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화
정성국이 집무실에서 한참 각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살피고 있을 때, 누군가가 벌컥 집무실의 문을 열었고.
정성국이 고개를 들자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한 조용한 곰이 보였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음? 무슨 일인가.”
“전하!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기쁜 소식?”
“예. 잉글랜드, 에스파냐에서 노예무역을 금지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눈을 번쩍 뜨며 급히 되물었다.
“오!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잉글랜드와 에스파냐의 경우 노예뿐만 아니라 본국에서 계약 노동자를 구해 식민지를 운영해오고 있었기에, 그리고 북미왕국과의 교역 규모가 워낙 컸기에 북미왕국에서 노예무역을 계속하면 외교 관계를 단절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논의 끝에 잉글랜드와 에스파냐는 즉시 노예무역을 금지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여기에 잉글랜드는 단순히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와 카리브 해를 오가는 무역선을 가장한 노예선까지 단속하겠다고 천명했고.
조용한 곰의 자세한 설명을 듣던 정성국은 잉글랜드의 반응이 의외였기에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호오.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것을 넘어 노예선을 직접 단속하겠다고 나섰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일단 잉글랜드 대사가 이야기하기를, 북미신문을 통해 노예무역의 참혹한 실상이 런던에 알려지면서, 잉글랜드 지식인들이 노예무역을 규탄하며 잉글랜드도 북미왕국처럼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노예무역을 막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러한 주장 때문에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노예선을 단속하기로 했다고 합니다만...”
“합니다만?”
“런던에 파견된 대사의 보고까지 종합해보면 실상은 적극적으로 노예무역을 막기 위해서라기보단 잉글랜드가 소유한 소앤틸리스 제도의 섬들을 개발할 인력을 확보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조용한 곰의 설명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성국은 이내 잉글랜드의 의도를 깨닫고 입을 열었다.
“음...노예선에 실린 노예를 노리고 말인가?”
“예. 아국이 노예상인들에게 노예를 사들여 해방해 아국의 백성으로 만든 것처럼, 잉글랜드도 노예선을 단속해 노예선에 실린 노예를 해방해서 소앤틸리스 제도에 정착시킬 생각인 듯합니다.”
잉글랜드는 대앤틸리스 제도의 자메이카 외에도 소앤틸리스 제도의 세인트키츠 섬, 바비에도스 섬, 엔티가 섬 등을 자국의 영토로 선언하고 식민지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북미왕국에 북미 동해안 지역을 넘기면서 원래 북미 동해안 지역으로 이주했던 잉글랜드인이 대거 이주해 급격히 개발되기 시작한 자메이카와는 달리 소앤틸리스 제도의 섬들은 인구가 적어 개발이 더딘 편이었다.
그리고 바베이도스 섬은 카리브 해 동쪽에 위치한 터라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카리브 해로 이동하는 노예선들이 자주 들르는 섬이었고.
해서 잉글랜드는 어차피 노예무역 금지를 선언한 김에 이 노예선들을 단속해 노예선에 실린 노예들을 확보해 이들을 소앤틸리스 제도에 정착시켜 각 섬의 개발을 꾀할 생각으로 추측된다는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이 중얼거렸다.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다고 해도 당장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어떻게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할 테고, 소앤틸리스 제도의 농장주들은 싼값에 일꾼을 구할 수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전하.”
이에 정성국은 잠시 매끈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흠. 그래도 노예로 아무런 자유도 없이 혹사당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시대가 시대인 터라 노예에서 해방되고 농장주 밑에서 돈을 받고 일한다고 한들 겨우 입에 풀칠하는 수준에 불과하겠지만, 그것만 해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채찍질을 견디며 일해야 하는 노예들보다야 사정이 나았기에 조용한 곰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기야 하지요.”
“그리고 소앤틸리스 제도에서 일하다가 아국의 소문을 듣고 어떻게든 배편을 구해 북미왕국으로 밀입국할 수도 있을 테고.”
정성국이 능청스러운 얼굴로 밀입국을 강조하자 조용한 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위장 상단에 일러두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다른 나라들은?”
“일단 암스테르담, 쾨벤하운, 파리에 나가 있는 대사들이 보내온 보고서에 따르면 노예무역에 관여한 일부 귀족들이 노예무역 금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아국이 외교단절까지 거론한 터라 대부분의 귀족들은 노예무역을 금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니, 네덜란드, 덴마크, 프랑스는 결국 노예무역을 금지할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예상대로 아국과의 무역에 관여한 귀족들이 움직인 모양이군. 다행이야. 그리고 포르투갈에서는 아직 연락 없지?”
