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화
그렇게 잠깐 분위기를 환기한 정성국은 군사청장에게 계속 보고하라는 듯 손짓했고.
군사청장은 지원 병력이 도착했지만, 청나라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압록강에서 대치 중이라는 카무이쿠르의 보고와 청나라 해안에 주둔한 청나라 수군함대를 3함대가 격파해 결국 청나라에서 먼저 북미왕국과 화친을 원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알리자 청장들은 대국이라고 콧대를 세우던 청나라가 먼저 화친을 제의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허허허. 청나라가 먼저 화친을 입에 올리다니...”
“이건 3함대의 활약 덕분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지요?”
“3함대의 활약과 연합이 움직였기 때문인 것 같은데...원래 연합은 상황을 봐서 참전하기로 한 것 아닙니까?”
“뭐 청나라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현재 연합의 병력을 지휘하는 것이 아이누 탐사대장이니만큼...”
외무청장인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뭐 자세한 사정이야 나중에 올라오는 보고로 확인하면 될 테고. 다만 연합이 움직인 덕분에 청나라가 바로 화친을 맺자고 나왔으니 나쁠 것은 없어. 헌데...”
정성국이 투로시노가 보낸 보고서를 확인하고 애매한 표정을 짓자 투로시노가 보낸 보고서를 미리 확인했던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예. 조선은 오히려 지금의 대치 상황을 길게 가져가고 싶어하니 문제입니다.”
이에 다른 청장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조용한 곰이 조선의 속내를 설명하자 청장들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조선 측의 사정도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청나라를 믿을 수 없게 된 상황이니,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어떻게든 청나라의 국력을 깎아 먹고 싶겠지요.”
“이해는 가는데 그렇게 되면 아국이 큰 손해를 보는 게 문제 아니겠습니까.”
청장들이 갑론을박하고 있을 때 한참 생각에 잠겼던 정성국은 관리청장을 보고 물었다.
“이보게. 관리청장. 혹시 전쟁이 계속되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생기나? 크게 상관없을 것 같은데?”
“예. 이전이라면 모를까 청나라와의 교역이 끊겨 발생하는 손해는 동녕국, 주나라와의 교역을 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파견된 병력과 조선군이 소모하는 물자야...뭐 충분히 감수할 수 있고요.”
정성국은 관리청장의 말에 결정을 내렸다.
일단 조선의 바람대로 이 상황을 유지하기로.
비록 정성국의 존재로 이전과의 역사와는 완전히 비틀어지긴 했지만, 청나라가 동아시아의 중심이자 가장 강력한 대국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거기에 강희제도 그렇고 강희제의 후임인 옹정제와 건륭제 역시 영토 확장과 주변 세력의 정복에 열을 올렸던 것까지 생각해보면, 전생처럼 청나라가 몽골, 티베트 등을 정복해 기존의 영토를 2배 가까이 확장할 것은 뻔해 보였는데, 청나라와 조금이라도 투덕거릴 러시아 차르국은 이미 북미왕국의 존재로 인해 아시아 지역에서 완전히 손을 뗐고, 청나라를 뜯어먹으려고 덤벼들었던 유럽 세력 역시, 전생처럼 청나라를 뜯어먹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전생에서야 청나라와의 교역으로 너무 많은 은이 유출되어 더는 버틸 수 없었던 잉글랜드가 아편을 팔기 시작하고, 이러면서 아편 전쟁이 터지고 다른 유럽 나라들도 청나라가 예상보다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깨닫고 태도를 바꿔 청나라를 뜯어먹으려 덤벼들었지만, 이미 아시아 무역보다 북미왕국과의 무역에 매달리는 유럽이었으며, 북미왕국 역시 무작정 은은 빨아들이기만 하면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저들의 무역 적자를 해소해 최소한의 균형을 맞춰주고 있었으니 유럽으로서는 아시아 무역보다 북미왕국과의, 신대륙과의 무역이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유럽은 전생보다는 아시아 지역에 관심을 덜 보일 테고, 청나라는 유럽에 덜 시달릴 것으로 예상했다.
