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화
깊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잘 생각을 하지 않고 총독부 집무실에서 서성이던 총독 마누엘은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살바도르 방어 사령관인 카스토르가 들어오자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병사들의 분위기는 어떤가.”
“썩 좋지 않습니다. 무척 불안해하고 있지요.”
“그야 그렇겠지. 잠깐 사이에 우리의 함대가 일방적으로 깨지는 모습을 지켜보았으니.”
몇 시간 전에 살바도르 만에서 벌어졌던 해전은 충격적이었다.
비록 북미왕국의 군함이 대단하다는 소문이야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고작 3척이었기에 마누엘을 비롯한 대부분의 포르투갈인은 당연히 승리를 자신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잠깐의 교전으로 함대의 절반이 불타오르거나 침몰하니 경악할 수밖에 없었고, 남은 함대의 절반도 선착장에서 포탄을 맞고 모조리 수장되었으니 이를 목격한 살바도르의 모든 포르투갈인은 당연히 앞으로의 일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고.
해서 카스토르는 도망친 수병들, 선원들을 수습하고 동요하는 병사들을 진정시키느라 지금까지 부리나케 뛰어다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이렇게 마누엘을 만나기 위해 총독부 집무실을 방문한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마누엘 역시 아까까지 동요하는 백성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고생했었기에 카스토르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으며 수긍한 뒤, 마누엘을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버티기 어렵겠지?”
이에 카스토르는 잠시 멈칫하다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후우. 역시 그런가?”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팔마레스의 흑인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던 카스토르가 말을 바꿨지만, 아까의 해전을 생각해보면 당연했기에 마누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그런 마누엘의 반응에 카스토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 신식 소총이야 요새를 끼고 싸운다면 해볼 만합니다. 그래서 팔마레스의 노예들이 이곳으로 남하하고 있어도 크게 걱정하지 않은 거지요. 헌데 생각보다 작열탄의 위력이 강합니다. 물론 나무로 만든 배와 돌로 만든 요새나 병영은 다릅니다만...”
“자네가 판단하기엔 요새나 병영의 외벽이 작열탄의 파괴력엔 버티지 못할 거라는 소리겠지?”
“예. 그리고 저들의 작열탄이 한 발이라도 요새나 병영 안쪽에 떨어진다면 피해가 극심할 겁니다.”
바다에서의 공격을 막아줘야 할 포르투갈 함대가 격파되고, 남은 배들마저 모두 침몰하자 해안가에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사는 포르투갈인들은 선착장으로 날아왔던 포탄이 자신들에게도 쏟아질까 무척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마누엘은 카스토르와 의논해 살바도르의 백성 중 노약자를 일단 요새와 병영 안의 연병장으로 피신시켰고.
헌데 작열탄이 외벽이 아니라 외벽을 넘어 그 안쪽에 떨어진다면, 이들이 피해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면 병사들마저 동요할 것이 분명했기에 마누엘은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며 한탄했다.
“으음...그렇다고 저들에게 항복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포르투갈은 그동안 도망친 노예들에게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킬롬보를 발견한 즉시 병력을 보내 토벌했고, 킬롬보로 도망친 노예들은 본보기를 보이겠다며 몰살시켰으니.
그러니 도망친 노예들은 포르투갈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지금 이곳을 공격하려는 팔마레스의 흑인 노예들은 몇 차례의 공격을 막아냈고, 포르투갈은 팔마레스에 있는 킬롬보를 구경도 하지 못했으니 사정이 조금 다르긴 하겠지만, 애당초 노예들은 자신들을 가혹하게 부렸던 포르투갈인들을 좋게 보지 않았으니, 현 상황에서 항복하더라도 과연 안전할까 싶어 마누엘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이야기하자 카스트로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문제지요. 저들은 우리에게 원한이 깊으니까요. 하지만...현 상황에서 항복 외엔 답이 없습니다. 해로는 이미 막혔고, 내일이면 육로마저 막힐 테니 도망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버티자니 저들의 작열탄이 무섭습니다. 그리고 총알과 포탄을 맞아가면서 악착같이 버틴다 하더라도...솔직히 희망이 없습니다. 아까 벌어졌던 해전을 생각해보면 본국에서 지원병력을 보낸다 하더라도 과연 제대로 이곳에 상륙할 수 있겠습니까?”
“끙...”
카스토르의 말마따나 설사 자신들의 연락을 받고 포르투갈 본국에서 브라질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함대와 지원병력을 파견한다고 한들, 과연 저 살바도르 만에 정박해 있는 3척의 북미왕국 군함을 넘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에 마누엘이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었을 때, 카스토르가 그런 마누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니 살바도르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항복을 하는 것이 낫지 싶습니다만...”
