 티테이블 위에 올려진 만주의 지도를 가리키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문제는 아무르 강 남쪽의 이 땅들입니다. 원래는 연해주 정도만 얻어 청나라가 직접적으로 아이누 섬을 공격하는 것을 막으려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 연해주 서쪽의 거대한 땅마저 얻게 되었으니 말이지요. 해서 이 땅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가 문젠데...이를 조선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그 말씀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입장에선 이 땅을 모두 조선에 넘기는 것이 편하긴 합니다.”
“허억!”
지도만 보더라도 이번에 확보한 땅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헌데 이를 정말 넘기겠다고 할 줄은 몰랐기에 유철이 기겁하자 투로시노는 그런 유철의 반응에 슬쩍 웃음 짓고 손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문제는 이 땅이 워낙 넓다는 겁니다. 조선의 몇 배는 되는 영토니까요. 그러니 과연 조선이 이를 제대로 통치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워서 말입니다.”
북미왕국에서 이번에 확보한 지역을 조선에 넘기려는 것은 조선의 힘을 키워 나중에는 다른 나라가 조선을 공격하더라도 조선이 직접 이를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랐기에 넘겨주는 거였다.
헌데 이번에 확보한 땅이 워낙 넓다 보니 잘못하면 이 땅이 조선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어 보였고.
특히 조선은 최근 조선 팔도 곳곳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몇 배나 많은 땅을 얻게 되면 개발할 곳이 많아지는 만큼, 역량을 분산할 수밖에 없고, 자연히 조선의 발전은 늦춰질 수 있다는 투로시노의 우려에 유철은 수긍했다.
“으음...그건...그렇군요.”
처음에는 조선의 거의 4배에 달하는 거대한 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지만, 투로시노의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선, 아니 고려 시절부터 요동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리고 요동을 일부 장악하기도 했었지만, 이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요동보다 몇 배나 넓은 지역이 조선의 땅이 되는 것이 과연 이득인가 싶었던 것이다.
해서 유철이 심각한 표정으로 티테이블 위에 놓인 만주의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때 투로시노가 입을 열었다.
“해서 조선에서 결정하셨으면 합니다. 이 땅 전체를 가져가실지, 아니면 일부만 가져가실지를 말입니다.”
“...저희가 일부만 원한다면 남은 지역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이에 투로시노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 지역의 원주민 부족들을 규합해서 하나의 세력을 만들어야겠지요.”
“그렇습니까...”
여진 야인들이 새로운 세력을 만든다는 것에 잠깐 긴장한 유철이었지만, 북미왕국에서 새롭게 만든 세력을 그냥 내버려 둘 리는 없었기에 괜한 걱정이라고 판단한 유철은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투로시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일단 이 문제를 조선 조정에서 정식으로 논의해보세요. 아. 그리고 아이누 탐사대원들을 이용해 이 지역의 사정을 파악해 조선에 보내드릴 테니 결정을 내릴 때 참고하시고요.”
“허. 북미왕국의 도움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유철은 조선을 어떻게든 도와주려는 투로시노를 무척 감동한 얼굴로 바라보자 투로시노는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 * *
유철은 투로시노와 대화를 마친 후 곧바로 한양으로 돌아왔고.
투로시노의 제안을 조정에 알리자 북미왕국의 뜻을 미리 보고받았던 이연과는 달리 조정 대신들은 경악해 그게 정말이냐고 몇 번이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그게 정말입니까? 정말 북미왕국에서 이번에 확보한 땅을 우리 조선에게 넘기겠다고 제의했다는 겁니까? 정말로?”
예조참판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유철에게 묻자 유철이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예. 다들 아시겠지만, 북미왕국이야 땅이 넘쳐나는 나라 아닙니까. 그리고 인구는 부족하고. 그러니 이번에 확보한 만주 동부 지역을 직접 장악하겠다고 병력을 파견하고 백성들을 이주시키기보단 북미왕국에 우호적인 아국에 넘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맙소사...”
“허어...”
“어찌 이런...”
유철의 확답에도 조정 대신들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유철도 저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빙긋 웃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문제는 북미왕국에서 제의한 땅이 무척 넓다는 겁니다. 북미왕국에서 넘겨주겠다고 제의한 땅은 대략 조선의 4배에 달하는 크기라고 하니까요.”
그러면서 유철이 투로시노가 넘겨 준 만주의 지도를 펼치자 정태화가 너무나도 광활한 크기의 땅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허허. 이거 잘못하면 북방 지역을 통치하겠다고 막대한 비용이 소모될 것 같은데...”
그 말에 갑자기 조선의 영토가 몇 배나 확장된다는 사실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조정 대신들은 정신을 차렸고.
