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화
“오! 드디어 왔나?”
정성국은 조용한 곰이 집무실로 들어오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기며 곧바로 티테이블로 끌고 갔다.
새진주에서 웅크린 늑대가 포르투갈의 외교관인 휴고에게 이제 북미왕국은 노예무역을 하는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선언했기에, 조용한 곰이 이번에 바뀐 북미왕국의 새로운 외교방침을 설명하러 새한성에 있는 유럽 각국의 대사관에 들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정성국은 유럽 각국의 대사들이 갑자기 바뀐 북미왕국의 외교방침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해 커피를 내리면서 바로 조용한 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대사들의 반응이 어떻던가?”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북미신문을 통해 계속 분위기를 잡기도 했고, 포르투갈 외교관이 새진주에 있는 에스파냐 공사에게 이번 협상이 중단된 이유에 관해 이야기한 모양인지 유럽 각국의 대사 대부분은 공식적으로 노예무역 금지를 요청하는 제 이야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요.”
“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이에 정성국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유럽 대사들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북미왕국이 교역을 빌미로 노예무역을 금지하라고 강요하는 수준이나 다름없어 불쾌할 텐데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이 미소를 지으며 대사들이 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현재 상황에서 노예무역을 옹호해봐야 아국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될 뿐인데 저들이 아국과의 교역으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수익과 신식 소총 수입 건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 때문인지 대다수는 노예무역을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것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더군요. 다만, 사안이 사안이라 아무리 자신들이 전권 대사라고 한들 본국과 논의할 필요는 있다면서 잠시 시간을 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휴우. 그거 정말 다행이군. 내정 간섭이나 일방적인 폭거라면서 대사들이 연합해 이에 반발할까 우려했는데.”
물론 정성국도 어느 정도 계산하고 일을 벌이기는 했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현재 유럽 각국은 한창 전쟁 중이었기에 북미왕국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면 타격이 컸으니까.
다만 새한성에 유럽 각국의 대사관이 하나둘 들어서고 대사들이 자주 모이면서 친분을 쌓고 있었기에 어쩌면 대사들이 연합에 북미왕국에 반발할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북미왕국도 상황이 조금 곤란해지기는 했다.
유럽 각국을 통해 수입하는 각종 원자재가 끊긴다면 북미왕국도 발전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헌데 유럽의 대사들이 연합해 북미왕국의 외교방침에 반발하기보다는 이를 받아들이는 모양새라 정성국이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조용한 곰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만큼 아국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방증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고 다 내린 커피를 커피잔에 따라 조용한 곰에게 건넸고.
“아. 감사합니다. 전하.”
그 후 정성국은 다른 커피잔에 커피를 따라 홀짝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다만 대사들이 노예무역 금지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해도, 이 소식이 유럽 본토에 전해지면 노예무역으로 이득을 보던 이들이 개입해 어떻게든 이를 막으려 들 테니 과연 대사들의 말처럼 각국이 노예무역을 금지할지는 모르겠군.”
이에 정성국이 내린 커피를 음미하던 조용한 곰이 커피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저도 그것이 조금 걱정되기는 했는데 에스파냐 대사가 이야기하길 노예무역으로 이득을 보는 이들이 분명 있겠지만, 그들보다는 아국과의 무역으로 이득을 보는 이들이 더 많고 세력이 크기에 결국 노예무역을 금지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아. 그들이 있었군.”
전생에서도 지식인들이 인권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 일부 지식인들이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노예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노예무역에 이해관계가 있는 상인들과 서인도제도의 농장주 출신의 정치인들이 합심해 이를 반대했고, 덕분에 공식적인 노예무역의 금지와 노예 제도의 폐지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알고 있는 정성국은 이들이 나서서 수작을 부리지 않을까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에스파냐 대사의 말이 맞았다.
그동안 꾸준히 유럽과의 교역을 확대한 탓에 북미왕국과 유럽 각국의 교역 규모는 거대했고 당연히 이 교역에 관여하는 여러 귀족, 상인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노예무역을 고집하다 정말 북미왕국과의 교역이 끊기기라도 하면 막대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으니 이들이 북미왕국을 도와 노예무역을 금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 분명했고.
