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579화 (579/850)

579화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교역 협상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니요!”

휴고는 웅크린 늑대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지만, 웅크린 늑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새한성에서 새로운 지침이 내려와서 말입니다.”

휴고는 새한성에서 새로운 지침이 내려왔기에 자신은 이번 일에 아무런 책임도 없고, 나한테 따져봐야 바뀔 것은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웅크린 늑대를 보고 마치 벽에 대고 고함을 치는 것 같아 맥이 풀려 자리에 다시 앉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물론 휴고도 갑자기 북미왕국이 이러는 이유를 짐작했다.

북미왕국은 북미신문을 통해 더는 노예무역을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알린 셈이니.

하지만 명확히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휴고는 자세를 바로 하고 웅크린 늑대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체 무엇 때문에 교역 협상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겁니까.”

“음...귀하가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아국의 백성들은 아직도 야만적인 노예무역이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분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노예무역이 일부 비도덕적인 상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라 차원에서 직접 개입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경악했지요.”

“으음...”

유럽인들도 이 행위가 비도덕적이고 종교적으로도 용인받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노예무역에 종사하는 유럽인들은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 흑인은 같은 인간이 아니고, 그렇기에 이들을 노예로 삼고 거래하는 것도 죄가 아니라고 떠들어대긴 했지만 그게 헛소리라는 것은 자신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웅크린 늑대의 비난에도 휴고는 신음을 흘렸고.

그런 휴고의 반응에 웅크린 늑대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해서 북미왕국의 백성들은 지금처럼 방관하는 것은 노예무역을 지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며 북미왕국이 이 문제에 개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런 백성들의 반응 때문인지 새한성에서 새로운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노예무역을 인정하는 나라와는 외교 관계를 단절하라고.”

“헉! 그게 무슨...”

웅크린 늑대가 외교 관계의 단절을 입에 올리자 휴고는 기겁했다.

외교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뜻은 상대를 무관계국이나 적대국으로 인지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았으니까.

물론 이 문제로 북미왕국이 자신들에게 선전포고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현재 북미왕국의 국력을 생각하면 무척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기에 휴고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웅크린 늑대는 그런 휴고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귀국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을 장려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귀국이 노예무역을 공식적으로 금지하지 않는다면...”

“...외교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뜻입니까?”

휴고의 물음에 웅크린 늑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휴고는 고민이 많은 얼굴을 하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되면...설마 교역도 끊기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허어...”

북미왕국의 등장 이후 아시아 물품에 열광하던 유럽 귀족은 북미왕국의 물품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점차 북미왕국의 국력이 알려지고, 사진기, 축음기 같은 신기한 기물들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북미왕국의 물품은 그 가치가 더욱 올라갔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시아의 사치품들의 가치는 떨어졌고.

유행이 지났기에 아시아 물품을 비싸게 사들일 귀족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나마 인도에서 나오는 보석들이나 동남아에서 나오는 각종 향신료 등은 여전히 수요가 있기에 다행이었지만, 많은 비중을 차지하던 청나라의 비단, 도자기 등의 수요는 확 줄어들었기에 아시아 무역의 규모는 축소되었고.

그렇기에 포르투갈은 이 손해를 메우기 위해 노예무역의 규모를 더욱 키우고, 북미왕국과의 교역 확대를 위해 애를 썼고.

헌데 노예무역을 금지하지 않으면 북미왕국과의 교역이 끊기고, 북미왕국과의 교역을 유지하려면 노예무역을 금지해야 했으니 어느 쪽을 선택해도 포르투갈의 입장에선 막대한 손해였기에 휴고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해서 휴고는 한숨을 푹푹 쉬다가 어떻게든 웅크린 늑대를 설득해볼 요량으로 말을 걸었다.

“이거 내정간섭 아닙니까?”

하지만 웅크린 늑대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내정간섭이라니요. 저희는 그저 노예무역을 장려하는 야만적인 국가와 더는 외교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그 후로 몇 번이고 이 일방적인 북미왕국의 외교 방식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이야기했지만, 웅크린 늑대도 충분히 대비했는지, 다 받아쳤기에 휴고는 항복하듯 두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휴우. 물론 노예무역이 야만적인 행위라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인구가 적은 우리 포르투갈로서는 노예무역을 포기하기 어렵습니다. 안정적으로 노예를 구하지 못한다면 저 드넓은 식민지를 어찌 개척하고 운영한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웅크린 늑대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안을 제시했다.

