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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591화 (591/850)

591화

정성국은 집무실을 방문한 조용한 곰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몹시 피곤해 보이는 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휴우. 대사들에게 하도 시달려서 말입니다.”

“음?”

이에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정성국이 조용한 곰을 바라보자 조용한 곰이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조선 사절단을 통해 조선에서 벌어졌던 여러 전투에 관해 상세히 알게 되었고...자연스레 기관총의 존재를 알게 되어서 말입니다.”

조용한 곰이 기관총을 입에 올리자 정성국은 상황을 대충 짐작하고 피식 웃었다.

“아. 기관총의 실물을 한번 보고 싶다거나 팔아달라고 조른 모양이군.”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대사들을 만났던 기억이 떠오른 것인지 질린 표정으로 다시 한숨을 내쉬고 답했다.

“예. 팔지 않는다고 단언했는데도 아주 집요하게 요구하더군요.”

정성국은 그런 조용한 곰의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유럽에서도 전쟁이 계속되다 보니 기관총이 더욱 탐났던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실제로 용암포 전투에서 10대의 검차가 장착된 기관총으로 대규모 청나라 기병을 일방적으로 섬멸했다는 것 때문인지 각 나라의 대사들은 기관총을 어떻게든 구하기 위해 집요하게 애썼습니다. 특히, 인구가 적고 프랑스 육군에 비해 병력 규모가 적은 네덜란드 대사는 기관총을 팔 생각이 없다는 아국의 방침을 바꾸기 위해 기관총 가격으로 기관총 무게의 2배에 달하는 금을 제시하더군요.”

정성국은 네덜란드 대사의 제안을 듣고 감탄사를 토해냈다.

“와우. 기관총의 본체 무게만 하더라도 20kg일 건데...기관총 한 정에 금 40kg을 주겠다고? 그럼 지금 생산 중인 기관총을 모두 네덜란드에 팔아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예상보다 어마어마한 제안에 정성국이 혹하는 표정으로 그렇게 이야기하자 조용한 곰이 기겁하며 말렸다.

“어? 가뜩이나 신식 소총만으로도 골친데 여기서 기관총까지요? 그거 감당 안 될 겁니다.”

신식 소총은 북미왕국을 적대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목줄이나 다름없었고, 유럽 각국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신식 소총의 성능이 머스킷보다 훨씬 우월하다 보니 유럽 각국은 어떻게든 신식 소총을 구하려고 애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유럽 각국은 어떻게든 더 많은 신식 소총을 구하려 애를 썼고, 또 적대적인 국가가 북미왕국에 신식 소총을 구매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득달같이 달려와 자신에게도 더 팔아 달라고 하소연했고.

덕분에 조용한 곰이나 웅크린 늑대는 신식 소총 문제로 유럽의 외교관들에게 꽤나 시달렸는데, 기관총을 판매하게 되면 더 시달릴 것이 뻔했다.

해서 조용한 곰이 기겁하며 손을 내젓자 정성국이 그런 조용한 곰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농담일세. 무기 판매는 정말 여러 외교적인 사안을 고려해야 하는 터라 동맹을 제외하면 팔지 않는 것이 속 편한 듯싶고. 헌데 네덜란드 대사가 그런 조건을 내걸 정도라면, 네덜란드의 상황이 썩 좋지 않은 모양이군. 여전히 프랑스가 유리한 건가?”

북미왕국에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를 판매하고 얻을 자금으로 군대를 재정비하고 용병을 구한 덴마크가 스웨덴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북유럽의 전쟁은, 스웨덴의 동맹인 프랑스가 참전하고, 그런 프랑스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네덜란드, 에스파냐, 신성로마제국 등이 참전하며 유럽 전체로 확대되었다.

다만 스웨덴은 덴마크를 상대하는 것도 벅차했기에 이번 전쟁에서 큰 존재감이 없었기에 실질적으로는 반프랑스 동맹이 프랑스를 압박하는 모양새였고, 이 때문에 처음 유럽의 지식인들이나 외무청에서는 루이 14세의 콧대가 꺾일 것으로 짐작했지만, 의외로 전황은 프랑스에 유리했다.

