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화
정성국이 집무실에서 열심히 보고서를 처리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자 고개를 들었고, 웃으면서 집무실로 들어오는 김봉길을 보고 손을 들어 환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앉게. 커피나 한잔하지.”
“오. 그거 좋지요.”
잽싸게 티테이블로 가는 김봉길을 보고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커피를 내리다가 김봉길에게 물었다.
“그래. 1함대를 완전히 장악했다지?”
김봉길은 작년에 그동안 맡고 있던 2함대 사령관 자리를 토르투가 분함대를 지휘하던 최종명에게 넘기고, 최종명이 2함대 사령관의 업무에 익숙해질 때까지 새진주에서 그를 도운 후, 올 초 새한성으로 복귀해 그동안 공석이었던 1함대 사령관 자리에 재취임했다.
정성국이 김봉길을 무척 신임하고 있다는 것은 해군 내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고, 그동안 1함대 사령관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둔 것 역시 김봉길 때문이라는 것은 해군 내 지휘관이라면 모르지 않았기에, 그리고 1함대 소속 지휘관들은 대부분 김봉길이 직접 뱃사람으로 키운 이들이었기에 김봉길은 손쉽게 1함대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를 군사청장에게 보고받았던 정성국이 김봉길에게 묻자 김봉길은 빙긋 웃었다.
“뭐 아는 얼굴이 많다 보니 수월하게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제가 1함대 사령관이 되면 다른 함대처럼 제대로 지원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저를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요.”
“끙...그건 조금 미안하군.”
1함대는 북미왕국 해군에서 가장 처음으로 창설된 함대였고, 수도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함대였다.
그렇기에 규모도 가장 크고, 지원도 빵빵해야 하지만, 어차피 태평양에서 북미왕국을 위협할 세력은 없었고, 다른 함대를 키우는 것이 급하다 보니 1함대는 상대적으로 홀대받는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를 김봉길에게 듣자 정성국은 1함대 지휘관들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김봉길은 그런 정성국을 보고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현 상황에서 대서양 방면의 함대를 키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정도도 이해 못 하는 녀석들은 없으니까요.”
“그래도 조금은 서운할 텐데...”
“괜찮습니다. 제가 잘 다독였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1함대 사령관에 취임한 이상 1함대도 다른 함대와 비슷한 규모를 유지할 거라고 장담하자 다들 기뻐하더군요.”
이에 정성국은 황당한 표정으로 김봉길을 바라보다가 한마디 했다.
“이런 사기꾼 같으니라고.”
“하하하.”
이전에 정성국이 파나마 운하와 북미 동해안 지역을 방문했을 때, 정성국과 왕실 가족이 배를 타고 이동하면서 1함대가 호위를 맡았고, 자연히 북미 서해안 지역의 방어는 느슨해졌다.
물론 태평양 지역에서 적대적인 세력은 없었기에 순찰 횟수가 크게 줄어들었다고 해도 별문제는 없었지만, 1함대가 방어하는 영역은 북미왕국의 핵심 지역인 만큼 이를 내버려 둘 수 없었기에 1함대의 규모 역시 다른 함대처럼 키우기로 정했고.
헌데 김봉길은 이를 마치 자신이 1함대 사령관에 취임해서 결정된 것처럼 떠들어 댄 꼴이라 정성국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김봉길은 웃음을 터트리며 가져온 보고서를 정성국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정성국은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김봉길이 건넨 보고서를 눈으로 빠르게 훑고 감탄사를 토해냈다.
“와우. 1차 건조 계획으로 35척, 2차 건조 계획으로 30척, 총 65척의 신형 전선을 건조해야 한다니...이거 규모가 어마어마한데?”
올 3월에 한 척씩 건조한 신형 전선들은 한참 시범 운용 중이었기에, 슬슬 신형 전선 교체 사업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정성국은 마침 새한성으로 복귀한 김봉길에게 이를 맡겼었다.
그리고 이 보고서에 따르면, 모든 함대를 신형 전선으로 교체하려면 당장 1만 톤급 전선 5척, 5천 톤급 전선 20척, 3천 톤급 전선 40척을 건조해야 한다고 쓰여 있었기에 정성국은 그 규모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하자 김봉길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뭐 담당해야 하는 바다가 워낙 많으니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처음 군사연구소에서 올라온 보고서는 125척 규모였는데 제가 절반 가까이 줄인 겁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기존의 함대 규모를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흠. 어떻게 보면 함대마다 15척 규모이니 확실히 조금 부족해 보이기는 하는데...”
“뭐 신규 전선들의 크기가 크고 부착되는 무장까지 고려하면 전선의 숫자가 줄어들었어도 함대의 화력은 오히려 우월할 겁니다. 그리고 신규 전선들의 장갑을 생각해보면 어지간한 공격에는 피해를 볼 일도 없으니 충분하고...워낙 북미왕국의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다 보니 최소한의 숫자만 건조한 후, 상황을 봐서 추가로 건조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말입니다.”
정성국은 김봉길의 말에 공감했다.