또한, 청나라 역시 이번에 자신들에게 호되게 당한 이상, 화약 무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려고 시도할 테니, 청나라의 역사가 완전히 달라질 텐데, 만약 청나라가 별 탈 없이 근대화를 이룩한다면, 북미왕국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넓은 영토와 그곳에 묻혀 있는 자원들, 그리고 막대한 인구수를 바탕으로 하는 생산력과 소비력의 위력을 정성국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특히나, 전생에서야 러시아가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으로 청나라의 동쪽 영토를 야금야금 집어삼켰지만, 지금은 러시아 차르국이 서쪽으로 물러났기에 청나라가 직접 오호츠크 해나 동해로 진출할 수 있었으니 정성국 역시 조선처럼 청나라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고.
‘이번에 아무르 강 이북은 모두 연합의 영토로 설정해야 해. 그래서 청나라의 오호츠크해 진출을 막고...연해주도 가져와야 북미왕국의 아시아 거점인 아이누 섬이 안전해지겠지. 문제는 이걸 청나라가 용인하겠느냐는 건데...’
강희제가 자신들의 땅이라고 생각했던 고혈도, 즉 아이누 섬을 북미왕국에 넘긴 것은 그곳이 섬이기도 하고, 또 변방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르 강 북쪽과 우수리 강 동쪽인 연해주는 상황이 달랐다.
비록 변방이긴 했지만, 이곳은 자신들의 발상지인 만주라고 여길 공산이 컸기에 정말 위기 상황이 아니고서야 이를 내어주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정성국은 계속 전쟁을 유지하며 청나라를 강하게 압박해 아무르 강 북쪽과 우수리 강 동쪽을 청나라에서 분리할 생각을 하다 문득 만주를 떠올렸다.
정성국으로서는 만주에 별다른 욕심은 없었다.
어차피 북미왕국의 영토는 넓었고, 땅 욕심이 있었다면,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나 호주 연합을 세우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연해주 역시 청나라에게 뜯어내 북미왕국의 영토로 설정하기보다는 연합이나 조선의 영토로 설정할 생각이었으니.
다만 만주의 드넓은 평야와 그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자원을 생각하면 이걸 그냥 청나라에 넘겨주기는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만주는 청나라의 발상지라 강희제가 이곳을 봉금지로 설정할 정도로 중요시하고 있었으니 이 만주를 뜯어오긴 어렵다는 점이었다.
‘아마 변방이 아닌 만주 전체를 노리면 강희제는 차라리 주나라 토벌을 포기해서라도 만주를 지키겠다고 결사 항전하지 않을까 싶은데...거기에 조선이 만주 전체를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다만 조선의 발전을 생각하면 석유와 각종 자원이 묻혀 있는 만주가 아쉽긴 한데...일단 요동 반도 정도만 노려보고 안되면 포기해야겠군.’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정성국은 조용한 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일단은 조선이 원하는 것처럼 협상을 질질 끌도록 하지.”
정성국이 결정을 내리자 청장들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먼 아시아 지역에서의 일이다 보니 전쟁을 질질 끈다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고, 어차피 전비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며, 나중에 청나라에 배상금을 뜯어 이를 만회할 수 있을 테니 크게 상관없다고 본 것이다.
더불어 청장들 대부분이 조선 출신이라, 어렸을 때 청나라 때문에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자랐었으니.
그리고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흠. 청나라의 사정이 좋지 않아 어떻게든 아국과 협상하려 들 테니 차라리 무리한 요구를 해서 일단 협상을 깨는 것이 낫겠군요.”
“그거 괜찮군. 배상금으로 한...10억 원 정도 책정하면 되겠지.”
“커헉!”
청장들은 정성국의 이야기에 기겁했다.
배상금으로 10억 원이라니.
북미왕국의 경제 규모가 매년 크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아직 한 해 세입이 3억 원이 채 안 되는 것을 생각하면 10억 원은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당연히 청나라에서도 이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 확실했기에 교육청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거...협상은 확실히 깨지겠군요.”
다른 청장들은 어차피 협상을 깨기 위해 청나라에서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액수를 정성국이 불렀다고 생각해 별말 하지 않았지만, 법무청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허나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언제까지 청나라와 전쟁을 할 수는 없으니 훗날엔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 할 텐데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만...”
그 말에 훗날 청나라와 협상해야 하는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군요. 지금 10억 원을 부르고 나중에 1억 원, 아니 청나라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까지 깎는 것도 조금...”
