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7화
알바진 요새를 점령한 아이누 탐사대장은 현 아무르 강 유역의 사정을 빠르게 본국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여겨, 일단 이르쿠츠크 요새로 전령을 보내는 것과는 별개로 동쪽으로도 전령을 보냈다.
알바진 요새에서 동쪽으로 약 13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아이누 섬이 있으니, 이르쿠츠크 요새에 소식을 전하고, 이곳에서 다시 레나 요새로, 레나 요새에서 카무이 반도로 소식을 전하는 것보다야 직접 아이누 섬에 소식을 보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해서 전령은 아무르 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한 끝에 타타르 해협에 도달했고, 얼어붙은 해협이 녹는 동안 주변 원주민 부족과 접촉해 조그마한 배를 구한 후 해협을 건널 수 있게 되었을 때, 아이누 섬으로 건너가 다시 남하해 아이누 섬 중간에 있는 광산 도시인 포로시르에 도달했고, 이곳에서 정기선 편으로 포로나이에 도착, 곧바로 포로나이의 외무청 관리에게 현재 아무르 강 유역의 상황과 아이누 탐사대장의 보고서를 전달했고.
이 보고서들은 곧바로 쾌속선에 실려 북미왕국으로 도착했으며, 이 보고서를 확인한 조용한 곰은 급히 정성국의 집무실로 달려가 이를 보고했다.
“허. 알바진 요새 사령관이 청나라에 항복해버렸다? 그래서 연합이 청나라와 전쟁을 벌인 건가?”
계획과는 달리 연합이 청나라와 전쟁을 벌인 이유가 그 빌어먹을 알바진 요새 사령관의 수작 때문이라는 보고에 정성국이 혀를 차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알바진 요새에 남아있던 러시아인들의 이야기로는 알바진 요새 사령관은 이전에 북미왕국의 배를 공격했던 일로 연합에 항복한다 한들 앞날이 불투명하다고 무척 걱정한 모양입니다. 북미왕국에 끌려갈 수도 있고, 설사 러시아 차르국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모스크바로 끌려갈 확률이 다분하니까요. 그 때문에 연합의 병력이 네르친스크에 도달했다는 소식에 곧바로 청나라로 귀부했고요.”
“거참...”
“아무튼, 당시 연합의 병력을 지휘하던 아이누 탐사대장은 이 사실을 파악하고 알바진 요새에 주둔해 있는 청나라 지휘관에게 사절을 보내 연합과 러시아 차르국이 맺은 조약에 관해 알리고 즉각 알바진 요새에서 퇴거하라고 요구했지만, 청나라 지휘관은 아무르 강 유역은 러시아 차르국의 영역이 아니라 청나라의 영역이라며 연합이 러시아 차르국과 맺은 조약은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자 정성국은 당시 알바진 요새를 공격하기로 한 아이누 탐사대장의 선택을 이해하고 중얼거렸다.
“흠. 청나라 지휘관이 연합과 러시아 차르국이 맺은 조약을 무효라고 주장한 상황에서 물러나면 연합이 알바진 요새를 포기한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 바로 알바진 요새를 공격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전하. 해서 알바진 요새를 격파하고, 인근에 있는 청나라 진영도 파괴했다고 합니다.”
아이누 탐사대장은 가지고 간 이동형 60mm 화포를 이용해 손쉽게 알바진 요새를 격파했고, 어차피 청나라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상 빠르게 적의 거점을 파괴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 곧바로 얼어붙은 아무르 강을 넘어 아무르 강 남쪽에 있는 청나라 진영도 공격해 진영을 부수고, 청나라군의 항복을 받아내었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아이누 탐사대장의 판단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잘 했군. 어차피 청나라와의 전쟁이 벌어진 이상 근처에 있는 청나라 진영을 놔둘 이유가 없긴 하지.”
이에 조용한 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예. 그리고 청나라는 아무르 강 유역의 영향력도 모두 상실한 셈이지요.”
“아? 푸하하하. 그동안 우리가 청나라군에게 수송한 물자로 그렇게 주변 부족에 공을 들였는데 그게 모두 날아갔다는 건가?”