전생에서도 근대에 기술이 빠르게 발전함에 따라 비싼 돈을 들여 구한 무기가 곧바로 구식 무기가 되어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 경우가 없지 않았기에.
특히 전생의 대영제국은 드레드노트라는 혁신적인 전함을 만들었지만, 이 드레드노트가 등장하면서 그 전에 건조되었던 전함들은 모조리 도태되어 버렸고, 그 도태되어 버린 구식 전함들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대영제국이었기에, 다시 해군력의 우위를 잡기 위해 수많은 드레드노트 급 전함을 건조하느라 막대한 돈을 퍼부었던 일화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고.
“흠...그건 그렇지. 헌데 건조 비용도 비용인데 이거 단기간에 건조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주명이한테 물어봤는데, 새김포에 있는 조선소뿐만 아니라, 새진주의 조선소에서도 동시에 건조를 시작할 생각이고, 두 조선소 모두 꾸준히 조선소의 규모를 확장해 건조 능력을 키워온 만큼, 그리고 철선 건조는 익숙한 만큼 5년이면 충분히 건조할 수 있을 거랍니다.”
김봉길의 대답에 정성국은 생각한 것보다 두 조선소의 건조 능력이 만족스러워 감탄했다.
물론 북미왕국은 많은 배가 필요하고, 건조 능력을 키우기 위해 여러 지역에 조선소를 다수 건설해 배를 만들고는 있었지만, 전선의 경우는 보안을 위해 새김포와 새진주의 조선소에서만 건조하고 있었기에 조금 걱정했던 탓이다.
“오오. 그렇다면야...헌데 지금 시험 운용 중인 신규 전선들은 별문제 없다던가?”
“예. 뭐 신규 전선들은 기존에 잘 운용해오던 철선들을 개조한 터라 큰 문제는 없답니다.”
“회전 포탑을 다수 장착해서 포격 시 반동이나 무게 중심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했는데...다행히 그렇진 않은 모양이군.”
이에 김봉길은 괜한 걱정이라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에이. 그동안 만든 배가 몇 척인데 그런 문제가 발생하겠습니까.”
김봉길의 말마따나 그동안 최주명과 장인들은 수없이 많은 배를 건조했고, 별다른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인 정성국은 입을 열었다.
“알겠네. 그럼 건조 계획을 승인하도록 하지.”
그러면서 정성국은 그 자리에서 보고서에 서명하고 김봉길에게 넘겨준 후 그 밑에 이는 또 하나의 보고서를 보고 중얼거렸다.
“이 보고서는...”
“해안경비대 창설에 관련된 보고서입니다.”
“아. 해군 탐사대를 확장, 개편해 해안선의 방어를 맡긴다고 하더니 결국 해안경비대라는 별도의 조직을 새롭게 창설하기로 한 건가?”
처음에 철선으로 신규 전선을 건조하고 이 신규 전선으로 함대를 구성하겠다는 말이 나오자, 기존의 전선들을 어찌 처리해야 하는지를 두고 해군 지휘관들은 고심하기 시작했다.
물론 건조한 지 오래된 전선이야 당연히 퇴역시켜야겠지만, 일부 전선들의 경우 선령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냥 퇴역시키긴 아까웠던 탓이다.
그리고 남태평양을 방어하는 5함대와 남태평양 탐사대의 관계가 꽤 효율적이라는 것에 착안해 북미 대륙의 해안가를 순찰하는 탐사대를 신설하고 기존의 전선을 이 탐사대에 배속해 순찰을 맡기고, 적을 발견하면 함대에 보고하고, 보고를 받은 함대는 곧바로 출동해 적을 섬멸하는 방어 체계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고.
여기에 현재 연구청에서 연구하고 있는 무선통신의 가능성까지 고려하자 이 방어 체계가 더 효율적이지 않겠냐는 해군 지휘관들의 의견에 군사연구소에서 해군 탐사대를 확장, 개편하는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다만 일부는 해군 탐사대가 아닌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맡기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보고서가 올라왔기에 결국 새로운 조직인 해안경비대를 창설하기로 정한 거냐고 묻자 김봉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처음엔 해군 탐사대를 확장할 생각이었는데, 자국의 해안을 경비하는 부대가 탐사대라는 이름을 쓰는 것도 조금 웃기지 않습니까.”
김봉길의 말에 찔리는 것이 많은 정성국은 헛기침하며 말했다.
“크흠. 이름이야 뭐...아무튼, 군사연구소에서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니 존중하도록 하지. 헌데 규모가 꽤 크네?”
보고서에는 해안경비대의 규모가 60척으로 적혀 있었고, 이는 기존의 2개 함대에 해당하는 규모였기에 단순히 해안가를 돌며 순찰하는 해안경비대의 규모치고는 너무 큰 것 아닌가 하는 표정을 하는 정성국이었고.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김봉길은 절대 아니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에이. 아국의 해안선이 좀 넓습니까? 이 해안선을 제대로 방어하려면 이 정도 규모는 되어야죠. 그래도 기존의 전선들을 재활용할 생각이니 이 정도 규모라 하더라도 큰 부담은 없을 겁니다만...”
