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584화 (584/850)

584화

“대인! 대인!”

청나라의 예부 상서 연목은 식사를 마친 후 입가심으로 차를 마시고 있다가 바깥에서 자신을 부르며 급히 방안으로 들어온 예부의 관리를 보고 눈을 찌푸리며 타박했다.

“왜 이리 호들갑인가.”

예부의 관리는 이런 연목의 반응에 움찔하며 목소리를 낮추고 입을 열었다.

“대인. 저 멀리 북미왕국의 배들이 보입니다.”

이에 연목은 눈을 크게 뜨고 급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뭐?! 북미왕국의 배가 확실한가?”

이런 연목의 반응에 예부의 관리는 확실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전에 방문했던 북미왕국의 배가 확실합니다. 대인.”

강희제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북미왕국과 화친하기로 마음먹었다.

단기간에 조선을 정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봄이 되고 북방 항로가 열릴 시기라 북미왕국이 직접 조선을 돕기 위해 병력을 파병하기 시작하면, 청나라의 처지가 더욱 곤란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희제도 인정한 탓이다.

특히 3함대가 청나라의 해안가를 돌며 수군함대를 격파하기 시작하고, 이 때문에 강희제는 무의미한 피해를 줄이고 남은 수군함대라도 건사하기 위해, 그리고 황도를 방어하기 위해 모든 수군함대를 천진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는 청나라 해안가가 텅 비었다는 뜻이라 만약 북미왕국의 병력이 청나라 해안가에 상륙하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이들이 반란군과 연계하기 시작하면 정말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빠르게 북미왕국에 화친 의사를 전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고.

해서 강희제는 북미왕국과 화친하기로 결정을 내린 후 곧바로 예부의 관리들을 3함대가 공격할 것이라 예상되는 절강성과 강소성의 수군 진영으로 급파했다.

이때 절강성의 수군 진영으로 이동한 예부의 관리는 철수 명령을 받기 전에 북미왕국의 3함대가 들이닥쳐 앞바다엔 침몰한 수군함대가 즐비하고, 수군 진영은 폐허가 된 광경을 보게 되었지만, 강소성의 수군 진영으로 이동한 예부의 관리는 이미 철수가 끝나 일부 병사만 남은 수군 진영에 도착했고.

며칠 후 먼바다에서 나타나 수군 진영을 공격하기 위해 접근하는 3함대를 보고 곧바로 백기를 들고 접근해 북미왕국의 배에 올라 화친을 원한다는 청나라의 뜻을 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북미왕국의 배에 올랐던 이가 바로 지금 이야기하는 예부의 관리였기에 연목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밖으로 나섰다.

그 후 북미왕국과 협상하기 위해 임시로 건설한 크고 화려한 막사를 지나 나무로 만든 전망대에 가까운 단상으로 올라 바다 방면을 바라보자, 기존의 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의 배들이 이곳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고.

돛도 노도 없이 빠르게 다가오는 북미왕국의 배들이 참으로 기묘하다고 느낀 연목은 한참 동안 3함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으음...저게 소문이 자자한 북미왕국의 해군인가?”

“그렇습니다. 대인.”

“흠. 아국의 배보다는 확실히 크긴 한데...”

연목이 애매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흐리자 예부의 관리는 연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고 입을 열었다.

“절강 수군함대의 생존자가 이야기하기를 저 북미왕국 해군의 배에 장착되어 있는 화포가 그리 대단했답니다.”

지금 보이는 저 배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 배에 실린 화포가 중요하다는 지적에 연목은 그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작열탄 말이지?”

“예. 명중만 하면 아국의 배가 터져나가며 침몰하니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제대로 싸우기 어려웠답니다. 그리고...”

예부의 관리는 이곳에서 북미왕국 함대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과 함께 북경을 떠나 절강성으로 이동했던 동기의 편지를 받았기에 이를 자세히 설명하자 연목은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찼고.

그렇게 연목이 예부의 관리와 이야기하는 사이 어느덧 북미왕국의 함대는 수군 진영에 가까이 다가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고, 이를 보고 연목이 입을 열었다.

“아무튼, 자네의 말을 듣고 돌아간 북미왕국의 함대가 이렇게 이곳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저기에 이번 협상에 참석할 외교 사신이 타고 있다는 소리겠지?”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북미왕국의 아시아 지역 외교를 총괄한다는 투로시노가 직접 방문했을 수도 있겠지요.”

기대 섞인 관리의 말에 연목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우리 대청의 사정상 최대한 빠르게 북미왕국과 화친을 맺는 것이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는 길이니 자네 말마따나 정말 투로시노가 저 배에 있었으면 좋겠군.”