포르투갈 외교관은 북미왕국의 입장에 본국에서 의논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북미왕국에서는 10월까지는 기다려주되, 그때까지 포르투갈에서 노예무역을 금지하지 않는다면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포르투갈 선박의 입항을 금지하겠다고 경고했었다.
헌데 벌써 9월이다 보니 슬슬 무언가 답을 해줘야 할 텐데 아직도 별다른 소식이 없어 정성국이 묻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다만 세비야 공사의 말에 따르면, 이 문제로 리스본이 꽤 시끄럽답니다.”
“그래?”
세비야를 들락거리는 유럽 상인들을 통해 알게 된 리스본의 소식을 이야기하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이 호기심을 보이자 조용한 곰이 포르투갈의 사정을 설명했다.
“예. 아무래도 포르투갈의 경우 다른 나라보다 노예무역에 관여하고 있는 귀족들이 많으니까요. 해서 이들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다만...”
“다만?”
“아국이 이 문제를 빌미로 남미 지역의 식민지에 관여하면 이를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식민지에 이권을 가진 귀족 중 일부는 아국의 뜻대로 노예무역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양입니다.”
“호오.”
아프리카 식민지에 이권을 가진 귀족과 브라질 지역에 이권을 가진 귀족이 대립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고, 조용한 곰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유럽국가들이 점차 신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만큼, 포르투갈도 신식 소총을 확보할 필요가 있는데 노예무역을 금지하지 않으면 신식 소총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이미 신식 소총을 보유한 나라의 경우 신식 소총을 계속 사용하려면 아국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고, 결국 유럽국가 대부분이 노예무역을 금지하게 될 텐데, 포르투갈만 노예무역을 허용하면 유럽에서 고립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지식인들과 일부 귀족들이 있고, 현재 포르투갈의 섭정인 페드루 왕자도 이들의 의견에 공감하고 있는 터라 포르투갈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짐작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현재 포르투갈의 왕은 아폰수 6세였으나, 아폰수 6세는 정신병이 발작해 유폐되었고, 현재는 아폰수 6세의 동생인 페드루 왕자가 섭정을 맡아 포르투갈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페드루 왕자는 유럽 각국이 신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만 신식 소총이 없다면, 타국이 포르투갈을 만만히 여길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신식 소총 대신 머스킷으로 무장한 병력을 더 많이 보유하면 되는 문제이기는 했으나, 가뜩이나 인구가 적고, 또 많은 젊은이들이 바다로 나간 포르투갈의 경우는 대규모 육군을 보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해서 페드루 왕자는 노예무역 금지에 찬성하는 이들을 자주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이 때문에 리스본은 더욱 시끄럽고 혼란스러우며, 과연 페드루 왕자가 노예무역을 금지할지, 아니면 노예무역에 종사하는 대귀족들이 이길지 미지수라는 세비야 공사의 보고에 정성국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흠. 뭐 포르투갈이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은 없지만, 부디 현명한 선택을 했으면 좋겠군.”
이에 조용한 곰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요. 저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면 브라질 지역을 모두 잃게 될 테니까요.”
“음?”
정성국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조용한 곰을 바라보자 조용한 곰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킬롬보 도스 팔마레스를 방문하기 위해 떠났던 위장 상단이 돌아왔습니다.”
“그...포르투갈 농장주들의 채찍질을 피해 탈주한 노예들이 모인 일종의 마을이자 공동체 말이지?”
포르투갈 농장주들은 노예를 몹시 가혹하게 다루었고, 당연히 노예들은 반발하며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을 추격하는 노예 사냥꾼과 포르투갈 식민지 병사들을 피해 밀림으로 도망쳤고.
헌데 이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공동체인 킬롬보를 이루기 시작했고, 이런 여러 킬롬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공동체가 바로 킬롬보 도스 팔마레스였기에 정성국은 일전에 위장 상단을 보내 이들과 한번 접촉해보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위장 상단이 고생 끝에 이들과 접촉하고 돌아왔다는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정성국은 눈을 빛내며 급히 질문을 던졌다.
“그래? 저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라던가?”
“위장 상단의 보고로는 2만 명 내외라고 합니다.”
“뭐?! 그렇게나 많다고?”
공동체 규모가 2만 명 내외라면 이건 거의 도시 국가에 가까웠기에 정성국이 기겁하며 되묻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도망친 노예들이 이룬 공동체가 이곳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도망친 노예들이 많고, 이들을 잘 규합해 지원만 해준다면 포르투갈 세력을 남미 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도 가능해 보입니다.”