해서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조용한 곰이 덧붙여 말했다.
“또한, 최근 북미신문에는 노예를 얻기 위해 자행하는 비인간적인 인간 수렵에 관한 기사와 열악하다 못해 비참한, 거의 인세의 지옥에 가까운 노예선의 실상에 관한 기사가 실린 후 북미신문을 즐겨 읽는 아국 백성들의 분노가 무척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조용한 곰의 말처럼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어떻게 노예가 되었는지, 그리고 이곳에 오기까지 어떠한 고통을 겪는지를 글뿐만 아니라 사진과 삽화까지 실어 알리자 북미왕국 백성들은 무도한 노예상인들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한 곰이 묘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헌데 북미신문의 독자는 아국의 백성만이 아니잖습니까.”
북미신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았기에 조선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에서도 북미신문을 구하길 원했고, 이에 새한성에 있는 유럽 각국의 대사관에서는 외무청에게 이야기해 북미신문을 대량으로 구해 주기적으로 본국에 보내고 있었다.
여기에 유럽에 있는 북미왕국 대사관에서도 북미신문을 요청했기에 새진주에서 대량으로 북미신문을 인쇄해 정기적으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연락선에 실어 보냈고.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북미신문이 유럽에 풀렸고, 이 북미신문들은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지식인들이나 귀족들에게 흘러가고 있었으며, 정성국도 이러한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조용한 곰의 말에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흠. 북미신문을 읽은 유럽의 귀족들과 지식인들도 아국의 백성과 마찬가지로 노예무역에 분노할 거라는 건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조용한 곰은 북미신문을 읽은 유럽인들이 북미왕국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참담한 실태에 분노하며 목소리를 높일 거라고 여긴 모양이지만 정성국은 조금 회의적이었다.
“글쎄. 유럽의 귀족과 지식인들이 과연 아국의 백성처럼 분노할까.”
“예?”
“과연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같은 인간으로 생각할지가 의문이군. 저들에게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피부색도 다르고 이교도이지 않나.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이교도들을 노예로 부려왔지. 거기에 로마 교황청에서는 한때 이교도들을 노예화하는 권리를 포르투갈 왕에게 부여하기도 했었으니...”
1452년 당시 교황이었던 니콜라이 5세는 포르투갈의 알폰소 5세에게 이교도들을 노예화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노예무역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즉, 로마 교황청에서 이교도들을 노예로 삼아 상품화하는 반인륜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에 면죄부를 쥐여준 것이다.
그 후로도 교황 알렉산더 6세나 교황 줄리우스 2세는 여러 칙령을 통해 에스파냐 왕실에 새로 정복한 영토 내의 교회를 통괄할 수 있는 권한을 쥐여줌으로써 에스파냐 국왕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활동하는 주교 및 기타 고위 성직자들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벌어지는 원주민들의 약탈, 노예화 등을 로마 교황청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고.
뒤늦게 1537년 교황 폴 3세가 이교도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노예로 만들 수 없다는 교서를 발표하긴 했지만, 그동안 관행적으로 이교도들을 노예로 부리며 각종 이득을 취한 이들이 이를 들을 리 만무했다.
물론 일부 양심 있는 지식인들은 당장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노예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 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고.
그러니 정성국은 과연 북미신문 때문에 유럽의 지식인들이 태도를 바꿀까 싶었기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조용한 곰이 그런 정성국을 보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최근 북미왕국의 교과서를 비롯한 각종 서적이 유럽으로 흘러가면서, 유럽의 지식인들은 이를 읽고 여러 영향을 받았을 테니, 이전과는 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누구보다 북미왕국과의 교역이 자국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설사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노예무역의 금지를 주장할 겁니다.”
“하긴. 그건 그렇겠군.”
양심보다 이득을 위해서라도 목소리를 높일 거라는 조용한 곰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피식 웃은 정성국은 커피를 마시며 조용한 곰이 유럽 각국 대사를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들었고, 그러다 조용한 곰이 네덜란드 대사관을 방문했었을 때의 일을 이야기하자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네덜란드 대사가 노예무역은 금지되어야 한다면서 포르투갈을 비난하고 브라질의 각종 정보를 넘겨줬다고?”