조용한 곰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하던 정성국은 곧 박장대소하며 묻자, 조용한 곰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만약 아이누 탐사대장이 네르친스크로 회군했거나, 혹은 알바진을 두고 오래 대치했다면, 주변 부족들이 그동안 교류해왔던 청나라의 편을 들었겠지만, 아이누 탐사대장은 청나라 지휘관이 철수를 거부하자마자 곧바로 알바진을 격파하고, 곧바로 강 건너 청나라 진영도 파괴함에 따라 주변 부족들은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된 연합이 생각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야 그렇겠지. 주변 부족이라 봐야 그렇게 대부족도 아닐 텐데, 청나라를 돕겠다고 북방에 주둔한 청나라군을 단숨에 격파한 연합과 적대한다는 결정을 내릴 부족장이 있겠어?”
약소 부족이야 생존을 위해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특히 아무르 강 유역의 부족들은 그동안 러시아 차르국과 청나라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그때그때 강성한 세력의 편에 붙어 생존해왔을 테니 정성국이 현지 사정을 짐작하고 대꾸하자 조용한 곰은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아이누 탐사대장은 청나라군을 격파하자마자 주변 부족들에 사람을 보내, 연합이 러시아 차르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둬 아무르 강 유역의 지배권을 넘겨받았다는 사실과 알바진 요새에 주변 부족들이 필요로 하는 식량 및 생필품을 거래할 수 있는 대규모 시장을 만들 계획이라는 것을 알렸답니다.”
아이누 탐사대장은 주변 부족을 연합으로 유인하고, 알바진 요새를 연합의 남부 거점 중 하나로 키우기 위해 알바진 요새에 주변 부족들이 모두 와서 거래할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시장을 건설하겠다고 이야기했다는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정성국이 나쁘지 않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필요한 물자를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어려운 시베리아 지역에서 시장이 갖는 의미는 생각보다 컸기에.
“시장? 아. 알바진을 확보했으니 아무르 강을 이용해 아이누 섬에서 바로 각종 물자를 보낼 수도 있으니...”
“예. 거기에 이번에 연합이 러시아 차르국과의 조약을 통해 확보한 연합 남부 지역으로 보내야 하는 물자 역시 알바진을 통해 육로로 수송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머릿속에서 시베리아 지역의 지도를 떠올리고 중얼거렸다.
“흠. 아무래도 기존의 수송 경로는 엄청 돌아가는 편이기는 하니 차라리 육로로 보내겠다는 건가?”
이에 조용한 곰은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육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배를 이용하는 것이 대량 수송에 적합하긴 합니다만, 기존의 수송 경로는 너무 돌아가게 되고, 여름 한 철에만 이용할 수 있으니 단점도 많아서 말입니다.”
“그렇긴 해. 또한, 기존의 수송 경로대로 레나 강을 이용해 이르쿠츠크까지 물자를 운송한다고 해도, 어차피 이르쿠츠크에서 주변에 물자를 보내야 하는 것까지 생각하면야...아무르 강을 이용하는 편이 낫긴 하지. 그리고 이미 아무르 강에 배치된 청나라군을 모두 격파했으니 수송선이 공격받을 일도 없을 테고. 허면 아무르 강 유역에 사는 주변 부족들의 반응은 어떻다던가?”
정성국이 연합의 회유에 주변 부족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해 묻자 조용한 곰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고 합니다. 물론 연합이 알바진 요새에 커다란 시장을 만들면 좋기야 한데, 단순히 시장을 만든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거래할 물건이 필요한데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된 연합이 과연 이러한 물품들을 생산할 수 있을지 의문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물론 처음에는 말입니다.”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차차 시간이 흐르면 주변 부족을 회유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다가 조용한 곰이 마지막에 덧붙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음? 처음에는? 그럼...”
이에 조용한 곰인 씩 웃으며 대답했다.
“헌데 연합이 북미왕국과 동맹이라는 것과 알바진 요새에 새로 건설할 시장에 북미왕국의 상인들이 방문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리자 반응이 무척 열광적이었다고 하더군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그동안 아무르 강 유역의 청나라군에게 물자를 공급했던 사실을 떠올리고 중얼거렸다.
“아. 그동안 아무르 강을 이용해 청나라군에 물자를 수송하다 보니 주변 부족들도 북미왕국의 존재를 알고 있었나 보군.”
“그렇습니다. 아무르 강 유역에 사는 부족들은 이전에 아무르 강을 오가는 북미왕국의 수송선이 신기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배도 크고, 또 돛이나 노도 없이 스스로 움직인다고 보일 테니까요.”