“허어...”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보고에 무척 놀랐지만, 생각해보면 포르투갈이 그동안 브라질 지역으로 데려온 아프리카 노예들의 수가 거의 백만에 가깝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들 중 일부가 탈출해 조그마한 마을을 이루고, 점차 공동체가 성장해 그런 규모를 이루었다는 것이 납득되었기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헌데 그 정도 규모라면 포르투갈에서도 그 존재를 모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
“물론입니다. 브라질 총독도 도망친 노예들이 킬롬보 도스 팔마레스로 모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몇 번 병사를 동원해 토벌하려고 한 모양입니다만...밀림이라 머스킷 사용이 제한될 수밖에 없어 패배한 모양입니다.”
“아...그건 그렇겠군.”
밀림에서 싸우면 장전이 힘든 머스킷보다는 정글도가 더 쓸만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정성국이 수긍하자 조용한 곰이 덧붙여 말했다.
“해서 브라질 총독은 이들의 옛 지도자인 강가 줌바를 회유하려 했답니다. 일부 도망친 노예를 돌려주고 앞으로 도망치는 노예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이들이 편히 살 수 있도록 비옥한 쿠가우 계곡 일대를 내어 주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킬롬보 도스 팔마레스는 방어에 적합한 지형이지 대규모 인원이 살기엔 썩 좋은 지형은 아니었습니다. 해서 이들의 지도자인 강가 줌바는 이런 브라질 총독의 제안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포르투갈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줌비라는 인물이 포르투갈을 믿을 수 없다며 계속해서 포르투갈과 싸우고 더 많은 노예를 구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요.”
“호오? 그럼 지금 킬롬보 도스 팔마레스는 두 세력이 대치하고 있는 건가? 아니지. 강가 줌바가 옛 지도자라고 했으니...”
정성국이 이 줌비라는 인물에 호감을 보이며 급히 되묻자 조용한 곰이 웃으며 답했다.
“예. 강가 줌바가 브라질 총독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줌비는 결국 자신의 추종자들과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강가 줌바는 사망하고 강가 줌바의 추종자들은 쿠가우 계곡으로 도망쳤으며 줌비는 킬롬보 도스 팔마레스의 왕이 되었지요.”
그게 3년 전 일이라고 덧붙인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이 탄성을 내지르며 급히 질문을 던졌다.
“오오! 그럼 줌비는 계속해서 포르투갈과 싸우며 노예를 해방하고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특히 쿠가우 계곡으로 도망친 강가 줌바의 추종자들은 다시 포르투갈의 노예가 되었기에 줌비의 추종자들은 줌비를 열성적으로 따르고 있다 하더군요.”
“쯧쯧...”
정성국은 믿을 놈들이 없어 포르투갈을 믿었다가 다시 다시 포르투갈의 노예가 된 강가 줌바의 추종자들의 처지가 안타까워 혀를 찼고.
조용한 곰 역시 쓴웃음을 지은 후 계속 말했다.
“다만 이들이 나름 밭을 일구고 각종 작물을 심고 여러 물건을 만들고 있기는 하나 워낙 많은 인구가 살고 있어 각종 물자가 부족한 터라 킬롬보 도스 팔마레스에서는 위장 상단을 무척 반기며 어떻게든 거래를 하려 했답니다.”
“거래라고?”
그렇게 척박한 지역이면 거래할 것이 있긴 하겠나 라는 표정에 조용한 곰이 어깨를 으쓱였다.
“포르투갈 농장을 습격해 얻은 재물이 있으니까요. 거기에 토벌대를 격파하고 잡은 포로들도 있으니, 이들을 노예로 팔려 했답니다.”
“그것 참...그래서?”
“일단 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고 여긴 위장 상단은 저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했고, 이들은 몹시 만족하며 정기적으로 거래를 했으면 한다고 제의했고, 위장 상단은 이를 수락하고 복귀했고요.”
조용한 곰의 설명이 모두 끝나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한 곰에게 말했다.
“허면 저들에게 필요한 식량, 생필품, 철제 무기 등을 공급하게.”
아직 포르투갈이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정성국의 성향이라면 킬롬보 도스 팔마레스의 이야기를 듣고 그냥 내버려 둘 리 없다고 여겼던 조용한 곰은 역시나 하는 얼굴로 말했다.
“역시 전하께서는 포르투갈의 결정과는 상관없이 저들을 도울 생각이시군요.”
“그래. 포르투갈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스스로 자유를 찾아 투쟁하는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야 없지.”
“알겠습니다. 바로 위장 상단을 통해 계속해서 물자를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