“그렇습니다. 네덜란드는 아시아에서 포르투갈과 부딪친 이후로 앙숙이나 다름없고, 이전에 포르투갈을 견제하기 위해 브라질을 공격해 브라질 북부 지역을 점령하기도 했기 때문인지 브라질의 사정에 밝더군요. 덕분에 괜찮은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지요.”
신대륙의 각종 열대작물을 재배해 유럽으로 가져가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유럽 각국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브라질을 탐낼 수밖에 없었다.
땅이 넓어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대농장을 건설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해서 아시아에서 여러 번 충돌해 서로 간에 감정이 좋지 않았던 포르투갈이 브라질 북동부를 공격해 한때 이곳을 점령하기도 했었고, 그 때문에 브라질의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를 조용한 곰에게 모두 알렸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 포르투갈 농장주들의 가혹한 강제 노동을 참지 못하고 도망친 이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을 모두 알려주었다라...네덜란드는 우리가 이들을 지원해 포르투갈의 브라질 지배에 큰 타격을 주었으면 하는 모양이군?”
“예. 그런 의도로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흐음...”
이에 정성국은 잠시 고민했지만, 포르투갈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간에, 이들과 접촉하는 것이 나쁠 것 없다는 생각에 정성국은 조용한 곰에게 말했다.
“네덜란드가 이야기한 킬롬보 도스 팔마레스로 사람을 보내 접촉해보게.”
예상했던 정성국의 명령에 조용한 곰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위장 상단을 움직여 접촉해보겠습니다.”
이에 정성국인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조용한 곰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그래? 프랑스 대사는 자네의 말을 듣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프랑스는 북미왕국과 평화 조약을 맺은 후로 북미왕국과 교류하긴 했지만, 그 교류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는 자존심이 강한 루이 14세의 영향 때문이었고.
한창 유럽의 중심이라고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프랑스였지만, 북미왕국과의 전쟁에서 처참하게 깨졌으니.
다만 루이 14세도 북미왕국과의 교역이 프랑스에 이득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고, 최근 유럽 각국이 북미왕국과 교류하며 북미왕국의 각종 지식, 기술 등을 배워 나라를 발전시키려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현재 프랑스에 대항하고 있는 에스파냐, 네덜란드, 여기에 덴마크까지 북미왕국과 외교 조약을 맺고 대사관까지 설립하며 교류를 확대하고 우호를 다지고 있었으니 지금처럼 데면데면하게 지냈다간 나중에 큰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물론 북미왕국이 저들 반프랑스 동맹에 참여하지야 않겠지만, 친분이 있는 나라에 더 많은 신식 소총을 넘길 수도 있었으니.
해서 루이 14세는 콜베르에게 명령해 북미왕국과의 우호 관계 증진을 위해 양국에 대사관을 설립하는 문제를 논의하라고 명령했고, 협상 끝에 최근 프랑스 대사가 새한성에 파견되었는데, 이 프랑스 대사의 반응이 다른 대사들의 반응과는 달랐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흥미를 보이며 되묻자 조용한 곰은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프랑스 대사도 최근 새한성의 분위기를 알고 있기에 노예무역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리라는 것은 예상한 듯싶었지만, 아국의 외교방침이 바뀌어 노예무역을 금지하지 않는다면 외교를 단절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몹시 당황하더군요.”
이에 정성국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른 대사들과는 달리 프랑스 대사만 포르투갈의 일에 무지했다라...역시 따돌림을 당하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유럽에서 프랑스는 에스파냐, 네덜란드, 덴마크와 전쟁 중이다 보니 이곳의 대사들도 프랑스 대사를 빼놓고 모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불편하니까요.”
덕분에 프랑스 대사는 다른 대사들처럼 타국 대사관에 들러 모임에 참석하기보다는 새한성을 구경하러 돌아다니는 일이 더 많다고 조용한 곰이 설명하자 정성국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 유럽 각국이 새한성에서 똘똘 뭉치는 것보다 저렇게 분열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지. 그리고 곧 오스만 대사가 새한성에 부임하면 프랑스 대사도 우군이 생기는 셈이니 심심하지 않겠어.”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스웨덴과도 외교 관계를 맺는다면...꽤 재밌어질 것 같습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