그리고 북미왕국의 함대는 수군 진영 앞바다에 완전히 정박했고, 청나라 배들이 노를 저어 북미왕국의 배에 접근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연목이 예부의 관리에게 말했다.

“그럼 난 협상장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자네가 북미왕국의 사신을 협상장까지 데려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대인.”

* * *

연목은 협상장에서 북미왕국의 외교 사신을 기다렸고, 협상장의 문이 열리며 북미왕국의 복식을 한 인물이 들어오자 얼굴을 확인하고 연목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영하듯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투로시노 공.”

협상장으로 들어오던 투로시노는 자신을 반기는 연목의 얼굴을 확인하고 잠시 움찔했다.

투로시노는 북경을 몇 차례 방문했었기에 예부 상서인 연목과도 안면이 있었기에.

그리고 연목이 이 협상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청나라가 이번 협상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었고, 그만큼 청나라는 이번 전쟁을 끝내고 싶어한다는 뜻이었기에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 예부 상서께서 직접 협상장에 나오실 줄은 몰랐군요.”

이에 연목은 청나라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애써 과장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도 북미왕국과 하는 협상인데 예부에서 가장 높은 제가 나오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투로시노 공께서 방문하신 것을 생각하면, 제가 직접 온 것이 다행이로군요.”

그렇게 투로시노는 연목과 잠시 잡담을 나누다가 시종이 차를 따르고 협상장에서 나가자 자세를 바로 하고 연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귀국이 3함대에 평화적으로 협상할 뜻을 밝혔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이에 연목도 얼굴에 만연하던 미소를 지우고 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리 대청은 애초부터 귀국과 전쟁을 치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귀국이 조선을 공격하지 않았으면 될 문제 아니었습니까.”

투로시노의 대꾸에 연목은 고개를 저었다.

“아시다시피 이번 조선 정벌은 불가피했습니다. 조선은 공공연히 우리 대청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저 남쪽의 반란군과도 연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아국은 후방의 안정을 위해서 조선을 따끔하게 혼내주려 했을 뿐입니다.”

“겨우 소문만을 믿고 그동안 청나라에 꾸준히 공물을 바치던 조선을 공격했다는 것이 저로서는 전혀 납득가지 않습니다만...뭐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귀국이 이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이니까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번 전쟁을 무의미한 전쟁으로 칭하는 투로시노의 말에 연목이 헛기침하면서도, 투로시노가 화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기에 안도하며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크흠. 그렇습니다. 우리 대청과 북미왕국은 이웃 관계인데 비록 이웃끼리 잠깐 다툴 수야 있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싸워서 좋을 것이 무에 있습니까.”

“하지만 이건 명확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전쟁은 결국 귀국이 조선을 공격해서 일어난 일이니만큼, 이번 전쟁의 원인은 귀국에 있고, 이번 전쟁으로 인해 아국은 교역이 중단되어 경제적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은 만큼, 그리고 3함대를 움직이고, 조선을 지원하느라 막대한 비용을 소모한 만큼, 이에 대한 배상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투로시노의 대답에 웃는 얼굴을 하던 연목의 안색은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연목 역시 북미왕국이 아무런 대가 없이 화친을 맺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북미왕국의 국력이 변변치 않고 전쟁이 계속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면 그게 가능하겠지만, 북미왕국의 국력은 청나라와 비견될 정도로 만만치 않았으니까.

거기에 북미왕국은 건국 후 몇 차례의 전쟁을 통해 전쟁배상금을 두둑이 뜯어냈다는 사실을 서양인 신부들에게 들은 이후로는 어느 정도의 이권을 배상금으로 내줘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헌데 투로시노의 말을 들어보니 아예 작정하고 청나라를 뜯어먹으려는 것 같았기에 헛기침을 하며 반문했다.

“크흠. 물론 우리 대청이 조선을 공격해 귀국도 이번 전쟁에 끼어든 만큼, 북미왕국의 해군...그러니까 3함대가 움직이며 사용한 비용을 우리 대청이 내어주는 것이야 그러려니 하겠는데...조선을 지원하느라 소모한 미용이나 교역이 중단되어 귀국이 손해 본 것까지도 배상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에 투로시노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귀국이 일방적으로 조선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손해니까요.”

청나라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손해였으니, 이 손해를 모두 청나라에서 배상해야 한다는 투로시노의 논리에 생각보다 저들에게 내어줘야 할 이권이나 돈이 만만치 않겠다는 것을 직감한 연목은 어떻게든 그 규모를 줄이기 위해 급히 머리를 굴리다 문득 입을 열었다.

“아! 하지만 귀국과의 교역 중단은 북방의 상황이 안정되어 더는 귀국의 물자 보급이 필요 없어졌기에 교역을 중단했을 뿐이지 이번 전쟁과는 상관이 없소이다! 그러니...”

