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화
강소성에서 진행된 북미왕국과 청나라 간의 외교 협상이 결렬된 이후 정일신과 3함대는 정비를 위해 제주도로 이동했지만, 투로시노는 조선에 이번 협상이 결렬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인급 전선을 타고 다시 제물포로 향했다.
그리고 투로시노가 제물포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한양에 전해지자, 이전처럼 유철이 곧바로 제물포로 달려왔고.
“협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혹시...”
배에 오를 때부터 초조한 기색이던 유철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선실로 들어오자마자 자리에 앉기도 전에 급히 투로시노에게 협상 결과를 묻자 투로시노는 그런 유철의 반응에 빙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청나라와의 평화 협상은 결렬되었습니다.”
“오오! 그렇소이까?”
“예. 새한성에서도 이번 전쟁으로 청나라와의 관계가 틀어진 이상, 청나라를 견제하는 것이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투로시노의 대답에 지금까지 초조하게 협상 결과를 기다렸던 유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렇습니까? 참으로 다행이군요.”
약 한 달 전, 투로시노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투로시노 개인의 생각도 그렇고 새한성에서도 전쟁을 길게 끌어봐야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 때문에 부담이 커지는 만큼, 가능하다면 전쟁을 빨리 끝내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이야기했었기에, 내심 이번 협상으로 북미왕국이 청나라와 화친을 맺을까 봐 자신뿐만 아니라 조선의 신료들이 이번 협상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유철의 반응에 투로시노는 입가에 머물던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유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만 협상이 결렬된 이상, 지금껏 조용히 압록강에서 대치 중이었던 청나라군이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청나라에서 추가 병력을 파견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조선에서도 이를 충분히 대비하셔야 할 겁니다.”
현재 압록강에서 대치 중인 청나라군이 다시 움직이며 전투가 벌어질 수 있다는 투로시노의 경고에도 유철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조선에서는 이번 협상이 결렬될 것을 대비해 벌써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물론입니다. 그리고 청나라군 역시 이전에 호되게 당했으니 더욱 조심히 병력을 운용할 거라 예상되는 만큼, 다른 지역에 배치된 화포들도 이미 북방으로 올려보냈고, 추가 병력을 배치할 생각이니까요.”
“오. 그렇습니까? 헌데 북방에 배치할 병력이 있습니까?”
어차피 동원할 수 있는 정예병은 모두 북방으로 올려보낸 것이 아니냐는 표정을 짓는 투로시노를 보고 유철이 답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광산에서 금과 은을 캐내면서, 재정에 여유가 생겼기에 어영청 규모를 대폭 확대할 생각입니다.”
각지의 광산에서 금과 은을 채굴하기 시작하자 조선의 재정은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렇기에 지금껏 북미왕국에 무상으로 제공받던 물자의 가격을 치러 북미왕국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 했지만, 북미왕국에서는 어차피 나중에 청나라에 그 비용만큼 배상금으로 뜯어내면 그만이니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다.
해서 조정 대신들은 이 자금을 어디다 써야 할지 의논했지만, 현재 청나라와 전쟁 중이고, 청나라가 병력을 추가 증원한 만큼, 조선 역시 병력을 추가로 모집해 북방에 배치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했고.
조선군의 경우 태반이 조총으로 무장했기에 화력이 부족한 편이라 병력의 차이가 크면 청나라군을 상대하기 어렵고 설사 승리한다 하더라도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되는데, 현재 북방에 배치된 병력은 조선군의 전부나 다름없다 보니 이 병력이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조선군의 화력이 약하다는 사실은 조선 지원군에서도 잘 알고 있기에 이동형 60mm 화포를 운용하는 병력 일부를 조선군 진영에 배치하기도 하고, 탐사대 역시 용암포와 의주 사이에 배치해 만약의 경우 조선군을 빠르게 지원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지만, 조정 신료들은 아무래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설명에 투로시노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 유철이 끝으로 웃으며 말했다.