“일손이 부족하다면 계약 노동자를 쓰면 되겠지요. 물론 계약 노동자를 쓰면 지속해서 돈이 나가긴 할 겁니다. 하지만 노예를 관리하는 비용이나 노예의 가격을 생각하면 계약 노동자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여깁니다만...”

그동안 북미왕국의 위장 상단은 정성국의 명령을 받고 꾸준히 카리브해와 남미 북부해안을 돌아다니며 노예를 사들였다.

그것도 시세보다 비싸게.

물론 노예를 사들임으로써 돈을 벌게 된 노예상인들이 더 많은 노예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될 수도 있지만, 어차피 그냥 내버려 두어도 이들을 제지할 세력이 없어 공식적으로 노예무역이 금지되기 전까지 1200만 명가량의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신대륙으로 끌려간 것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최대한 노예들을 사들여 노예 값을 올려 농장주들의 부담을 더해주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탓이다.

그리고 위장 상단이 노예를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카리브해 인근의 노예 가격은 곱절로 뛰었고, 플로리다 지역에서 대규모로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설탕을 대량생산해 유럽에도 팔기 시작하면서 설탕 가격이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하자, 카리브해의 농장주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었고.

그러니 최근에 카리브해로 이주한 농장주들은 노예 가격이 부담되어 계약 노동자를 고용하기도 했는데, 의외로 노예를 고용하는 것이나 계약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나 들어가는 비용엔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알려졌고, 이 때문에 최근 에스파냐나 잉글랜드의 경우 계약 노동자를 고용해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웅크린 늑대가 부연 설명하자 휴고가 생각이 많은 얼굴로 이를 경청했다.

“으음...”

이런 휴고의 반응에 웅크린 늑대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포르투갈이 정말 식민지를 제대로 개척하고 싶다면 노예가 아닌 계약 노동자를 쓰는 것이 낫습니다. 그동안 귀국은 브라질의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의 백만에 달하는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아 브라질로 데려왔습니다만...그래서 인력 부족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아니잖습니까. 태반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모두 죽었지요. 그러니 인력 부족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개척은 느리지요.”

“그럼 계약 노동자들은 다르다는 겁니까?”

“계약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돈을 받으니 노예처럼 영양부족으로 죽는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들이 브라질에 정착하면 점차 브라질의 인구가 늘어날 테고 그러면 인구 부족 문제가 좀 나아지겠지요. 솔직히 수십 년 동안 넘게 백만이 넘는 아프리카인들을 데려왔는데 인구가 늘어나지 않는 것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겁니까?”

웅크린 늑대의 비난에는 휴고도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지난 100년 동안 끊임없이 노예들을 브라질로 실어날랐지만, 인력 부족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지금의 브라질은 분명 무언가 잘못되긴 했고, 포르투갈의 지식인들도 이를 지적하고 있긴 했으니까.

물론 리스본에서는 브라질의 여러 농장주들과 그 뒤에 있는 귀족들의 반발 때문에 이 문제를 애써 무시했지만, 이제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되었다고 여긴 휴고였다.

북미왕국과의 교역 문제가 걸려 있었고, 북미왕국이 작정하고 브라질의 원주민들과 노예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기 시작한다면 어쩌면 식민지를 잃을 수도 있었으니.

해서 휴고는 생각을 정리하고 웅크린 늑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북미왕국과의 외교 문제에 한해 전권을 갖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건 제 권한을 넘는 문제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뭐 이해합니다. 그럼...”

아무리 휴고가 전권을 가지고 있다 한들 포르투갈 무역의 한 축을 차지하는 노예무역을 금지하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짐작했기에 웅크린 늑대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어라 말을 하려 할 때 휴고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 잠깐의 유예 기간을 주었으면 합니다. 최소한 제가 본국에 다녀올 때까지만이라도 교역을 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외무청에서는 어차피 휴고가 곧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짐작했고, 이를 빌미로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끊어버린 후 이를 유럽 각국에 통보해 다른 유럽 국가들을 압박할 생각이긴 했지만, 애당초 휴고는 이를 결정할 권한이 없는데 유예 기간마저 주지 않는다면 뒤에서 이런저런 말이 나올 것 같았기에 웅크린 늑대는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흠. 그럼 6개월 드리지요. 10월까지는 교역을 계속하고 그 후에는...”