“뭐 바로 배를 건조할 필요는 없으니 다행이긴 한데 이 배들을 운용할 인원을 따로 모집해야 하지 않나? 기존의 해군 병사들은 신규 전선에 태울 것 아닌가.”
정성국의 지적에 김봉길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건...그렇습니다만 해안경비대의 경우 해안의 순찰이 주 임무이니만큼, 최소한의 인원을 배치할 생각이라서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한 5천 명 정도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못해도 1만 명 이상을 생각한 정성국은 김봉길의 대답에 의외란 표정을 지으며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그렇다면야...이 건도 승인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정성국은 한참 전에 다 내려진 커피를 김봉길에게 건넸고, 김봉길은 활짝 웃으며 이를 받아들었다.
“여전히 전하께서 내려주신 커피는 맛있군요.”
“아부는...그보다 보고할 것은 다 한 건가?”
“아. 하나 더 남았습니다.”
그러면서 김봉길은 품에서 다른 보고서를 꺼내 정성국에게 건넸고, 정성국은 커피를 마시며 이 보고서의 내용을 확인하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흠...이건?”
“군사연구소에서 연구한 해군의 계급 체계입니다. 일전에 라위터르 경도 해군의 경우 육군과는 달리 명확한 계급 체계가 존재하지 않아 군인 간의 상하 관계가 불명확하고, 이 때문에 여러 혼란이 발생한다면서 명확한 지휘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해군도 육군처럼 최소한의 계급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고, 저도 그렇고 해군 지휘관들은 모두 명확한 계급 체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군사연구소에서 새롭게 계급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육군의 경우 특유의 계급이 존재했지만, 해군은 정식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하 관계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역할에 따라 함장, 사관, 병사로 나뉘었다.
다만 라위터르는 북미왕국의 해군의 이런 체계를 고치기만 하더라도 훨씬 효율이 높아질 거라고 지적했고, 이에 군사연구소에서 새로이 해군의 계급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보고서를 보고 중얼거렸다.
“흐음. 함대 사령관, 선임 함장, 함장, 부장, 선원이라...이거 육군의 계급 체계를 적당히 바꾼 건가?”
육군의 계급 체계는 대장, 총 조장, 선임 조장, 조장, 조원 이렇게 5계급으로 구분하고 있었고, 이번에 만들었다는 해군의 계급 체계는 이를 참고해 적당히 이름을 붙인 느낌이 났기에 정성국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자 김봉길이 답했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만...마음에 차지 않으십니까?”
이에 정성국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가뜩이나 육군의 계급 체계도 세분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상하 관계를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 계급 체계를 도입하려면 더욱 세분화하는 것이 맞는 것 같네.”
“뭐 그렇긴 하지요. 육군의 경우도 같은 계급이 많은 편이라 군인끼리 만나면 일단 임관일부터 따진다고 하니...”
“그래. 그러니 이렇게 하도록 하지.”
정성국은 기존의 계급을 세분화시킬지, 아니면 자신에게 익숙한 전생의 계급 체계를 가져올지 잠시 고민했지만, 기존의 계급을 세분화하면 계급 이름을 새로 만들어야 했는데 자신의 작명 실력으론 버거웠기에 익숙한 전생의 계급 체계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장교 계급의 통일성을 위해 준장을 없애고, 준사관인 준위도 없애 나름 간략화한 전생의 계급 체계를 보고서 뒷장에 적은 정성국은 이를 김봉길에게 넘겼고.
“으음...크게는 3개의 계급으로 나뉘고, 그 계급 안에서 다시 계급이 나뉘어 계급 간 상하 관계를 명확히 하는군요. 괜찮은데요?”
“그런가?”
“헌데 장교 계급이 너무 세분된 것 아닙니까? 실질적으로 장교의 숫자가 제일 적을 텐데 9개의 계급으로 나누면...”
하지만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위관급, 영관급, 장성급은 같은 장교라고 하더라도 역할이 달라. 그리고 맡은 역할 안에서 3개의 계급으로 나뉘는 셈이라 오히려 병사 계급과 부사관 계급이 더 세분화되었다고 봐도 되고.”
“아.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그래서 장교 계급과는 달리 부사관 계급, 병사 계급은 명칭에도 통일성이 없는 건가요?”
“어...뭐 그렇지?”
처음엔 아예 부사관과 병사 계급도 3개로 나누고 붙이는 단어를 통일하려고 했지만, 어감도 이상하고 영 익숙하지 않았기에 전생의 계급 체계를 그대로 복사한 정성국이 김봉길의 물음에 자신 없는 표정으로 대답하자 김봉길은 왠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고.
이에 정성국은 헛기침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크흠. 아무튼, 일단 이 계급 체계를 더 연구해서 해군에 도입해 보게. 그리고 괜찮다 싶으면 이 계급 체계를 육군에도 도입할 생각이고.”
“알겠습니다. 허면 군사연구소에 이를 연구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