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8화
정성국은 집무실 창가에 서서 어두운 표정으로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양양 대지진이라...’
보통 한국인들은 한반도가 지진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한반도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의외로 많다.
특히 수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조선 시대의 경우 지진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약 1900건에 달하고.
물론 전근대의 기록이기에 정확한 지진의 규모나 진도를 파악할 길은 없지만, 기록을 살펴 당시 발생한 지진이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는 대략적이나마 추측할 수 있는데, 이 수많은 지진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지진이 바로 1681년 6월 26일에 발생한 리히터 규모 7.5의 강진으로 추측되는 양양 대지진이다.
다만 17세기 후반 조선에는 여러 자연재해들이 발생했고, 그러면서 경신 대기근이나 을병 대기근 등이 발생한 터라, 그사이에 발생한 양양 대지진의 경우는 존재감이 무척 옅었다.
강원도는 인구가 그리 많은 편도 아니고 고층 건물이 거의 없는 조선의 건축 문화 덕분에 지진으로 인해 피해가 크지 않았으니.
해서 정성국도 이를 잊고 있다가 조용한 곰이 조선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하자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고 말이다.
‘오늘이 6월 21일이니...아마 개항장 인근에서 일어났다는 지진은 양양 대지진의 예진에 가깝겠지. 그리고 아무리 쾌속선이 빠르다고 하더라도 6월 26일까지 개항장에 도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이니 어쩌면 더 큰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을 테고. 쯧.’
조용한 곰의 보고에 따르면 포로나이에서 조선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날짜가 6월 13일이었고, 포로나이에는 조청전쟁을 대비해 막대한 물자가 비축되어있는 만큼, 곧바로 물자를 배에 싣고 개항장으로 떠났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북미왕국의 배들은 이미 개항장에 도착해 한창 물자를 내리고 있거나 아니면 모든 물자를 다 내려놓았을 시점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 역사상 최강의 지진이라는 양양 대지진이 일어난다면, 현재 개항장에 나간 북미왕국의 관리들과 배들도 피해를 볼 수도 있었다.
특히 양양 대지진의 경우 정확히는 양양 근해에서 발생한 지진이기에 쓰나미도 동반되었다고 알려진 만큼.
해서 정성국은 조용한 곰이 집무실을 나간 이후 한참을 고민해보았지만, 5일 만에 조선에 소식을 알릴 방법은 없었다.
혹시나 하고 항공기 연구소에 전화해 하얀 수리와 통화해 보았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고.
26일까지 조선에 도착하려면 결국 야간 비행까지 감수해야 하는데, 조종사 중에서 비행 경험이 가장 많은 검은 날개조차도 야간 비행을 시도하기엔 위험이 너무 클뿐더러, 설사 위험을 무릅쓰고 야간 비행까지 감수해가며 이동하려 해도, 비행기가 뜨고 내릴 활주로도 없고, 연료 보급도 불가능했으니까.
해서 정성국은 부디 개항장으로 이동한 포로나이의 관리들이 재난 대응 행동 양식에 따라 행동하기를 바랐다.
일단 북미왕국은 땅이 넓은 터라 각종 재난이 발생하기 쉬웠고, 특히 홋카이도, 아이누 섬, 카무이 반도, 북미 서해안은 지진, 화산 활동이 활발해 소위 불의 고리라고 불리는 환태평양 조산대에 속해 있었기에, 앞으로도 계속 지진에 시달릴 수밖에 없어 정성국은 행정청 연구소에 명령해 재난 대응 행동 양식이라는 일종의 매뉴얼을 만들어 행정청 관리들에게 배포하고, 유사시 이 행동 양식에 따라 움직이라고 말해 두었으며, 이 행동 양식 중 지진과 관련된 부분에는 계속해서 발생할 여진을 경계해 마지막 지진이 발생한 후 일주일 정도는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쓰여 있었으니, 포로나이의 관리들이 이 행동 양식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리고 운이 좋다면 의외로 피해가 적을 수도 있었다.
‘똑똑똑’
그때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정성국은 정신을 차렸고, 고개를 돌리자 전아라가 어느덧 해가 거의 져서 어두운 집무실에서 불도 켜지 않고 창가에 서 있는 정성국을 보고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오라버니? 거기서 뭐 하세요? 불도 안 켜시고?”