“거기에 청나라의 사정이 좋지 못해 북미왕국에 화친까지 청했을 정도인데 과연 병력을 추가로 파병할 수 있겠습니까?”
“어...흠. 그게...”
자신의 말에 맞장구칠 줄 알았던 투로시노가 조금 곤란한 기색을 보이자 유철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음? 뭐 걸리는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이에 투로시노는 머리를 긁적이다 어차피 조선에서도 상황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아, 당시 협상장에서 협상이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 모두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유철은 북미왕국에서 전쟁배상금으로 무려 10억 원을 책정했다는 이야기에 입을 쫙 벌리며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 전쟁배상금을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청나라 예부 상서에게 땅으로, 그것도 만주를 넘기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는 투로시노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만주라니요. 협상을 깨기 위해서라면 10억 원을 고수하기만 해도 충분했을 것 같습니다만...아! 설마 청나라를 도발할 생각으로 일부러 만주를 언급하신 겁니까?”
투로시노 역시 청나라를 몇 번 다녀오면서 청나라의 사정을 모르지 않을 텐데 청나라인들이 고향으로 여기는 만주를 언급한 것은 의도가 있다고 여겨 유철이 투로시노에게 묻자 투로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도 하고 추후 협상을 위해 미리 말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겼습니다.”
“추후 협상이요?”
“예. 물론 당장이야 지금처럼 청나라와 대치하면서 청나라의 국력을 깎아 먹는 것도 괜찮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쪽도 좋을 것이 없습니다. 저희나 조선, 그리고 연합 모두 한창 발전해야 할 시기 아니겠습니까.”
“으음...그렇기는 한데...”
투로시노의 말처럼 계속해서 전쟁이 길어지면 조선도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유철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말을 흐리자 유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짐작한 투로시노가 유철을 다독였다.
“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사 저희가 청나라와 화친을 맺는다 하더라도, 이번 전쟁으로 숨통이 트인 주나라, 동녕국이 성장해 청나라를 견제해 줄 테니까요.”
투로시노의 말처럼 된다면야 조선으로서는 이상적이긴 했다.
다만 주나라와 동녕국은 청나라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그 때문에 청나라는 조선을 공격할 생각을 한 것 아닌가.
해서 유철은 회의적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흠. 과연 주나라와 동녕국만으로 청나라를 견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만주를 언급한 겁니다. 그리고 이건 단순한 도발이 아니라 실제로 만주를 얻을 생각이고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만주를 얻을 생각이라고 이야기하는 투로시노를 보고 유철이 표정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물론 북미왕국의 의도대로 만주가 북미왕국의 영토가 되면 청나라는 황도의 안전을 위해 예전 명나라처럼 병력 상당수를 북경과 산해관을 비롯한 국경에 다수 배치해야 하니 청나라는 주나라와 동녕국을 상대하는데 전력을 다하지 못하긴 하겠습니다만...과연 청나라 황제가 고향인 만주를 포기하겠습니까?”
“예. 어떻게든 만주를 지키려 하겠지요. 다만 계속해서 주변국과 전쟁을 치르며 재정이 말라가기 시작하면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고...그때 만주 전체가 아니라 만주 일부만으로 화친을 맺을 수 있다면 청나라 황제는 어떤 선택을 내리겠습니까.”
그러면서 빙긋 웃는 투로시노를 보고 처음부터 북미왕국이 원하는 것은 만주 전체가 아니라 만주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유철은 급히 질문을 던졌다.
“만주 일부? 혹시 북미왕국이 어느 지역을 원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흠...”
자신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는 투로시노를 보고 유철이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마 제가 입을 섣불리 놀리겠습니까.”
이에 투로시노는 어차피 이번에 획득할 영토는 조선에도 넘길 생각이었기에 미리 언질을 줘야 한다고 판단해 유철에게 믿겠다고 이야기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선실 한쪽의 선반에서 동아시아 지역의 지도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그리고 손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본국에서는 이 지역들을 원하더군요.”
“으음...”
