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1화
잉글랜드 대사가 에스파냐 대사관의 응접실의 문을 열다가 응접실 안쪽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제가 제일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에스파냐 대사의 대꾸에 다른 대사들도 고개를 끄덕이자 잉글랜드 대사는 이해해주어서 고맙다는 눈인사를 한 후 빈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확실히 전화가 있어 편하긴 하군요.”
“하하하. 그렇지요. 예전이었다면 따로 사람을 보내야 했겠지만, 이제는 전화 한 통으로 약속을 정하거나 간단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요.”
작년 말에 전화의 존재가 북미신문을 통해 알려지고, 올 초부터 북미왕국의 백성들은 전화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 북미신문을 통해 전화의 존재를 알게 된 각국 대사들은 그동안 북미왕국의 빠른 정보 전달 체계가 바로 이 전화였음을 깨닫고 경악하며 앞다투어 조용한 곰에게 몰려가 이에 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다만 조용한 곰은 자세한 것을 자신이 알겠느냐고 반문하며, 자신이 말해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북미신문에 실려있으니 북미신문을 살펴보라고 이야기했고.
이에 대사들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다 혹시 자신들도 전화를 이용할 수 있을지 물었고, 이미 정성국에게 이에 관한 허락을 받았던 조용한 곰은 대사관에도 전화기를 설치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조용한 곰이 전화기 수량 부족을 이유로 혹여 전화기가 고장이 난다면 당분간 교체해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이자, 대사들은 다른 기물들처럼 구조를 알아내겠다고 함부로 분해하지 말라는 속뜻을 파악하고 민망한 표정으로 조용한 곰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속으로는 상황을 봐서 뜯어보긴 해야겠다고 여겼고.
그 후 대사들은 북미왕국에서 하루라도 빨리 대사관에 전화를 설치해주기를 기다렸지만, 전화기 설치는 개발청의 소관이고, 이미 북미신문을 통해 전화를 알리면서 전화기 판매 및 설치 예약을 받았는데, 돈이 많은 북미왕국 백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예약했기에 일정이 뒤로 밀렸고, 덕분에 민간에 통신망이 개방된 지 약 4개월이 흐른 후에야 대사관에도 전화기가 설치되었으며, 이게 약 1주 전의 일이었다.
해서 대사들은 아직 전화가 무척 신기할 따름이라 잉글랜드 대사가 전화를 입에 올리자 일제히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그때 최근에 대사관을 설립해 새한성에 부임한 덴마크 대사가 입을 열었다.
“헌데 정말 북미신문에 나온 것처럼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더라도 전화선이 연결되어 있다면 별다른 불편함 없이 통화할 수 있는 걸까요? 전 그게 참 궁금합니다만...”
이에 네덜란드 대사가 덴마크 대사의 의문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하긴. 그동안 전화를 이용해 여러 번 통화하긴 했습니다만, 전화를 건 곳이 죄다 가까운 곳이다 보니...”
조용한 곰을 졸라 대사관에 전화를 설치하긴 했지만, 딱히 전화할 곳이 많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다른 대사관이나 외무청 정도였으니.
그러다 보니 대사들은 북미신문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정말 장거리에서도 별다른 문제 없이 통화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있었기에 이에 공감하고 있을 때 잉글랜드 대사가 왠지 입이 근질근질한 표정인 에스파냐 대사를 보고 무언가를 떠올렸다.
“어? 그러고 보면 에스파냐는 새진주에 공사관을 두고 운영하지 않습니까?”
다른 나라들은 수도가 항구와 가까웠지만, 에스파냐는 수도가 내륙에 있어 수도에는 대사관을, 항구에는 그보다 규모가 작은 공사관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에스파냐도 새한성에는 대사관을, 새진주에는 공사관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었기에 잉글랜드 대사관이 이를 떠올리고 질문하자 에스파냐 대사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새진주에 있는 공사관에도 전화가 설치되었습니다. 해서 바로 통화할 수 있었지요.”
“오! 그렇습니까?”
“어떻던가요? 정말 북미신문에 나온 것처럼 그렇게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별문제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던가요?”
다른 대사들이 일제히 관심을 보이자 에스파냐 대사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분명 이곳에서 수천km나 떨어져 있는 공사와 통화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물론 북미신문에 쓰여 있기는 했지만, 그리고 실제 전화를 이용해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사들은 과연 수천km나 떨어져 있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전화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에스파냐 대사의 이야기에 새삼 북미왕국의 기술력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는 것을 느끼고 탄성을 내질렀다.
“허...”
“이거 처음 전화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전화의 가치가 정말 대단하군요.”