그러면서 전아라는 집무실의 불을 켜고 조금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정성국에게 다가왔고, 정성국은 그런 전아라를 보고 입을 열었다.
“잠깐 생각 좀 하느라. 헌데 집무실엔 웬일이야?”
“저녁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으셔서 무슨 일인가 싶어서요.”
보통 정성국은 별일이 없다면 항상 저녁은 가족과 함께 먹었고, 무슨 일이 있으면 먼저 이를 알리곤 했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어 전아라가 직접 집무실로 왔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시계를 확인하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구나. 그럼 그냥 전화하지.”
“최근 집무실을 방문한 적이 없어서 겸사겸사 온 거예요. 헌데 오라버니.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전아라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자 정성국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다 어차피 전아라도 곧 알게 될 일이라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조선에서 큰 지진이 발생한 모양이야. 그래서 개항장에도 피해가 발생했다더군.”
“어머. 피해가 크대요?”
정성국의 대답에 전아라가 깜짝 놀라 급히 묻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자세한 사항은 몰라. 그래서 걱정 중이었고.”
정성국의 대답에 전아라는 정성국의 손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아...하긴. 개항장은 저희의 고향과도 같으니 오라버니의 마음이 이해는 되네요.”
“그렇지. 예전에 허허벌판에서 개척촌을 만드느라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애착이 갈 수밖에 없으니까.”
물론 정성국이 개항장의 일을 신경 쓰는 것은 단순한 애착 때문은 아니었지만 시시콜콜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어 정성국은 흐릿하게 웃으며 얼버무렸고,
그런 정성국의 얼굴에 전아라는 정성국을 껴안고 고개를 들어 정성국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운 내세요. 오라버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집착해봐야 좋을 것 없잖아요.”
“...그래. 그렇지.”
* * *
시간이 흐르며 정성국에게 계속해서 개항장의 소식이 전해졌다.
쾌속선뿐만 아니라 수많은 배들이 북방항로를 이용해 태평양을 오가고 있었고, 이 배편을 통해 포로나이로 전해진 개항장의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물론 새한성에 갓 도착한 따끈따끈한 소식이라고 해도 2주 전 소식에 불과했지만.
아무튼, 이렇게 전해진 소식을 듣고 정성국은 다소 안도했다.
정성국은 북미왕국의 관리와 배들이 무턱대고 개항장으로 들어갔다가 피해 볼 것을 우려했는데, 6월 12일 이후로 잦은 여진이 발생하다 6월 17일 새벽에 이전보다 강력한 지진이 발생해 아직 상황이 끝나지 않았다고 판단한 포로나이의 관리들은 행정청의 재난 대응 행동 양식에 따라 해일을 우려해 개항장이 아닌 개항장 뒤편의 얕은 산기슭에 임시 대피소를 설치해 지진으로 집에 금이 가 불안해하는 개항장의 주민들을 대부분 이 임시 대피소에 피신시켰으며, 물자를 실은 배는 먼바다에서 대기하고 한 척씩 선착장에 정박해 물자를 내리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었기에.
해서 정성국은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업무를 보기 시작했고.
다시 시간이 흘러 7월이 되었을 때 조용한 곰이 어두운 얼굴로 정성국의 집무실을 방문했고,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얼굴을 확인 후 살펴보던 보고서를 내려놓고 질문했다.
“표정이 좋지 않을 것을 보니...설마 조선에서 또 지진이 발생한 건가?”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6월 26일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해 개항장의 건물 상당수가 무너지고, 뒤이어 닥친 해일로 인해 남아있던 건물마저 반파된 모양입니다.”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대답에 혀를 차며 물었다.
“쯧. 인명 피해는?”
“불행 중 다행으로 이번 지진과 해일로 인한 인명 피해는 거의 없었답니다.”
“오! 그래?!”
정성국은 그동안 양양 대지진으로 또다시 인명 피해가 발생할까 걱정했는데 큰 피해는 없다고 하니 무척 반색했고,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이 살짝 미소지으며 답했다.
“예. 지진이 계속되면서 포로나이의 관리들이 지진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했었으니까요. 해서 흔들리던 땅이 멈추자 개항장에 있던 사람들은 곧바로 개항장 뒤편의 산기슭으로 달렸고, 덕분에 뒤이어 들이닥친 해일을 피할 수 있었답니다.”
“휴우. 정말 다행이로군. 정말 다행이야.”