어차피 버텨봐야 죽는 것은 기정사실이니 그 전에 항복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카스토르의 의견에 마누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반문했다.
“허나 순순히 무장을 해제했다가는...”
마누엘은 항복하고 무장을 해제한 후 문을 열었다가 팔마레스의 흑인 노예들이 살바도르 안으로 입성해 포르투갈인들을 학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하자 카스토르가 말했다.
“그러니 협상을 통해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받아야겠지요.”
“협상이라...과연 가능할까?”
마누엘은 한창 기세를 올린 흑인 노예들이 협상에 응할까 싶기도 했고, 과연 흑인 노예들이 그 협상을 지킬지 의문이라 회의적인 얼굴로 반문하자 카스토르가 말했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 살바도르는 넓고 주민들도 무척 많습니다. 반면에 팔마레스의 흑인 노예들은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지요. 그러니 저희가 필사적으로 버틴다면 이 살바도르를 점령하고 장악하기가 절대 쉽지 않을 테고 그 과정에서 피해도 클 겁니다.”
“아. 그러니 저들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면 우리도 저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자 이거지?”
“그렇습니다. 특히, 팔마레스 킬롬보의 지도자인 줌비는 저희에게 적대적인 것과는 별개로 머리 회전이 빠른 인물로 알려져 있으니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단 현실적인 이득을 택할 수 있어 보이고요.”
마누엘이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카스트로의 말처럼 4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이 살바도르를 고작 3천 남짓의 병력으로 통제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니 이를 상기시킨다면 팔마레스의 흑인들이 자신들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판단한 마누엘이 항복을 결정하고 카스토르를 바라보았다.
“으음...그럼 내일 바로 사절을 파견하는 것이 낫겠지?”
“예. 항복할 거라면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하는 것이 낫겠지요.”
“알겠네. 그럼...”
그렇게 마누엘은 카스토르와 함께 항복 문제를 논의하느라 날을 지새웠다.
* * *
새벽에 일어나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친 줌비와 3천 명의 전사들은 곧바로 살바도르로 향했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살바도르에 도착한 이들은 살바도르를 공격하기 전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가져온 식량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줌비는 음베아, 담바와 함께 잠깐 주변을 살폈고, 폐허가 된 선착장과 바다에는 단 3척의 인급 전선을 제외하면 그 어떤 선박도 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감탄했다.
“허. 정말 3척만으로 포르투갈의 배를 모조리 부순 모양이로군.”
“예. 정말 대단하군요. 저 함대가 계속 우리의 깃발을 달고 움직인다면 좋겠는데...”
자신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이 바로 대포를 가득 싣고 다니는 유럽의 배들이었는데, 저들만 있다면 유럽의 배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에 음베아가 중얼거리자 줌비가 마세이오 항에서 만났던 김현우의 제안을 떠올리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건 어렵겠지. 다만...”
“다만?”
“듣자니 북미왕국의 동맹인 호주 연합이라는 나라에서 저 인급 전선을 구매했다더군.”
줌비의 말에 열망 어린 눈빛으로 인급 전선을 바라보던 음베아가 고개를 휙 돌렸다.
“예? 북미왕국에서 저걸 팔았다고요? 정말입니까?”
“그래. 원래는 팔 생각이 없었다는데 호주 연합의 영토가 워낙 넓은 터라 자신들이 계속 바다를 지켜줄 수도 없기에 고민 끝에 인급 전선 10척을 판매했다더군.”
“헉! 10척이나 말입니까?”
이에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담바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작 3척의 인급 전선으로 살바도르에 있던 30척이 넘는 범선을 처리할 수 있었는데 10척이나 되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리고 놀란 것은 음베아도 마찬가지였다.
저 인급 전선을 무려 10척이나 구매하다니.
“...허. 호주 연합은 무척 부유한 나라인가 보군요. 인급 전선의 전투력을 생각하면 한두 푼 할 것 같지 않은데, 10척이나 사다니.”
음베아의 목소리에 부러움이 가득한 것을 깨닫고 줌비가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주 연합이 최근 금광을 개발했다더군. 거기서 나오는 금으로 신식 소총도, 인급 전선도 사들인 모양이고.”
“금이라...그럼 저흰 불가능하겠군요.”
“아니. 김현우 함장이 그러더군, 이 남미대륙 남동쪽의 고원 지대에는 수많은 광물이 묻혀 있고, 그 광물들을 발견해 개발하면 호주 연합처럼 인급 전선을 구매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예? 그걸 저들이 어떻게 안답니까?”