물론 중간중간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네덜란드군이나 에스파냐군이 몇몇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적이 있긴 한데 그것도 한때였고 최근엔 계속 프랑스에 밀리고 있다고 들었던 정성국이 조용한 곰에게 현 유럽의 정세에 관해 묻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타국도 작열탄을 개발해 하나둘 도입하고 있지만, 이미 그 전에 작열탄을 사용하는 프랑스 함대에 큰 피해를 본 상태이기도 하고, 프랑스는 작열탄 생산이 궤도에 올랐는지 최근엔 프랑스 해군뿐만 아니라 프랑스 육군도 작열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니 네덜란드로선 북미왕국의 무기에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 때문에 기관총뿐만 아니라 이전에 문의했지만 거절했던 후장식 화포 등도 다시 구매를 타진했었고, 얼마를 주더라도 기관총, 후장식 화포 등을 판매할 생각이 없다고 단언하자 네덜란드 대사는 한숨을 내쉬며 그렇다면 신식 소총이라도 더 팔아 달라고 제안했다는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정성국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흠. 신식 소총을 말이지?”

“예. 그리고 덴마크와 에스파냐 역시 더 많은 신식 소총의 구매를 원하고 있고, 이는 조선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뭐 무기 제조 공방의 확장도 끝났으니, 팔지 못할 것은 없는데...”

유럽에서 주문한 신식 소총 구매 물량이 워낙 많아, 정작 동맹인 조선조차 신식 소총을 구매하지 못하고 있었고, 맹수를 쫓기 위해 화약 무기가 필요한 북미왕국의 백성들 역시 물량 부족으로 예약을 하더라도 짧게는 반년에서 길게는 3, 4년이나 기다려야 했으니 이런저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해서 정성국은 강평화에게 말해 계속해서 신식 소총을 생산하는 무기 제조 공방을 확장했고, 최근에야 비로소 신식 소총 생산량을 대폭 늘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신식 소총의 물량이 없지는 않았지만, 현 상황에서 유럽에 일부라도 신식 소총을 판매하기 시작하면, 다른 나라가 가만히 있겠는가.

“예. 조선은 몰라도 유럽에 판매하면 다른 국가들도 주문 물량을 더 늘릴 겁니다. 뭐 이를 통해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은 좋지만, 유럽에만 너무 많은 신식 소총이 풀리는 것도 조금...”

조용한 곰이 말을 흐리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결정을 내렸다.

“그렇지. 흠...어차피 무기 제조 공방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저들이 알지는 못할 테니 거절하도록 하게. 그리고 지금처럼 추가 주문도 받지 말게. 이유야 적당히 둘러대고.”

“뭐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나 호주 연합 등의 주문이 쌓여 있어 당분간 유럽에 돌릴 물량이 없다고 둘러대겠습니다만...조선에는 판매해야 하지 않습니까?”

애당초 무기 제조 공방을 확장한 이유가 조선에 필요한 무기를 생산하기 위해서였기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우리가 전쟁 배상금을 억 소리 나게 책정한 이상, 청나라가 순순히 이를 받아들일 리는 없고, 협상이 결렬되면 다시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을 테니까. 지금까지 조선에 넘어간 신식 소총은 5천 자루지?”

“그렇습니다.”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예전에 평화가 보고한 내용을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잠시 계산해보다가 말했다.

“허면 평화에게 이야기해 신식 소총 1만 5천 자루를 아무리 늦어도 9월까지 생산해 넘겨줄 테니 이를 귀띔해주도록 하게. 그래야 조선에서도 미리 준비할 테니.”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사들에게 시달린 것을 하소연하다가 유럽의 정세와 신식 소총 판매 문제를 정리한 조용한 곰은 정성국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제가 전하를 방문한 이유는 국영 상단과 함께 행동하는 외무청 관리를 통해 흥미로운 보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보고?”

정성국이 고개를 갸웃하자 조용한 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준가르와 접촉해 성공적으로 교역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 그래? 허면 준가르의 갈단 칸을 만난 건가?”

준가르의 지도자는 대대로 홍타이지라고 불리지만, 현 준가르의 지도자인 갈단은 준가르를 장악하고 오이라트의 내부를 정리해 달라이 라마 5세의 인정을 받아 모든 오이라트를 이끄는 맹주라는 의미의 칸이라는 칭호를 수여 받았기에 칸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 5세가 갈단을 칸으로 인정했기에 모든 오이라트 부족들은 갈단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갈단에게 순순히 복종했고.

이 갈단 칸이 인류 역사상 마지막 유목 제국인 준가르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몽골의 부활을 위해 청나라와 다투다 결국 강희제에 의해 패배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정성국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조용한 곰에게 묻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이번에 외무청 관리와 국영 상단이 접촉한 부족은 오이라트 계의 부족이기는 한데 변방의 작은 부족에 가까우니까요. 다만 이 부족과 생필품을 거래하면서 준가르의 정보를 수집해 가능하다면 준가르의 갈단 칸을 만날 기회를 잡을 생각이었는데...”