전생에선 양양 대지진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다.
강원도에는 인구가 적은 편이고, 해안가의 마을도 얼마 없었으니.
하지만 정성국이 조정의 눈을 피하고자 강원도에 개척촌을 세우고, 원상을 통해 조선 팔도의 유민을 개척촌으로 데려오고, 경술년에 기상이변으로 기근이 발생하면서 먹을 것을 얻기 위해 강원도의 주민들이 개척촌으로 몰려들고, 이후 개척촌이 개항장으로 바뀌면서 전생과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그러니 정성국이 생각하기엔 자신이 변화를 일으켜 전생보다 많은 이들이 이번 양양 대지진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보게 되었다고 생각해 내심 걱정하고 있었고, 또 양양 대지진을 기억했더라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자책하고 있었고.
헌데 다행히도 이번 지진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거의 없다고 하니 정성국으로선 기쁠 수밖에 없어 안도하며 중얼거리자 그런 정성국을 보고 조용한 곰이 조금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만...그 전까지 일어난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생각보다 큽니다.”
“음? 설마 자세한 피해 상황이 집계된 건가?”
“그렇습니다. 6월 26일 기준으로 사망자가 357명이라고 하더군요.”
“뭐?! 357명? 세 자릿수에 달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정성국은 생각보다 많은 인명 피해에 놀라 눈을 부릅뜨며 급히 되물었고 조용한 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지진으로 인해 건물이 무너지며, 그 잔해에 깔려 사망한 이들이나, 건물 위나 사다리 위에서 작업하던 인부들이 땅이 흔들려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사망하기도 했지만...사망자의 대다수는 지진 후 개항장을 들이닥친 해일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비록 해일의 크기가 대단하지 않았고, 포로나이로 이동 중이던 이주 선단이 상황을 짐작하고 뱃머리를 돌려 곧바로 구조 활동에 나섰지만,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다.
개항장과 그 주변의 주민들은 대부분 뜨내기다 보니 바다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해서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떠내려간 사람들 가운데 구조를 받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300명이 넘는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탄식했다.
하지만 6월 12일에 일어난 지진의 경우 정성국도 그 존재를 몰랐기에 만약 양양 대지진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떠올렸어도 과연 이러한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까 싶기도 했고, 전아라의 말처럼 이미 지난 일이라 이를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사태 수습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정성국은 마음을 다잡고 중얼거렸다.
“부상자들은?”
“가벼운 부상자들까지 합치면 2천 명이 가볍게 넘는답니다.”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허. 많군.”
“많긴 한데 부상자 중 대다수는 가볍게 긁힌 정도라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 그건 그나마 다행이로군.”
조용한 곰의 부연 설명에 정성국이 안도하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사망자도, 부상자도 생각보다 적은 편입니다.”
“음?”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 개항장에서 대기하던 유민 대다수가 이주 선단에 탑승했기에 지진이나 해일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에 정성국은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으음...확실히 그렇군. 만약 이들이 개항장에 있었다면...”
“예. 아마 지금보다 배가 넘는 피해가 발생했을 겁니다.”
조용한 곰의 대답에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은 정성국은 계속해서 조용한 곰에게 개항장의 상황에 대해 질문했고.
조용한 곰의 대답을 듣고 개항장의 피해 상황을 대충 파악한 정성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허. 생각보다 피해가 크군.”
“그렇습니다. 계속된 지진과 2차례의 해일로 인해 건물 대다수는 파손되었고, 개항장에서 보관하던 물자 상당수는 물에 젖어 못 쓰게 되었으며, 정박해 있던 배 다수도 뒤집히거나 해일에 개항장으로 떠밀려 엉망이 되었으니까요.”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짚으며 투덜거렸다.
“끙...개항장을 복구하려면 한세월이 걸리겠군.”
“예. 아무래도 단기간에 복구하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개항장은 조선과의 무역에서 중요한 거점이었기에 정성국은 한숨을 내쉬며 일단 개발청장과 개항장의 복구 문제를 논의해야겠다고 여기며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일단 군사청, 관리청과 상의해 개항장으로 각종 보급 물자를 보내도록 하게.”
조청 전쟁이 일어나며 전방으로 보낼 보급 물자 일부를 개항장에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물자들마저 바닷물에 젖어 대부분 못 쓰게 되었기에 정성국이 명령을 내리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