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3화
투로시노는 포로나이에 도착한 인급 전선이 가져온 소식을 듣고 급히 인급 전선에 올라 3함대가 정박하고 있다는 제주도로 향했고, 그곳에서 3함대 사령관인 정일신을 만나 자세한 사정을 파악한 후 일단 조선으로 향했다.
조금 돌아가게 되겠지만, 청나라의 협상이 시일을 다투는 화급한 일도 아니었고, 이번 전쟁의 당사자가 조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조선과 이번 협상에 대해 논의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해서 투로시노는 3함대와 함께 제물포로 이동했고.
투로시노가 3함대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올라오자 조선 조정에서는 투로시노와 친분이 깊은 유철을 제물포로 급파했다.
정일신이 용암포를 방문해 조선 지원군 사령관인 카무이쿠르에게 알린 정보가 유철을 통해 한양에 전해진 탓에 조정에서도 청나라가 북미왕국에 화친을 제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북미왕국에서 아시아 지역의 외교 문제를 총괄하는 투로시노가 이곳에 방문한 것은 청나라와의 협상 문제를 조선과 논의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짐작한 탓이었다.
해서 유철은 곧바로 제물포로 이동해 투로시노가 머문다는 천급 전선에 올랐고, 투로시노는 천급 전선을 오르는 유철을 보고 웃으며 반겼다.
“하하하. 오랜만입니다.”
“예. 오랜만입니다. 투로시노 공.”
갑판에서 서로의 안부를 챙긴 둘은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정일신에게 양해를 얻고 커다란 회의실로 들어온 투로시노는 유철에게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헌데 유철 공께서 타고 오신 배 말입니다. 그거 조선에서 만든 기범선입니까?”
유철은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했는데, 그 배는 조선 특유의 배 모양이라기보다는 북미왕국 특유의 유선형의 선체에 가까웠다.
거기에 2개의 황포돛 사이에는 굴뚝이 보였고.
해서 투로시노가 질문을 던지자 유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최근 조선의 장인들이 새로 건조한 기범선으로, 그동안 증기기관을 장착했던 여러 선박과는 달리 빠른 편이라 꽤 쓸만합니다. 해서 이를 타고 왔지요. 물론 북미왕국의 선박과 비교하면 아직 보잘것없는 수준입니다만...”
처음 증기기관을 장착한 배는 워낙 느려 제대로 써먹기 어려웠지만, 그 이후로 조선의 장인들은 계속해서 연구하고 도전해 조금씩 증기기관의 성능을 발전시켰고, 여기에 배를 만드는 장인들도 기존의 배와는 달리 북미왕국의 배를 연구해 새롭게 배를 만들어 이전보다는 나은 기범선을 건조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은 증기기관의 출력이 낮은 탓에 배의 크기도 작아질 수밖에 없어 제대로 써먹기는 애매했지만,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었기에 장인들이나 신료들은 만족하고 또 기대하고 있었고.
다만 북미왕국의 배와 비교하면 아직은 갈 길이 먼 터라 유철이 말을 흐리자 투로시노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처음에야 다 그런 법이지요. 그래도 조선에서 꾸준히 증기기관을 연구해 성과가 있는 것 같아 참으로 기쁘군요.”
“허허허. 북미왕국이 증기기관의 설계도를 제공해주지 않았다면 어찌 이러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유철은 그렇게 겸양한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헌데...청나라에서 북미왕국에 화친을 제의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투로시노는 생각보다 급해 보이는 유철의 반응에 일단 회포는 나중에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조선 지원군 사령관을 통해 들으신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청나라에서 화친을 제의했습니다. 해서 저는 청나라와 협상하기 전 조선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해 이렇게 조선에 들른 거지요.”
“흐음...”
투로시노의 대답에 유철은 복잡한 얼굴로 신음을 흘렸고, 그런 유철의 반응에 투로시노가 고개를 갸웃했다.
청나라가 먼저 화친을 제의한 만큼, 잘만하면 이번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낼 수 있어 조선이 이를 반기리라 생각했는데, 유철의 반응은 이를 반기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해서 투로시노가 유철에게 무어라 질문하려 할 때 유철이 한발 먼저 투로시노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북미왕국에서는 이번 청나라의 제의를 받아들이실 생각인 겁니까?”
“흠...청나라에서 화친을 맺는 대가로 내미는 조건이 나쁘지 않다면 이를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다고 봅니다. 일단 전쟁이 길어져서 좋을 것은 없지 않습니까. 아. 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이고 북방항로가 열렸으니, 본국의 방침이 내려올 때까지는 일단 결정을 미룰 생각이긴 합니다만...”