그런 조정 대신들의 반응에 유철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북미왕국에서는 그것을 걱정하더군요. 아국의 발전을 위해 땅을 넘길 생각인데 잘못하면 그 땅에 발목을 잡힐 것을 우려했습니다. 해서 일단 상의해보고 북방의 땅 전체를 받을지, 아니면 일부만 받을지 결정하라고 하더이다.”
이에 병조판서가 질문을 던졌다.
“일부? 일부라면...”
“북미왕국에서는 이 북방의 땅 전체가 부담스럽다면 이 우수리 강 동쪽을 확보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더이다. 최소한 봄부터 초가을까지는 뱃길을 이용할 수 있을뿐더러 북미왕국의 영토인 아이누 섬이나 홋카이도와도 가까운 터라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것도 쉬울 거라면서 말이외다.”
유철의 설명에 다른 조정 대신들은 지도에 연해주라고 쓰여 있는 지역을 확인하고 한마디씩 했다.
“으음...”
“확실히 북미왕국의 도움을 받는다면 수월하게 개발할 수 있겠구려.”
“그러게 말이외다. 그리고 저 정도면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 것 같고.”
“예. 그리고 북미왕국에서 이야기하기로는 이 지역에 커다란 호수가 있는데 그 인근이 무척 비옥한 땅이라 하더이다.”
유철이 지도에 조그맣게 보이는 호수를 가리키며 덧붙이자 다른 호조참판이 반색하며 물었다.
“오! 그게 참말입니까?”
“예. 물론 북방이라 날씨가 추운 탓에 쌀농사는 어렵지 싶은데...비교적 추위에 강한 콩이나 기장, 수수, 조 같은 작물을 심어 수확할 수는 있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변엔 산림 자원도 풍부해 이를 이용한 산업을 육성하는 것도 괜찮다고 조언하더군요.”
“오호...”
유철의 설명에 다른 조정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이조참판이 질문을 던졌다.
“헌데 우리가 저 우수리 강 동쪽만 달라고 이야기하면, 우수리 강 서쪽의 거대한 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북미왕국에서 원주민들을 규합해 세력을 만들겠다고 하더이다.”
유철의 대답에 병조판서가 탄성을 질렀다.
“아.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나 호주 연합처럼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북미왕국이 이곳의 세력을 지원할 테니 자연스럽게 이들은 우리 조선과도 우호적으로 지내려 할 겁니다. 그러니 국경을 방비하겠다고 많은 병력을 파견할 필요도 없고요.”
유철의 대답에 병조판서는 지도를 바라보며 신음을 흘렸다.
“으음...우리가 저 북방의 땅을 모두 차지하면 청나라와의 국경이 늘어나니 그만큼 우리 조선의 부담이 커지긴 하겠군요.”
“그렇습니다. 물론 현재 청나라는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어 당장은 국경을 방비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쌓지는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저 넓은 땅을 제대로 장악하려면 10년도 모자랄 것 같은데...”
“하지만 북미왕국에서 저 거대한 땅을 그냥 넘겨주겠다는데 이를 포기하는 것도 조금...”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 드넓은 땅에 각종 광물이 묻혀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자원이 묻혀있으면 뭐합니까. 그걸 발견하고, 개발하고, 운송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쉽겠습니까?”
“일단 받고 방치해두면 되는 것 아닙니까?”
“어허. 큰일 날 말씀입니다. 야인들이 세력을 규합하면 어쩌시려고...”
조정 대신들의 의견이 갈리며 점차 대전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하자 이연이 손을 들어 조정 대신들을 진정시킨 후 유철에게 물었다.
“바로 결정을 해야 하는 건가?”
“아니옵니다. 북미왕국에선 충분히 논의한 후 결정을 내려달라고 이야기했사옵니다. 그리고 일단 북미왕국에서 탐사대원들을 보내 이번에 확보한 땅을 탐사한 후 정보를 취합해 이를 넘겨주기로 했사옵니다. 이를 참고해 결정을 내리면 될 것 같사옵니다. 전하.”
유철의 대답에 이연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이 문제는 일단 넘기도록 하고, 청나라에서 정식으로 사절을 파견한다고 했었지?”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들을 어떻게 맞이할지, 그리고 이들의 대우부터 논의하도록 하지.”
“저...전하. 혹시...”
이연의 말에 정태화가 흠칫했다.
이연의 할아버지인 인조가 청나라에 패배한 이후 굴욕을 경험했기에, 이연이 혹여 청나라의 사절에게 굴욕을 줄 생각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해서 정태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 하자 이연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걱정할 것 없네. 괜히 청나라의 사절을 모욕할 생각은 없으니. 그리고 이번 승리는 온전히 우리 조선의 승리라고 보긴 어렵잖은가. 북미왕국의 도움이 컸지.”
이연의 말에 조정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허나 개혁에 더욱 매진하다 보면, 언젠간 우리 조선의 힘만으로 청나라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 보네. 그때 할바마마의 굴욕을 갚아주면 되겠지. 그러니 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더욱 박차를 가하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