웅크린 늑대가 말을 흐리자 휴고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흐음. 의주 방면도 별다른 이상은 없다라...”

카무이쿠르가 유철이 보낸 편지를 읽고 중얼거리자 막사 안에 있던 지휘관들 가운데 누군가가 슬쩍 입을 열었다.

“이거 청나라군의 지휘관이 정말 우리에게 겁을 먹은 것 아닙니까?”

“예. 이전이라면 모를까 본국에서 지원 병력이 도착했는데도 압록강을 넘을 준비를 하기보다는 압록강 주변에 진영을 구축하고 방어 준비를 하는 청나라군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청나라군의 지휘관이 우리와의 전투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만...”

2주 전, 유철이 용암포를 잠시 방문했을 때, 청나라의 대규모 지원군이 봉황성에 있던 병력과 합류하고, 곧 일부 병력이 압록강으로 다시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카무이쿠르나 유철은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압록강 인근에 도착한 청나라군은 압록강변 근처로 오지 않고 진영을 꾸리기 시작했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청나라군이 당장 도하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카무이쿠르와 유철은 먼 곳에서 이곳까지 행군하느라 지친 병력을 일단 쉬게 할 속셈이라고 판단했고, 병력의 휴식이 끝나면 움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해서 유철은 만약을 대비해 바로 의주로 돌아갔고, 카무이쿠르는 병사들에게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당부하고, 탐사대에게 다시 압록강 주변을 순찰하라고 지시했다.

헌데 예상과는 달리 2주 넘게 청나라군은 딱히 움직일 기미가 없었고, 그러니 일부 지휘관들은 청나라군의 지휘관이 이전의 전투에서 대패한 것 때문에 일부러 전투를 피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하자 이를 곰곰이 듣고 있던 굳건한 바위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개인적으로야 청나라군의 지휘관이 이전의 전투로 우리와의 전투를 꺼릴 수야 있겠습니다만...북경에서 새로 지원 병력을 다수 보내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와의 전투를 꺼려 뭉그적거린다면 북경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굳건한 바위의 말도 일리는 있었기에 일부 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카무이쿠르는 굳건한 바위를 보고 입을 열었다.

“허면 자네는 지금 청나라군의 움직임이 북경의 명령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예. 청나라는 아직 내부 정리도 끝내지 못한 상황에서 조선을 침공했고, 패전 후엔 어떻게든 병력을 다시 만들어 이곳에 보냈습니다. 그건 그만큼 청나라가 조선을 신경 쓴다는 뜻이고, 청나라군의 내부 사정을 파악할 수는 없으나, 기존의 지휘관이든, 아니면 패배의 책임을 지고 기존의 지휘관이 경질되고 새로운 지휘관이 임명되었든 간에 현 청나라군의 지휘관은 어떻게든 군공을 세우기 위해 기를 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무언가 움직임이 보여야 하는데 이렇게 조용한 것을 보면...”

굳건한 바위의 말처럼 지금 청나라군의 움직임은 북경에서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너무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기에 카무이쿠르는 굳건한 바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겨 고개를 끄덕였을 때 조병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그럼 청나라에서는 우리와 조선이 혹시 북진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를 막기 위해 지원 병력을 보냈다는 소리가 되는데 과연 자신들이 천하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청나라에서 그러겠습니까?”

“뭐 우리와 조선을 얕잡아봤다가 대패하고 정신을 차렸을 수도 있지요. 어쩌면 3함대의 활약에 전쟁을 지속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고요.”

그렇게 지휘관들은 한마디씩 하며 청나라군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때 전령이 막사 문을 열고 들어와 보고했다.

“사령관님! 서쪽에서 3함대의 배가 보입니다!”

“오. 그래? 회의는 일단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다만 적들의 의도를 모르는 만큼, 경계를 늦추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