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4화
정성국은 군사청장과 외무청장인 조용한 곰이 함께 집무실에 방문하자 무슨 일인가 싶어 용건을 물었고.
3함대가 동녕국과 접촉해 파악한 청나라의 움직임을 듣고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주나라에 집중하다니...이거 의외로군.”
이에 조용한 곰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저희가 넌지시 만주를 언급한 만큼, 그리고 청나라가 만주를 중요시하는 만큼, 저희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서라도 조선을 공격하거나, 못해도 만주에 추가로 병력을 배치할 것으로 예상했으니 말입니다.”
“아무래도 청나라는 우리나 조선군의 화력이 부담스러운 모양이로군.”
현재 압록강에 배치된 조선군과 조선 지원군은 3만 명이 조금 넘는 반면, 압록강 너머에 배치된 청나라군은 최소 7만 명으로 추측되고 여기에 청나라는 5만 명을 추가로 지원할 수 있었다.
헌데 이 지원 병력을 압록강 인근이 아닌 주나라 방면으로 보냈다는 것은 청나라에서는 도합 12만 명의 병력으로도 조선을 정벌하긴 무리라고 판단한 셈이다.
그리고 이 판단의 배후에는 분명 이전의 전투들에서 북미왕국 무기의 화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일 테고.
이런 정성국의 의견에 군사청장이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러니 대국이라고 자부하던 청나라에서 먼저 아국에 화친을 제의한 것 아니겠습니까.”
군사청장의 대꾸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뭐 우리나 조선 입장에서 크게 나쁠 것은 없군.”
이에 조용한 곰이 답했다.
“그렇습니다. 현재 주나라는 청나라의 공세를 잘 막아내고 있을뿐더러, 주나라가 장악한 영역은 무척 넓습니다. 그러니 청나라가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남방을 안정시키려면 많은 시일이 소요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전생에서 오삼계가 죽은 후로 주나라의 결속은 깨지고, 더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장수들과 신하들이 다수 청나라에 항복했는데도 불구하고, 청나라가 주나라의 왕위를 이어받은 오삼계의 손자 오세번이 도망친 곤명까지 점령해 삼번의 난을 완전히 평정하기까지 3년이 걸렸다.
헌데 지금은 오삼계도 건재하고, 주나라가 건국된 지도 벌써 3년이 흘렀기에 주나라 내부는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었기에 설사 오삼계가 노환으로 죽는다 하더라도 전생처럼 주나라가 급격히 흔들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청나라가 주나라를 완전히 토벌하려면 최소 3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때까지 청나라는 섣불리 조선을 공격하지 못한다는 뜻이니, 북미왕국이나 조선 입장에서는 나쁠 것 없었다.
해서 조용한 곰이 정성국의 의견에 맞장구치자 정성국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일단 주나라와의 교역량을 늘리도록 하게.”
“간접적으로 주나라를 지원하실 생각이시군요.”
조용한 곰의 정성국의 속마음을 파악하고 대답하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뭐 재정적인 지원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지원으로 주나라가 청나라를 오랫동안 붙들어준다면 우리로서는 이득이니까.”
정성국이 이러한 대치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생각을 밝히자 군사청장이 슬쩍 입을 열었다.
“차라리 청나라가 주나라에 신경 쓰는 사이 압록강을 넘어 북진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북진?”
“예. 현재 조선 지원군에 파견된 지휘관들 중 일부는 청나라의 상황을 파악하고 일단 압록강 너머에 주둔하고 있는 청나라군을 격파함으로써 청나라를 강하게 압박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주장해서 말입니다.”
군사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썩 내키지 않는군. 당장 압록강을 넘기도 쉽지 않을 테고, 아무리 화력이 우월하다고 해도 병력이 적은 만큼,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그리고 청나라를 강하게 압박할 생각이었다면 뭐하러 육군을 움직이겠나. 그냥 3함대에 천진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면 그만이지.”