유철은 투로시노가 가리키는 지역들을 보고 신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손으로 조선 북쪽에 나 있는 아무르 강과 우수리 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두 강 너머야 만주의 외곽이니 북미왕국이 10억 원 대신 이 지역들을 원한다면 청나라도 쉽게 포기할 겁니다. 허나 요동은 다릅니다.”
“아. 물론 요동이 넘어가면 청나라로서는 강하게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투로시노는 여전히 요동을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기에 유철은 그 말을 끊었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예?”
자신의 반응에 어리둥절한 투로시노를 보고 유철은 손으로 지도에서 심양이라고 적혀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 요동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심양은 청나라가 나라를 세웠을 당시의 수도였습니다.”
“그런가요?”
“예. 그렇기에...이곳엔 역대 황제들의 무덤이 존재하지요.”
“어? 아...”
그제야 투로시노는 청나라가 심양을 절대 포기하지 못할 거라는 유철의 이야기를 이해했고, 유철은 그런 투로시노의 반응에 덧붙여 말했다.
“그나마 현 황제의 부친인 전대 황제는 북경 인근에 묻혔습니다만...그 외에는 모두 심양 인근에 묻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역대 황제는 모두 심양에 있는 황릉을 관리하는데 무척 신경을 썼습니다. 그러니 정말 청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청나라는 결코 심양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유철의 이야기에 투로시노가 뭐가 문제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흠. 그럼 심양을 제외하면 되겠지요. 중요한 것은 청나라를 압박할 수 있는 요동반도의 획득이니까요. 그게 아니면, 정말 청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몰아붙여도 되고요.”
그 강대한 청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는 듯 이야기하는 투로시노를 보고 혀를 내두르던 유철은 지도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어 투로시노에게 질문을 던졌다.
“헌데 북미왕국은 인구가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지역들은 인구가 많은 지역도 아닐 텐데 이를 어찌 관리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이에 투로시노는 별다른 대답 없이 빙긋 웃으며 유철을 바라보았고, 그런 투로시노의 행동에 어리둥절하던 유철은 곧 그 의미를 깨닫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예. 본토에서는 이번에 확보하게 될 땅들은 동맹에게 넘기거나 독립시킬 생각이지, 직접 통치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헉! 그럼 청나라를 압박해 요동을 얻게 되면 저희가 요동을?”
이에 투로시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철은 충격을 받은 듯 입을 쫙 벌렸다.
“맙소사...”
고려 때까지는 어떻게든 요동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조선 초기에도 요동을 탐내긴 했지만, 명나라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청나라가 건국되고 호란을 겪으면서 청나라가 강성하다는 것을 깨달은 조선은 요동을 얻을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헌데 그동안 멀게만 느껴졌던 요동의 일부를 어쩌면 조선이 획득할 수도 있다는 말에 잔뜩 흥분한 유철이 몸을 덜덜 떨다가 문득 의문이 들어 급히 투로시노를 바라보고 물었다.
“헌데 북미왕국이 청나라와 협상해 얻게 되는 영토를 모두 동맹에 넘기거나 독립시키면, 북미왕국은 손해만 보게 되잖습니까?”
이에 투로시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손해라니요. 어차피 그 땅을 쥐고 있어 봐야 개발할 인력이 부족해 방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를 동맹에 넘기면 동맹의 영역이 넓어지고 이를 통해 동맹국이 강해지고 부유해진다면 오히려 북미왕국에도 이득인 것을요.”
“허...”
물론 북미왕국이 조선에 우호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조선의 영토 획득까지 도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유철은 투로시노의 말에 감동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투로시노가 유철에게 말했다.
“아. 다만 이 부분도 조금 함구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이런 소문이 돌아봐야 뭐 좋겠냐는 투로시노의 말에 유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전하께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영토 문제를 자신만 알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냐는 유철의 말에 투로시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뭐...그러시지요. 다만 사관이나 내시들의 입을 통해 말이 흘러나가지만 않게 해주시지요.”
“아. 그야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