음베아는 줌비의 말에 기뻐하면서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얼굴로 반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브라질 지역의 남동부에 광물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으니까.
이에 줌비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이전에 팔마레스 지역을 방문했던 그 석탄이라는 검은 돌을 찾아낸 북미왕국의 개발청 관리들이 대충이나마 탐사한 모양이야.”
“그래요? 그럼...”
“그래. 북미왕국은 우리가 남쪽으로 영역을 넓히길 바라고 있어. 김현우 함장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렇더군.”
줌비의 말이 끝나자 음베아는 신음을 흘리며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흐음...북미왕국과 가깝고 대농장이 있는 북부 해안 지역으로 영역을 넓히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음베아의 중얼거림을 듣고 줌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줌비도 브라질 식민지의 구심점인 살바도르를 점령한 이후에는 마세이오 항으로 돌아가 정비한 후 북부 해안지대를 장악하고 이곳에서 나는 설탕, 담배 등 여러 상품 작물로 북미왕국과 교역할 생각이었으니.
하지만 김현우 함장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것이 잘못된 판단임을 알게 된 줌비가 음베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김현우 함장이 그러더군. 북미왕국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해야 꾸준히 교역할 수 있지 않겠냐고.”
“흠. 현재 북미왕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은 농작물이 아니라 광물이라는 겁니까?”
“그렇다고 하네. 그래서 우리가 북부 해안 지역을 장악해봐야 그곳의 농작물을 가지고 북미왕국과 교역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하더군.”
정성국이 흑인 노예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들에게 계속해서 퍼줄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교역을 통해 서로 이득을 챙길 필요가 있었고, 그렇기에 정성국이 전생의 브라질 지역의 정보를 정보기관에서 파악한 정보로 둔갑시켜 외무청에 알렸고, 외무청에서는 브라질 남부 지역에 각종 광물이 묻혀 있다는 정보에 눈이 뒤집혀 김현우 함장에게 이를 알리며 줌비가 살바도르를 점령한 후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하게끔 유도해달라고 부탁했고.
그렇기에 김현우는 줌비와 대화하면서 킬롬보 도스 팔마레스의 세력을 키우려면 북미왕국과 계속해서 교역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려면 브라질 지역의 남동부를 장악하라고 권했고 말이다.
그리고 고생해서 북부 해안 지역을 장악해봐야 실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줌비로서는 당연히 북미왕국에서 이야기한 브라질 남동부 지역이 탐날 수밖에 없었으며, 자신들이 브라질 남동부를 장악하면 북미왕국에서 광산을 개발할 수 있도록 각종 지원을 해주고 이곳에서 캐내는 광물 전량을 수입하겠다고 약속하니 당연히 목표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줌비의 설명에 음베아는 줌비가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깨닫고 신음을 흘렸다.
“으음. 그렇다면...”
“그래. 그러니 저 살바도르를 점령하고 안정시킨 이후엔 다시 남하해야 할 것 같아. 최소한 리우데자네이루까지는 점령해야 할 것 같던데?”
줌비가 저 남쪽의 작은 항구 마을인 리우데자네이루를 언급하자 음베아는 너무 멀지 않은가 싶어 당황하자 줌비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바다에 정박해 있는 인급 전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걱정 말게. 저 배를 타고 빠르게 이동할 생각이니.”
남쪽엔 포르투갈의 병사들이 많지 않기에 소수가 저 배를 타고 주요 항구를 점령하는 식으로 빠르게 남하해 세력을 넓힐 생각이라고 하니 음베아는 그런 방식이면 인급 전선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기에 오히려 저항이 없을 것으로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알겠습니다. 그러면야 빠르게 세력을 넓힐 수 있으니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지요. 그리고 살바도르엔 꽤 많은 포르투갈인이 살고 있다고 하니 이번에 저들을 노예로 삼는다면 광산을 개발하는 것도 쉬울 테고요.”
“어허. 이야기하지 않았나. 북미왕국에선 노예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아. 참. 그랬지요. 그럼...포로로 잡고 광산을 개발하고 광물을 캐는 것으로 몸값을 내게 만들면 되겠지요.”
음베아의 말에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담바가 끼어들었다.
“그럼 바로 살바도르를 공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어차피 포격으로 요새를 무너뜨리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은데?”
“그래. 그러자고. 담바. 바로 포격 지원을 뜻하는 깃발을...”
그때 음베아가 손으로 살바도르의 요새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 저기 보시지요!”
“음? 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