유철은 투로시노의 말에 신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으음...혹시 새한성에서는 청나라와의 협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까요?”
이에 투로시노는 잠깐 생각해보았지만, 투로시노가 생각하기에 새한성에서는 이번 청나라와의 협상을 반기지 않을까 싶었다.
북방항로가 닫히기 전에 본국과 연락을 주고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정성국이나 외무청에서는 청나라와의 전쟁을 길게 끌어봐야 좋을 것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군사청에서는 엉덩이가 무거운 청나라를 협상장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3함대를 이용해 천진을 공격하는 작전도 세워두었다고 정일신에게 들었으니까.
그렇기에 청나라가 먼저 화친을 제의했다는 소식에 본국에 알려지면 본국은 이를 반기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끄덕이던 투로시노는 안색이 흐려지는 유철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조선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군요?”
이에 유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그렇습니다. 작년 겨울에 압록강을 넘어 남하하는 청나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청나라군을 압록강 너머로 물리치고, 이것이 조선 내에 알려지면서 이전에 청나라에 받았던 굴욕을 드디어 되갚아 주었다며 기뻐하는 양반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예. 조선 내의 분위기는 개항장의 관리를 통해 대충 듣긴 했습니다. 세계신문을 통해 북방의 일이 알려지고 나서 양반이며 일반 백성이며 모두 환호하고 잔치를 벌였다지요?”
투로시노가 맞장구치자 유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은 청나라를 두려워하던 분위기도 많이 사라졌지요. 그 때문인지 올 초부터 일부 지방의 양반들이 북벌을 입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이 주장에 동조하는 양반들이 점차 늘어났지요.”
“북벌이라...”
투로시노는 작년 가을까지만 하더라도 청나라와의 전쟁을 무척이나 걱정하던 조선인들이 이젠 공공연히 북벌을 논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 묘한 표정으로 북벌이란 단어를 중얼거리자, 유철은 혹시 투로시노가 오해라도 할까 급히 입을 열었다.
“아. 물론 작년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북미왕국의 도움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정 신료 대다수는 처음 북벌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의논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세계신문을 통해 현재 청나라의 내부 사정이 혼란스럽다는 것을 아는 양반들은 지금이 무도한 오랑캐를 위협할 절호의 기회라며 열심히 상소를 올렸고, 도망친 청나라군도 봉황성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조정 신료 중 일부는 북벌을 논하는 양반들의 의견에 동조하기 시작했습니다.”
“흐음...그랬습니까?”
“예. 다만 조선 지원군 사령관은 압록강을 넘는 것은 자신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답하기도 했고, 청나라에서도 압록강에 대군을 파견했기에 최소한 조정에서는 북벌에 관한 논의가 쏙 들어갔었습니다만...”
여기까지 말하고 유철이 말을 흐리자 투로시노는 유철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청나라가 먼저 화친을 제의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상황이 또 바뀐 겁니까?”
투로시노의 물음에 유철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압록강에 대병을 파병했기에 청나라의 저력이 대단하다고 여겼지만...그 콧대 높은 청나라가 먼저 화친을 제의했다는 것은 그만큼 청나라 내부 사정이 좋지 못하다는 방증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또 북벌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군요.”
투로시노가 조선 조정의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대충 짐작하고 중얼거리자 유철이 손을 내저었다.
“아. 그건 아닙니다. 뭐 일부 조정 신료 가운데는 북벌을 논하는 이들도 없지야 않습니다만...대다수는 현 상황에서 북벌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음? 허면...?”
“이번에 청나라가 북미왕국에 화친을 제의한 것은 아마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부담을 느끼고 일단 적을 줄이기 위함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북미왕국과 시베리아 부족 연합, 그리고 우리 조선이 청나라와 화친을 맺게 되면 청나라는 기사회생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지요.”
유철이 거기까지 말하자 투로시노는 조선의 조정 신료들은 위험부담이 큰 북벌보다는 현 상황을 유지해 청나라를 압박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닫고 중얼거렸다.
“조선은 그게 싫다는 거군요.”