“그렇지요. 멀리 있는 상대에게 즉각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는 거니까요.”
“그리고 이 전화의 발명으로 북미왕국은 더 강력해질 것 같습니다.”
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이야기하는 잉글랜드 대사의 말에 에스파냐 대사가 공감한다는 듯 맞장구쳤다.
“예. 북미왕국은 북미대륙 전체를 영토로 두었기에 이를 통치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지요. 그나마 북미왕국의 이동 수단이 빠른 편이라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관리를 파견하거나 정보를 주고받는 데 유리했는데, 이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전화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으니...”
“이 통신 체계를 어떻게든 본국에 도입하고 싶은데...어렵겠지요?”
잉글랜드 대사의 말에 에스파냐 대사가 그게 가능하겠느냐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북미왕국에서 그걸 허락할 리가 없잖습니까. 특히 전화는 전기로 작동하는 물건이다 보니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끙...”
북미왕국에선 전기 기술이 유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잉글랜드 대사는 한숨을 내쉬었고, 잉글랜드 대사의 한숨에 아쉬움이 가득 담겨있는 것을 느낀 다른 대사들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지만, 여기서 한탄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었기에 네덜란드 대사가 에스파냐 대사를 보면서 물었다.
”그보다 저희를 이렇게 갑자기 부른 이유는 뭡니까?“
슬슬 자신들을 급히 부른 용건을 이야기하라는 네덜란드 대사의 이야기에 에스파냐 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에 새진주에 있는 공사와 통화했는데, 조금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어 급히 이렇게 여러분들을 초대한 겁니다.“
”놀라운 이야기요?“
“지금 새진주에 포르투갈 외교관이 와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아. 압니다. 대사관 설립 문제와 교역 확대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몇 주 전부터 새진주에서 웅크린 늑대와 협상 중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헌데 새진주에 있는 공사가 이야기하기를 이 협상이 갑자기 중단되고 포르투갈 외교관은 급히 유럽으로 가는 북미왕국의 배를 타고 떠났다더군요.”
“음? 대체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기에 갑자기 협상이 중단되고 포르투갈 외교관이 유럽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에 네덜란드 대사가 미소를 지으면서도, 갑작스럽게 협상이 중단된 이유를 아느냐고 묻자 에스파냐 대사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다른 대사들은 안색을 굳혔고, 미소를 짓고 있던 네덜란드 대사도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에스파냐 대사를 바라보고 중얼거렸다.
“설마...?”
“예. 북미왕국이 이 노예무역을 지적하며 협상을 중단했답니다.”
“허...”
에스파냐 대사가 노예무역을 입에 올렸을 때부터 설마 했는데, 정말 노예무역 때문에 포르투갈과의 협상을 중단했다고 하니 대사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런 대사들의 반응에 에스파냐 대사가 덧붙여 말했다.
“더불어 공사가 새진주를 떠나기 전 포르투갈 외교관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데...북미왕국에서는 만약 포르투갈이 노예무역을 공식적으로 금지하지 않는다면 포르투갈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이야기했답니다.”
“헉! 외교 단절이요?”
“끙...”
“최근 북미신문에 계속 노예무역에 관련된 기사가 실리고, 찻집에 드나드는 북미왕국 백성들도 노예무역에 관해 관심을 보이고 한마디씩 하면서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이렇게 강수를 둘 줄은 몰랐군요.”
“예. 노예무역을 금지하지 않으면 외교 관계를 단절하겠다니...”
이들도 북미신문에서 계속 노예무역에 관한 기사가 실리며 문명국으로써 이를 그냥 두고 봐서는 안 된다는 기사들을 보고 북미왕국이 무언가 조치를 취하리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외교 단절은 너무 강경한 조치였기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잉글랜드 대사가 에스파냐 대사를 보고 물었다.
“그래서 포르투갈 외교관은 뭐라 대답했답니까? 협상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보면 설마...”
이에 에스파냐 대사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네덜란드 대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포르투갈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가 노예무역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걸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거절했겠지요.”
“글쎄요. 그렇게 되면 북미왕국과의 교역은 완전히 물 건너가니 손해도 막심할뿐더러, 북미왕국이 작정하고 브라질을 흔들기 시작하면 포르투갈이 그걸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잉글랜드 대사가 네덜란드 대사의 말에 러시아 차르국과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입에 올리며 반문하자 덴마크 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거기에 북미왕국과 외교 관계가 단절된다는 것은 신식 소총을 구할 길도 막힌다는 뜻이잖습니까. 유럽의 여러 나라가 앞다투어 사들이고 있는 신식 소총을 포기한다? 오히려 인구가 적은 포르투갈로선 신식 소총이 더욱 간절할 텐데요?”