강이 녹은 만큼 압록강을 넘으려면 이런저런 준비를 해야 하고, 청나라도 이를 알고 대비할 테니 압록강을 넘는 것은 생각보다 위험했다.
거기에 육군의 경우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들 피해가 전무할 수는 없었다.
작년에 청나라와의 전투에서도 몇 차례 대승을 거두었지만, 눈먼 화살이나 낙마,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사상자들이 발생한 만큼 정성국이 달갑지 않다는 표정을 짓자 군사청장이 알겠다는 듯 답했다.
“그렇긴 하지요. 알겠습니다. 허면 조선 지원군은 압록강 인근에서 대기하면서 혹시 모를 청나라군의 남하만 막으라는 명령을 전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 * *
조선 사절단의 정사인 예조참판은 갑자기 조용한 곰이 자신을 찾기에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외무청을 방문했고,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활짝 웃으며 되물었다.
“오오. 신식 소총을 더 구할 수 있다는 겁니까?”
청나라와 전쟁이 벌어진 이후 조선은 어떻게든 신식 소총을 더 구하려 했지만, 몇 년간 생산하는 신식 소총은 모두 주인이 정해졌다는 북미왕국의 이야기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갑자기 조용한 곰이 1만 5천 자루의 신식 소총을 올해 안에 넘겨 주겠다고 이야기하고 일단 5천 자루를 이번에 조선으로 향하는 수송선을 통해 보내겠다고 말해주자 예조참판은 무척 기뻐하면서도 그 물량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궁금한 기색이었고.
이런 예조참판의 반응에 조용한 곰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신식 소총의 물량 부족으로 아국의 백성들도 피해를 보고 있다 보니, 신식 소총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거든요. 덕분에 약간의 여유가 생겼고, 이 물량의 일부를 조선에도 배정하기로 했습니다. 다만...이 사실은 최대한 함구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에 예조참판은 그 저의를 깨닫고 웃음을 터트리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하하하. 물론입니다. 유럽의 전쟁으로 유럽 각국 역시 신식 소총을 어떻게든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헌데 신식 소총의 생산량이 늘어났다면, 내년에도 신식 소총의 물량이 조금 남는 것 아닙니까?”
예조참판은 더 많은 신식 소총을 원하는 눈치라 조용한 곰이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더 필요하신 겁니까?”
현재 조선은 5천 자루의 신식 소총이 있고, 올해 안에 1만 5천 자루를 추가로 넘겨줄 생각이니 총 2만 자루의 신식 소총을 보유하게 되며, 이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니냐는 표정을 짓는 조용한 곰이었는데 예조참판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신식 소총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예조참판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쓴웃음을 지으며 반문했다.
“허나 신식 소총의 유지비, 거기에 병력 유지비용까지 생각하면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갈 텐데요?”
상황이 상황이니 신식 소총이야 무상으로 조선에 넘겨준다 하더라도, 그리고 당장이야 북미왕국에서 조선군이 사용하는 신식 소총의 총알이나 각종 보급 물자를 감당하고 있지만, 전쟁 이후에는 조선이 이를 감당해야 하는데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조용한 곰의 반응에 예조참판은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염전이나 광산의 개발로 어느 정도 재정적인 여유가 생겼으니 충분히 감당할 만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청나라와의 전쟁 중이니 만약을 대비해서라도 더 많은 병력이 신식 소총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예조참판의 이야기에 고민하는 표정이던 조용한 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한번 알아보도록 하지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신식 소총에 관한 의논을 끝낸 조용한 곰과 예조참판은 잠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러다가 예조참판이 조용한 곰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물었다.
“헌데 유럽 대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북미왕국에서는 노예무역의 금지를 천명하셨다고 들었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원주민을 마치 가축처럼 취급하는 행태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으니까요.”
조용한 곰의 말에 예조참판은 북미왕국에 와서 뒤늦게 접한 북미신문의 기사들을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다루는 행태가 충격적이기는 했지요.”