이에 유철은 조금 겸연쩍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북미왕국은 압록강 인근에 병력을 파병하기도 하고, 각종 물자를, 그것도 조선군이 사용하는 물자의 일부까지 보급하고 있는지라 현 상황을 유지하자는 것은 북미왕국이 계속 조선을 지원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
다만 유철은 조선의 미래를 위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북미왕국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개화파 관리 중 일부는 청나라에 배상금을 뜯어내고, 청나라가 남쪽의 반란군들을 정리하는 사이 조선을 더욱 발전시키고 조선군을 완전히 개혁한다면 청나라를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유철이나 대부분의 조정 신료들은 이에 회의적이었다.
청나라가 한 곳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인 지금도 압록강 인근에 5만이 넘는 병력을 파견하고, 또 조선 침공이 실패하니 다시 7만이 넘는 지원병을 파견했는데, 청나라가 남쪽을 완전히 평정하고 조선 정벌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그걸 조선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청나라와 조선의 체급은 너무나도 달랐으니까.
그러니 이왕 척을 진 것, 청나라가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다다랐고.
해서 유철은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예. 그렇습니다. 이번 전쟁도 대외적인 명분이야 우리 조선이 남방의 반란군과 내통했기에 이를 징치하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아국이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못마땅해 벌어진 전쟁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청나라가 차후에 주나라와 동녕국을 멸망시키고 나면, 그 후엔 다시 조선을 노릴 것이 분명하니까요.”
유철의 말은 정일신이 전해준 카무이쿠르의 의견과 거의 흡사했기에 투로시노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유철이 계속 이야기했다.
“물론 아국은 북미왕국과 혈맹이나 다름없고 청나라도 이번 전쟁으로 이를 확실히 깨닫게 되었을 테니 이번처럼 섣불리 아국을 공격하지는 못하리라 믿습니다만...청나라가 우리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북방에 병력을 배치하면 저희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으니 이번 전쟁을 길게 끌어서라도 청나라가 주나라나 동녕국을 정벌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길었던 유철의 말이 끝나자 투로시노는 생각을 정리하고 긴장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철에게 말했다.
“흠. 그렇군요. 조선의 뜻은 잘 알겠고, 이를 본국에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이번 전쟁이 길어지면, 그만큼 아국에도 부담이 커지는 만큼, 본국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겠군요.”
이런 투로시노의 대답에 유철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곧바로 답했다.
“이해합니다. 해서 말인데...이번 협상이 결렬되고 만약 전쟁이 길어지게 된다면, 북미왕국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현재 무상으로 지원받고 있는 보급 물자들을 제값을 치르고 보급받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게 무슨...?”
유철의 이야기에 투로시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조선의 사정이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나, 이번에 청나라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사비로 지출되는 비용만 하더라도 꽤 버거워했다.
이를 알기에 북미왕국에서도 각종 보급 물자들을 무상으로 지원하고 있었고.
헌데 이 보급 물자들의 값을 치르겠다니.
특히 북미왕국이 조선군에 넘겨주는 보급 물자들은 품질도 좋았고 양도 많았기에 그걸 조선이 감당하긴 어렵다고 생각했기에 투로시노가 당황하자 유철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귀국이 내어준 차관으로 조선 곳곳에 광산을 개발 중이라는 사실은 아시지요?”
“어? 설마?”
“예. 이번에 운산의 광산에서 소량의 금을 채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지 기술자의 말에 의하면, 금맥이 큰 편이라 점차 많은 금을 캐낼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여기에 단천의 광산에서도 생각보다 많은 은을 채취할 수 있어, 이들 광산에 인력을 대거 투입해 금, 은을 캘 생각이고 그러면 재정에도 조금 여유가 생기는 만큼, 이를 이용해 보급 물자의 가격을 치르겠다고 이야기하자 투로시노는 조선의 행운을 축하했다.
“오. 막대한 금과 은이 묻혀있는 광산이라니! 하하하. 이거 축하드립니다.”
“아닙니다. 북미왕국의 차관이 아니었다면 광산을 개발하기가 쉽지 않았을 테니 오히려 북미왕국의 도움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렇게 겸양하는 유철을 보고 빙긋 웃은 투로시노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헌데 조선의 뜻은 감사합니다만 어차피 보급 물자로 들어가는 비용이 당장 아국에 부담되는 것도 아니고, 이는 나중에 청나라에 전가하면 되니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그렇습니까?”
“예. 차라리 그 돈으로 압록강에 배치된 조선군의 규모를 늘리는 것이 나을 겁니다. 아. 물론 전쟁이 길어진다는 전제하에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조선을 개발하는 데 투자하는 것이 나을 테고요.”
투로시노의 조언에 유철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일단 조정에는 그렇게 알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