덴마크 대사의 지적에 잉글랜드 대사나 네덜란드 대사는 순간 안색이 굳었다.
생각해보니 자신들도 노예무역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금지하지 않는다면 북미왕국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어 버리고, 그렇게 되면 비싼 값을 내고 사들인 신식 소총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더불어 본국의 과학자들이 이 신식 소총과 총알은 연구하고는 있지만, 신식 소총은 몰라도 총알은 당장 복제가 불가능하다는 학자들의 보고까지 떠오르자 자신들도 결국 노예무역을 금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고.
그때 이들의 귓가에 에스파냐 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르투갈의 노예무역은 그 규모가 워낙 크고, 식민지 운영까지 관여되는 문제라 아무리 자신이 전권을 가지고 있어도 이를 결정할 수는 없다면서 웅크린 늑대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모양입니다. 해서 6개월 안에 답을 주기로 했고 이 때문에 급히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답니다.”
“흐음...그렇습니까? 그보다 공식적으로 노예무역을 금지하지 않으면 외교 단절이라...이거 포르투갈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지금 중요한 것은 포르투갈이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잉글랜드 대사가 질문을 던지자 노예무역의 규모가 작아 노예무역을 금지하더라도 큰 타격이 없는 덴마크 대사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북미왕국이 흑인 노예들이 카리브해에 팔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에 에스파냐 대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단 포르투갈이야 직접 노예를 공급하고 있으며, 협상 중이었으니 먼저 이야기를 꺼냈을 뿐이지, 곧 우리에게도 이를 통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끙...”
에스파냐 대사의 말에 노예의 노동력으로 카리브해의 섬들을 개척하던 잉글랜드 대사나 네덜란드 대사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그러다 잉글랜드 대사는 에스파냐 대사가 의외로 여유롭다는 것을 떠올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에스파냐 역시 카리브 해의 섬들은 인력이 부족해 아프리카 노예들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노예무역을 금지한다면 타격이 없지 않을 테니까.
“헌데 에스파냐 대사께서는 무척 여유로우시군요?”
이에 에스파냐 대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본국에서 북미왕국과의 외교 단절을 각오하면서 노예무역을 지지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우니까요.”
다른 나라들보다 에스파냐는 북미왕국과의 무역 규모도 컸고, 북미왕국과 외교 관계가 단절되면 파나마 운하의 운영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으니 에스파냐로서는 노예무역을 금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떠올린 잉글랜드 대사가 상황을 이해하고 쓴웃음을 머금었을 때 네덜란드 대사가 에스파냐 대사에게 물었다.
“그렇긴 한데 노예무역을 공식적으로 금지하면, 카리브해 섬들의 개발이 지지부진해지지 않겠습니까?”
에스파냐는 쿠바 섬, 히스파니올라 섬, 푸에르토리코 섬 같은 커다란 섬들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섬들의 원주민들은 각종 질병으로 인해 거의 전멸한 상태였다.
헌데 여기서 노예무역을 금지해버리면 이 섬들을 어떻게 개발할 거냐고 묻는 네덜란드 대사의 말에 에스파냐 대사는 그게 뭐 어려운 문제겠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노예를 구하지 못한다면 계약 노동자로 대체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계약 노동자라...”
최근에 카리브해의 노예 가격은 오르고 설탕을 비롯한 각종 작물의 가격은 조금씩 떨어지고 있어 노예 가격이 부담되는 농장주들은 유럽에서 계약 노동자들을 데려오고 있었으니, 큰 문제는 아니라고 에스파냐 대사가 덧붙이자 비슷한 상황이라 현재는 계약 노동자 반, 노예 반으로 식민지를 운영하고 있는 잉글랜드 대사가 고개를 끄덕였고.
하지만 네덜란드의 경우 인구가 적은 편이라 계약 노동자를 구하기 쉽지 않았고, 네덜란드 역시 북미왕국과의 교역이 중요했고, 여기에 본국은 한창 프랑스와 전쟁 중이라 신식 소총을 계속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결국 노예무역을 금지해야 했는데, 이렇게 되면 피해가 없지 않을 것 같아 투덜거렸다.
“익숙한 고향을 떠나 이 먼 곳까지 올 사람이 많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적당한 대가를 약속한다면 돈이 궁한 하층민들은 기꺼이 배에 오르지 않겠습니까?”
에스파냐 대사의 반문에도 네덜란드 대사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걸로 부족한 인력을 모두 대체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