확실히 아무르 강을 오가는 북미왕국의 배는 아무르 강 유역에 사는 부족들이 보기엔 신기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이에 관심을 보였을 것이라고 짐작해 정성국이 미소를 지을 때, 조용한 곰이 계속 설명했다.
“거기에 북미왕국의 배가 청나라군에 물자를 수송하기 시작하면서 물자가 넉넉해진 청나라군이 주변 부족과 거래했었는데, 아시다시피 작년에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저희와의 거래를 끊어버리지 않았습니까?”
강희제는 교역을 빌미로 북미왕국을 회유하려 했지만, 북미왕국은 절대 조선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에 강희제는 즉각 교역을 끊어버렸다.
덕분에 작년에는 청나라와 교역이 끊겼고, 그동안 아무르 강 유역에 주둔해 있던 청나라 진영에 물자를 공급하던 국영 상단의 수송선도 방문하지 않게 되면서, 자연히 아무르 강 유역은 이전처럼 물자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음을 직감한 정성국이 눈을 크게 떴다.
“아. 설마?”
“예. 맞습니다. 작년에는 갑자기 청나라군이 물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래를 일방적으로 축소하고, 또 거래 조건도 박해져서 내심 불만을 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북미왕국의 배가 안 보이고, 앞으로도 북미왕국의 배는 아무르 강 유역으로 오지 않을 거라는 청나라 병사들의 이야기에 다시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거라는 불안감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상황을 짐작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뭐 몇 년간 풍족하게 지내다가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니 내심 불만이 컸던 모양이군.”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세상사가 다 그런 법이지요. 헌데 연합이 북미왕국과 동맹이라 알바진에 북미왕국의 상인들이 드나들어 주변 부족에게 필요한 각종 생필품을 거래할 거라 약속하니 당연히 환호할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아무르 강 유역에 사는 부족들은 일단 연합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이 사실을 전달받은 아이누 섬에서는 즉각 알바진 요새로 수송선을 급파했다고 합니다.”
조용한 곰의 말에 포로나이에서 알바진 요새까지의 거리를 머릿속에서 떠올린 정성국이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쯤이면 아무르 강 유역에 사는 부족들은 거래를 위해 알바진 요새로 몰려갔겠군.”
쾌속선이 빠르다고 한들, 포로나이에서 알바진 요새는 훨씬 가까웠기에, 지금쯤이면 각종 물자를 실은 수송선들이 아무르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알바진에 도착해 가져온 산더미 같은 물자를 내리고도 남을 시간이라는 것을 짐작한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그리고 알바진 요새에 시장이 생긴 이상, 아무르 강 유역에 사는 부족들은 연합을 지지할 수밖에 없으니, 혹여 북방의 소식을 듣게 된 청나라가 다시 병력을 파병한다 하더라도, 연합의 편에 설 수밖에 없겠지요.”
북미왕국의 국영 상단은 청나라가 아무르 강 유역의 부족들과 거래했던 조건보다 더욱 나은 조건으로 거래할 수 있기에, 아무르 강 유역의 부족들은 알바진 요새에 생긴 시장으로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을 테고, 그런 만큼 설사 청나라가 북방에 추가로 병력을 파병한다 하더라도, 북미왕국의 상인들이 드나드는 알바진 요새의 시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연합의 편에 설 테고, 이들 부족은 대부분 유목민들이었기에 전투력도 나쁘지 않은 터라 차후 연합과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충분히 도움이 될 거라는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렇겠지. 그리고 당분간 청나라와는 계속 대치하게 될 테니 알바진 요새에 더 많은 물자를 보급하도록 하게.”
정성국이 더 많은 물자를 알바진 요새에 보급하라는 이야기에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속뜻을 눈치채고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청나라와는 계속 대치하면서, 이를 빌미로 주변 부족들이 연합에 합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그리고 아무르 강 유역의 여러 부족이 연합에 합류하고, 연합의 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청나라는 북방에 더 많은 병력을 배치할 수밖에 없을 테고, 이는 자연스럽게 청나라의 부담을 몇 배는 가중시킬 테니 말이야.”
청나라를 한계까지 몰아붙여야 만주 일부를 포기하지 않을까 생각한 정성국이 히죽 웃으며 대답하자 조용한 곰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알바진 요새의 물자 보급에 더 많은 신경을 쓰라고 알리겠습니다. 더불어 아이누 탐사대장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주변 부족들을 최대한 연합에 회유하라고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