“생각이었는데?”

“현재 갈단 칸은 원정을 떠났다는군요.”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원정? 어디로?”

“남방 원정을 성공한 후 곧바로 다시 서방 원정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갈단 칸이 오이라트의 지배권을 거의 장악했을 때, 천산산맥 남쪽의 위구르인들은 종교 문제로 다투다가 갈단 칸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중앙아시아 지역을 노리고 있던 갈단 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방 원정을 감행해 천산산맥 남쪽의 광활한 영역을 모두 점령했는데, 이곳이 바로 전생의 신강 위구르 지역이다.

그리고 준가르의 영역을 남쪽으로 대거 넓힌 갈단 칸은 다시 서쪽으로 눈을 돌려 카자흐 칸국을 공격 중이라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갈단 칸 시절에 준가르의 영역이 전생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까지 뻗어 나갔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렇게 영역을 확장한 서방 원정이 지금 시기에 시작되었음을 깨닫고 중얼거렸다.

“그래? 허면 갈단 칸을 만나기가 쉽지 않겠군.”

“그렇습니다. 북미왕국의 공식 사절이나, 혹은 연합에 부탁해 연합의 사절 자격으로 방문한다 하더라도 갈단 칸을 만나려면 중앙아시아까지 이동해야 하니까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흠...그럼 국영 상단 소속으로 준가르와 접촉한 외무청 관리에게 바로 연락을 보내 준가르가 서역 원정을 끝내기 전까진 괜히 무리하지 말고 교역에 집중하라고 전하게.”

“일단 준가르에게 믿을 수 있는 상대라는 인식을 심어주라는 뜻이로군요? 알겠습니다만...전하께서 준가르에 공을 들이시는 것은 단순히 준가르와의 교역 때문이 아니라 준가르를 청나라를 견제할 하나의 패로 생각하시기 때문 아닙니까?”

조용한 곰의 말처럼 정성국이 준가르와의 교역에 관심을 두는 것은 교역을 통해 준가르의 힘을 키워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이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허면 북미왕국의 사절이라는 것을 밝히고 공식적으로 준가르와 접촉해 갈단 칸과 협상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함께 청나라를 치자고 협상하자?”

“그렇습니다. 지금도 청나라는 사방이 적이라 곤란한데, 여기에 준가르마저 합류해 서쪽에서 공격하면 청나라는 버티기 어려울 겁니다.”

조용한 곰의 말처럼 현 상황에서 준가르마저 청나라를 공격하면, 청나라로서는 솔직히 버티기 쉽지 않을 터였다.

정말 사방이 적이었으니.

다만 청나라가 망해봐야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정성국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확실히 그렇지. 다만 청나라가 멸망하는 건 우리로서도 좋을 것이 없네.”

“예?”

“그렇잖나. 청나라가 망하면 그 땅을 누가 차지하겠나.”

“음...”

정성국의 질문에 조용한 곰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정성국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우리나 연합은 당연히 논외로 치고. 조선이 중원을 차지한다고 한들 유지를 못 해 망할 테고 마찬가지로 동녕국 역시 중원 전체를 장악하긴 어려워. 기껏해야 가까운 복건성이나 절강성 정도를 장악하는 것이 전부겠지. 그리고 주나라는 오삼계가 명망이 있는 인물이 아니고 옛 명나라 장수들은 오삼계를 혐오하니 중원 전체를 삼키긴 어렵지. 그리고 준가르가 중원을 장악하는 것은 또 다른 원나라의 탄생이나 마찬가지라 썩 좋을 것 없고.”

정성국의 말이 끝나자 조용한 곰은 유심한 눈빛으로 정성국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허면 전하께선 어느 한 세력이 중원을 장악하길 원치 않으시는 거군요.”

이에 정성국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중원은 땅도 크고 인구도 많지. 그러니 가능하다면 한 세력이 중원을 모두 장악하는 것보다 적당히 나누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러니 지금 준가르가 청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나을 것 없고, 또 몽골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갈단 칸이라면, 분명 청나라나 몽골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을 테니 굳이 북미왕국에서 준가르를 설득하기 위해 애쓸 필요 없다고 덧붙이자 조용한 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허면 당분간은 교역에만 집중하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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