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7화
“아버님. 북미왕국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오. 그래?”
윤휴는 사랑방 안에서 북미신문을 읽고 있다가 사랑방에 들어온 윤의제의 말에 반색하며 신문을 내려놓고 윤의제가 건넨 편지들을 받았다.
윤휴는 북미왕국에서 자주 편지를 받았다.
윤휴가 예전에 북미왕국의 법 제정에 관여하면서 북미왕국의 법학자들과도 친분을 쌓았고, 이전에는 개척촌을 실질적으로 운영했기에 북미왕국의 행정청 관리들과도 친분을 쌓았으며, 윤휴의 둘째 아들인 윤하제와 셋째 아들인 윤은제는 북미왕국으로 이주해 교육청의 관리로 일하고 있었기에 매달 윤휴에게 문안 편지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쩔 땐 이렇게 여러 개의 편지를 받기도 했었고.
다만 그가 가장 기다리는 편지는 역시 정성국이 가끔 보내는 편지였는데, 이번에 받은 편지 중에 흰머리 수리가 그려져 있는 편지가 있었기에 윤휴는 환하게 웃으며 곧바로 정성국이 보낸 편지를 살펴보았고.
“허어...”
흐뭇한 표정으로 편지를 읽던 윤휴가 갑자기 탄성을 터트리자 윤의제는 무슨 일인가 싶어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께서 올해 안에 1만 5천 자루의 신식 소총을 조선에 넘길 예정이라는구나.”
윤휴가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그렇게 이야기하자 윤의제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윤휴도 그렇지만 윤의제도 새한성을 방문했을 당시 북미왕국의 여러 사람과 친분을 쌓았고, 윤휴처럼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기에 북미왕국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당장은 신식 소총을 구할 길이 없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해서 전쟁이 벌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조선군 대부분은 조총을 들고 북방에서 청나라와 대치 중인 현실을 무척 안타까워하기도 했고.
헌데 정성국이 대량의 신식 소총을 올해 안에 조선에 넘기겠다고 하니 윤의제가 급히 입을 열었다.
“예? 신식 소총의 주문량이 하도 밀려 있어 당분간 물량을 구하긴 어려울 줄 알았는데...”
“그러게 말이다. 헌데 전하께서 어떻게 물량을 조선에 배정해주신 모양이구나.”
이에 윤의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역시 전하께서는 조선을 각별하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리고 윤휴 역시 아들을 따라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참으로 다행인 일이지.”
조선은 아직 가난했고, 그렇기에 교역량도 많은 편은 아니라 북미왕국의 입장에서 오로지 이득만 따지자면 조선보단 청나라와 손을 잡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은 윤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북미왕국은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마찰이 생기자 곧바로 조선의 손을 잡았고, 조선을 돕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고 물자를 보내주었다.
이는 정성국의 뜻이었으며, 덕분에 작년 겨울 다시 압록강을 넘은 청나라군을 물리쳐 병자년의 치욕을 설욕할 수 있었기에 윤휴는 새삼 정성국이 아직도 조선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것을 무척 다행스러워했고.
거기에 정성국은 증기기관의 설계도를 넘기기도 했고, 조선의 발전을 위해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타국의 요청에도 절대 허용하지 않았던 철도마저 부설해주고 있었으니 정성국이 조선 출신이라는 것이 새삼 다행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해서 윤휴가 미소 짓고 있자 윤의제는 그런 아버지의 속마음을 눈치채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1만 5천 자루의 신식 소총이라면 북방에 배치된 조선군 대부분이 신식 소총으로 무장하게 되는...”
그때였다.
‘쿠르릉!’
갑자기 굉음과 함께 방바닥이 흔들리는 느낌에 윤휴와 윤의제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급히 꼿꼿하게 세웠던 허리를 움츠리며 두 팔로 땅바닥을 짚었다.
“어...어?!”
“어이쿠!”
* * *
땅이 흔들리자 도저히 서 있기 힘들어 급히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으로 땅을 짚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개항장의 사람들은 곧 흔들림이 잦아들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고, 흔들림이 완전히 멈춘 것 같았기에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휴.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게. 하늘이 노하셨나? 땅이 흔들리다니...”
갑작스럽게 땅이 흔들리면서, 건물에 붙어 있던 창문들이 깨지고, 건물 내외에 전시되어 있던 물건들이 떨어지고 깨져 있었기에 상인들이 울상을 짓고 있었을 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한 남성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들며 외쳤다.
“어이쿠. 이거 보게!”
호들갑을 떠는 남성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주변 사람들은 두 눈을 크게 떴다.
3층짜리 건물의 외벽이 갈라져 있었기에.
해서 다른 사람들도 놀란 표정으로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헉! 이 큰 건물에 금이 다 갔네?”
“이거 위험한 거 아닌가?”
“그...런가?”
“저기 봐. 작은 금도 아니고 1층에서 3층까지 그어져 있잖아. 이러다가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헉!”
건물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금이 간 3층 건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황급히 건물과 거리를 벌리며 주변의 다른 건물들도 살폈고, 일부 건물들도 크고 작은 금이 가 있었기에 무척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다른 중년 남성이 선착장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어? 저게 뭐야?!”
중년 남성의 외침에 주변 사람들은 중년 남성이 바라보던 선착장 쪽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하다 무언가 이상함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음?”
“뭔가...이상한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여?”
보통 선착장에 정박한 배의 갑판은 선착장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기에 배에 오르려면 사다리나 연결 갑판이 필요했고, 이들이 자리한 곳에선 정박한 배의 갑판을 보기 어려웠다.