하지만 투로시노는 단호하게 연목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명분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청나라가 아국과의 교역을 중단한 것은 귀국이 조선을 징치할 뜻을 밝히며, 조선의 일에 개입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후입니다. 당시 청나라 황제께서는 이번 일에 개입한다면 교역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러니 교역을 중단한 것은 전쟁 때문이고, 청나라는 일방적으로 아국과의 교역 협상을 모두 파기한 셈이니 아국의 손해는 몹시 큽니다. 그러니 청나라에서 이에 대해 충분히 배상하지 않는다면, 화친은 없습니다.”

투로시노가 강희제까지 거론하며 교역으로 인한 손해는 전부 청나라의 탓이라고 이야기하고, 더는 이를 거론하지 말라는 듯 단호한 얼굴로 이야기하자 연목은 한참을 고민했다.

투로시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배상금으로 내어줘야 할 이권이 생각보다 커 보였기에.

하지만 급한 것은 청나라였고, 강희제 역시 내어줄 것은 내어주더라도 어떻게든 북미왕국과 화친을 맺으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리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허면 귀국의 배가 지정된 아국의 항구를 드나들 수 있는 권리와 귀국의 상인들이 우리 대청의 상인들과 자유롭게 상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정도면 충분한 배상이 되겠습니까?”

연목의 이 제안에 투로시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목의 얼굴을 보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으냐는 표정이었는데, 투로시노가 생각하기엔 턱도 없어 보였으니까.

물론 청나라와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게 되면 이를 통해 큰 이득을 챙길 수야 있겠지만, 동녕국, 그리고 주나라와도 교역 협정을 맺은 이상 이것으로 청나라와 화친을 맺기엔 부족했다.

해서 투로시노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에 연목은 당황하며 몇 가지 이권을 더 제시했지만, 투로시노는 부족하다며 고개를 저었고, 이런 투로시노의 반응에 연목은 두 손을 들며 말했다.

“휴우. 그럼 투로시노 공께서 얼마만큼의 배상을 원하는지 명확히 말씀해주셔야 협상이 진척될 것 같습니다만...”

이에 투로시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청나라는 북미왕국과의 화친에 적극적이라 잘만하면 더 많은 것을 뜯어낼 수도 있어 보였으니까.

다만 조선이 청나라와의 전쟁을 계속하고 싶어했기에 청나라와의 화친은 본국의 지침을 받고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여겨 생각해두었던 배상금 액수를 말하는 것보다는 시간을 끄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투로시노가 입을 열었다.

“헌데 배상금 책정은 사실 제 선에서 정하긴 어렵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투로시노가 아시아 지역의 외교 관계에 전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연목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투로시노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뭐 저도 이번 전쟁에서 3함대가 소모한 비용이나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사용한 비용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만...귀국이 일방적으로 교역을 중단해 생긴 손해의 규모는 알지 못하거든요. 그리고 북방 항로가 닫혀 본국과의 연락이 어려울 때야 제가 임의로 결정을 내릴 수 있어도, 북방 항로가 열린 이상 본국의 지침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 배상금 책정 협상은 조금 미뤘으면 합니다.”

“으음...그럼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쾌속선이 아이누 섬에서 출발했을 테고, 이 쾌속선에 귀국이 화친을 원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도 실려 있으니 말입니다.”

그 정도면 협상이 너무 늦어지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 연목이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흐음...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협상을 뒤로 미루도록 하지요.”

“아. 그리고 한가지 미리 말씀드리자면, 배상금 책정이 끝난다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귀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귀국이 조선, 그리고 연합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 후가 될 것입니다.”

“예? 그게 무슨...”

연목이 투로시노의 말에 당황했지만, 투로시노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잖습니까. 협상이 끝나고 평화 조약에 서명하는 순간 귀국과 아국은 전쟁이 끝나는 셈인데...아국의 동맹인 조선과 연합이 귀국과 전쟁 중인데 아국 혼자 여기서 빠진다면 후에 무슨 면목으로 동맹들을 보겠습니까. 그러니 협상을 마친다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평화 조약에 서명하는 것은 두 동맹이 귀국과의 협상을 끝낸 후가 될 것입니다.”

청나라는 연합이나 조선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일단 북미왕국과 화친을 맺을 생각이었지만, 북미왕국에서도 이를 짐작하고 가장 나중에 조약을 체결하겠다고 이야기하니 연목은 곤란한 표정으로 어떻게든 투로시노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투로시노는 동맹과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면서 거부했고, 생각보다 투로시노가 요지부동이었기에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끙...알겠습니다. 북경엔 그렇게 알리도록 하지요.”

“아. 차라리 이곳에 조선과 연합의 사절도 불러 함께 협상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입니다만...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일단 북경의 뜻을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