이에 정성국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중에도 저 배상금을 깎을 생각은 없네. 오히려 액수를 추가하면 모를까.”
“예? 청나라의 정확한 세입 규모를 알 수야 없지만, 이를 감당할 수는 없어 보이는데요?”
관리청장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하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성국이 기억하기로 전생에 강희제 말년의 청나라 정부의 세입 규모는 약 3500만 냥 정도였다.
다만 이건 강희제 말년의 청나라였고, 사방이 전쟁터인 현 청나라의 사정은 전혀 달랐으니 세입 규모는 기껏해야 2000만 냥에서 2500만 냥 수준이 아닐까 싶었고.
10억 원이라는 배상금을 단순히 은의 무게로만 따져 청나라가 사용하는 화폐 단위인 냥으로 환산하면 1억 냥에 해당했고, 이는 청나라의 4, 5년 치 세입이나 다름없었으니 확실히 감당할 수 없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정성국은 어차피 은으로 이를 받을 생각이 없기에 고개를 저었다.
“현물로 받으면 그만이지 않겠나.”
“현물이라면...설마 땅을 원하시는 겁니까?”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땅이 넘쳐나는 판국이라, 호주도, 시베리아 지역도 포기한 상황인데 배상금으로 무슨 땅인가 싶었기에.
하지만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예상과는 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이 아무르 강 북쪽과 우수리 강 동쪽의 땅은 확실히 확보해야지.”
정성국이 회의실 뒤쪽에 걸린 세계 지도를 가리키며 이야기하자 군사청장이 정성국의 의도를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음...청나라가 곧바로 아이누 섬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점을 걱정하시는 거군요?”
“그렇지.”
군사청장의 말과 정성국의 대답에 다른 청장들도 사정을 파악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안색이 하얗게 질린 행정청장이 정성국을 바라보며 물었다.
“헌데 설마 저 땅을 직접 통치하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행정청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육청장과 개발청장의 안색도 하얗게 질렸고, 이런 청장들의 반응에 정성국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이걸 우리가 통치하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이지. 아무르 강 북쪽은 이전에 러시아 차르국이 점유하던 영역이나 연합에 넘길 생각이고 이 우수리 강 동쪽의 연해주는...연합이나, 아니면 조선에 넘기는 것이 나을 듯싶네. 아니면 주변 원주민들을 독립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고.”
정성국의 대답에 행정청장을 비롯한 교육청장과 개발청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다른 청장들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 정성국이 슬쩍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 요동 반도도 가져오고 싶긴 한데...이걸 청나라가 허용할지는 모르겠어.”
조용한 곰은 요동반도의 위치를 확인하고 말했다.
“요동반도의 위치를 보아하니 조선에 넘기실 생각이시군요.”
“그렇지. 조선도 무언가 얻는 것이 있어야 평화 조약에 서명하지 않겠나.”
정성국의 말마따나 청나라와 언젠가 협상을 하려면 결국 조선도 평화 협상에 동의해야 했으니, 조선의 몫으로 요동반도를 생각하고 있다는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회의적인 표정으로 답했다.
“허나 요동반도는 만주에 속한 영역이고, 또 요동 반도를 포기하면 천진을 방어하기 더욱 어려워질 테니 청나라 황제가 이걸 허락할지 의문이로군요.”
요동반도는 발해만 입구에 해당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또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이나 북경의 외항이라 할 수 있는 천진과도 무척 가까워 만약 조선에서 요동반도 끝에 수군을 배치한다면, 곧바로 청나라를 위협할 수 있는 요지 중의 요지였다.
그러니 조용한 곰은 과연 청나라가 요동 반도를 넘겨주겠느냐고 묻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정 안 되면 그냥 포기하면 그만일세. 그때는 조선에 연해주를 넘기고 달래야겠지.”
비록 연해주에 유전지대는 없었지만, 흥개호 인근의 비옥한 평야를 개간하는 것만으로도 조선은 충분히 이득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최대한 전쟁을 질질 끌어 청나라를 압박해 요동반도를 얻을 수 있다면 좋고, 그게 불가능하면 연해주를 조선에 넘기겠다는 정성국의 설명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저 두 지역은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기필코 청나라가 손을 떼게 만들고 요동 반도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란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러한 지침을 투로시노에게 보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