물론 예조참판 역시 아프리카 대륙의 대략적인 상황을 모르지는 않았다.
북미왕국의 교과서에도 노예무역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기도 했으니.
다만 북미신문에는 노예무역과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받는 처우에 대해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는데 이건 예조참판이 보기에도 너무 지나쳐 눈을 찌푸릴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교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힘이 없다는 이유로 아프리카 원주민을 인간이 아닌 가축으로 여기고 가축처럼 다룬다니.
노예를 일종의 노비로 생각했던 예조참판을 비롯한 조선 사절단은 북미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유럽인들의 무도함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저렇게 고통받는 것이 다 힘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든 조선을 발전시켜 유럽 세력이 조선을 얕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아무튼, 예조참판이 이를 떠올리고 다시 눈쌀을 찌푸리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이 말했다.
“아. 북미신문을 보신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설명하기 편하겠군요.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벌이는 패악은 도를 넘었고, 아국은 더는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유린하는 이러한 행태를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해서 고민 끝에 그러한 결정을 내렸지요.”
“그렇군요. 헌데 일부 유럽 대사들은 현재 북미왕국이 노예무역을 금지하지 않으면 외교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선언한 것처럼, 차후엔 한발 더 나아가 노예제도 자체를 완전히 금지하지 않으면 외교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선언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눈치입니다만...”
예조참판의 이야기에 조용한 곰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국이야 다른 나라들도 아국처럼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노예를 해방하길 바라고 있긴 합니다만...나라마다 사정이 다 다르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만큼 노예제대를 폐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번처럼 외교 관계를 단절할 생각은 없습니다.”
“휴우. 그렇습니까?”
예조참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조용한 곰이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곧 예조참판이 무엇을 걱정했는지를 깨닫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면 조선은 노비가 꽤 많지요? 그 때문에 걱정하신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북미왕국에서는 타인에게 소유권이 있다면 모두 노예로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노비도 일종의 노예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수가 적지 않은 편이다 보니...”
말을 흐리며 겸연쩍게 웃는 예조참판을 보고 조용한 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허나 저희가 강제하지 않더라도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노비를 모두 해방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조용한 곰의 말처럼 노비는 개인의 소유물인 만큼, 일반 양민들과 달리 납세와 군역, 기타 잡역을 피할 수 있어 이들의 숫자가 많아 봐야 국가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예조참판도 잘 알고 있었기에 조용한 곰의 의견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공노비를 해방하면 당장 일손이 부족해지고 사노비의 경우 양반들의 재산으로 인식되는 만큼, 양반들의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는지라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이에 조용한 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저도 당장 모든 노비를 해방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공노비야 해방한 이후 다시 그들을 고용해 그동안 맡았던 일들을 맡기면 그만 아닙니까.”
물론 공노비를 해방하기 전보다 비용은 더 소모되겠지만, 현재 조선의 상황에서 그 정도도 부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예조참판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이 덧붙였다.
“그리고 사노비의 경우 조정에서 양반들에게 값을 치르고 해방하는 식으로 진행한다면 양반들의 반발도 그리 크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노비의 숫자가 한둘이 아닌데 그 많은 노비를 나라에서 사들이는 것은...”
예조참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이야기하자 조용한 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쟁배상금을 두둑히 뜯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
예조참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용한 곰을 바라보자 조용한 곰이 덧붙여 말했다.
“더불어 전쟁이 끝날 때쯤이면 조선도 곳곳을 개발해야 하니 정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질 겁니다. 헌데 조선인 중 상당수가 노비로 양반에 귀속되어 있으니 문제지요. 허니 나라에서 사노비를 사들여 모두 해방한다면 전쟁 이후 노동력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이로 인해 조선은 한층 더 발전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조용한 곰의 이야기가 끝나자 예조참판은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흐음...일단 제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만큼, 조선으로 돌아가서 북미왕국의 제안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