헌데 갑자기 해수면이 낮아지기라도 한 모양인지 배의 갑판은 선착장보다 아래에 있었으며, 덕분에 이들도 정박한 배의 갑판이 훤히 보였기에 무척 기이한 현상이라고 생각했고, 일부는 갑자기 땅이 흔들린 것이 원인이 아닐까 하며 다시 주변을 살폈고.
다만 이 현상에 무언가 찜찜함을 느끼고 유심히 바다를 살피던 한 노인이 곧 소스라치게 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저게 뭐여?!”
“음?”
“어...어?!”
“파도다!”
“피...피해!”
* * *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면서 냉방장치가 가동되고 냉동실엔 아이스크림으로 가득 채워졌다.
해서 정성국은 잠시 쉬는 동안 커피 대신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조용한 곰이 들어왔다.
“전하!”
그리고 정성국은 언제나 침착하던 조용한 곰이 무척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중얼거렸다.
“어? 아니. 대체 무슨 일이길래...”
“조선에서 지진이 발생했답니다!”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정성국이 화들짝 놀라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뭐!? 지진? 조선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예! 그것도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커다란 지진이었다고 합니다!”
북미왕국은 넓었고 특히 홋카이도나 아이누 섬, 새김포나 새한성 인근에서는 가끔 지진이 발생했고, 그렇기에 지진이 발생했다고 호들갑을 떨 필요까지는 없었다.
거기에 지진 대비도 어느 정도 되어 있고, 이런 지역에 건설하는 건물들은 모두 지진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무척 튼튼하게 짓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조선은 상황이 달랐고,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지진이라면 꽤 강력한 지진이었기에 정성국은 심각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이 담겨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그 정도면 보통 지진은 아닌 모양인데...아! 혹시 개항장에 피해라도 발생한 건가?”
이에 조용한 곰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합니다. 지진으로 인해 건물 일부가 무너지거나 파손되고, 지진이 끝난 이후 해일이 개항장을 덮치면서 무척 큰 피해가 발생한 모양입니다.”
“뭐?! 해일까지?”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물론 지진이 위험하기는 하나 전생처럼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땅 밑에 가스관이 묻혀 있는 것도 아니라 지진으로 인한 피해는 크지 않으리라고 판단했지만, 해일은 달랐다.
갑자기 높은 파도가 들이닥치고, 이 파도에 휩쓸리면 살아남기 쉽지 않았으니까.
특히 지진으로 일어난 해일이라면 쓰나미라는 소린데 이 쓰나미가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성국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으음. 이거 피해가 생각보다 크겠는데...어?!”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어 눈을 크게 떴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이에 정성국은 일단 손을 내저으며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아니. 아닐세. 그보다 상세한 피해 상황은?”
이에 조용한 곰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자세한 사항이 보고되진 않았습니다.”
개항장에서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려는 이주민들을 가득 싣고 막 선착장을 빠져나와 포로나이로 이동하던 이주선단은 갑자기 바다에서 굉음이 들리자 깜짝 놀라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망원경으로 개항장을 확인했고, 개항장의 사람들이 일제히 넘어지거나 허우적거리고, 일부 건물이 무너지는 모습에 지진임을 직감했다.
아이누 섬도 그렇고, 새김포도 그렇고 지진이 가끔 발생했었으니까.
해서 여진이 발생하리라는 것과 어쩌면 해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속력을 높여 먼바다로 빠졌고.
예상대로 갑자기 사람 키만 한 커다란 파도가 개항장을 덮치고, 선착장에 정박해 있던 배들도 파도에 떠밀려 파도와 함께 개항장을 덮치는 모습에 탄식하며 그 참상을 멀리서 망원경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개항장을 들이닥쳤던 바닷물이 어느 정도 빠지면서 이 바닷물에 휩쓸려 개항장의 주민들이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기 시작하자 이주선단의 선장들은 급히 모여 잠시 상의한 끝에 조선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뱃머리를 돌리되, 포로나이에도 이 사실을 급히 알릴 필요가 있다고 여겨 한 척의 배는 그대로 포로나이로 보냈고.
덕분에 포로나이에서는 조선에서 지진이 발생했다는 사실과 개항장에 큰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소식을 곧바로 새한성에 전달했기에 자세한 사항은 아직 모른다는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포로나이에서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지?”
“개항장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관리 일부를 파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원들과 식량, 막사 등의 각종 구호물자를 준비 중이며 준비가 끝나는 대로 개항장으로 보낼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안색이 변해 급히 명령을 내렸다.
“지금 바로 쾌속선을 통해 포로나이로 연락을 보내게. 너무 성급히 움직이지 말라고.”
“예?”
“보고된 지진이 예진일 수도 있지 않나.”
정성국의 명령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조용한 곰은 순간 안색이 변했다.
지진은 예진과 본진, 여진으로 구분되고 본진이 가장 강력한 지진이라는 것 정도는 조용한 곰도 잘 알고 있었기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진이라면...추후 더 큰 지진이 올 수도 있다는 거군요?”
“그래. 그리고 해상 지진이라면 다시 해일을 동반할 수도 있고. 그러니 섣불리 행동하지 말고, 안전하다고 판단되더라도 개항장 말고 개항장 뒤편 산기슭에 구호물자와 임시 거주지를 만들라고 하게. 물론 늦었을 수도 있겠지만.”
정성국의 말에 만약 포로나이에서 각종 구호물자와 사람들을 보냈는데 다시 지진이 발생하고 해일이 닥친다면, 북미왕국 백성들까지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용한 곰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급히 대답했다.
“바로 쾌속선을 보내 전하의 우려를 전달하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조용한 곰은 허겁지겁 집무실을 나갔고 정성국은 집무실에 홀로 남아 탄식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왜 양양 대지진을 잊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