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8화
“북벌이요? 한양에서 북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씀입니까?”
카무이쿠르는 용암포를 찾아온 유철이 꺼낸 이야기에 커피를 건네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유철은 그런 카무이쿠르의 반응이 충분히 이해되었기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북방에서의 승전보가 전해진 후, 개화파에서는 북방에서의 일을 세계신문을 실어 조선 전체에 알리자고 이연에게 허락을 구했다.
어차피 북방에서의 일이 알음알음 알려질 텐데 괜한 소문으로 백성들이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세계신문을 통해 제대로 알려 백성들의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 개화파의 생각이었고, 이연도 이에 동의한 것이다.
그리고 이연의 허락을 받은 개화파는 세계신문 전체를 북방에서의 일어났던 전투들을 비교적 상세히 적어 조선 팔도에 뿌렸고.
그 반응은 뜨거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북미왕국과 교류하면서, 그리고 세계신문을 읽으면서 세상은 무척 넓다는 것을 알게 된 조선인들이었으나 이들은 그동안 중국을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선인들은 야인이라 무시했던 여진족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국을 점령했을 때도 내심 충격을 받았었고.
거기에 청나라는 조선을 침공했고, 조선은 이를 막지 못해 결국 여진족의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했다.
그러니 조선인들의 머릿속에 청나라는 곧 강국이고 청나라군은 강력하다는 인식이 틀어박혔는데, 이번에 청나라와의 전쟁이 일어났고, 몇 차례의 전투로 이 청나라군을 완전히 박살 냈다고 하니 어찌 흥분하지 않겠는가.
거기에 어렸을 적 호란을 경험한 이들도 적지 않다 보니, 반응은 더욱 강렬할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세계신문을 통해 북방의 일을 알게 된 지방의 양반들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 기꺼이 창고를 열어 크게 잔치를 벌이기도 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전승비를 세워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고.
더불어 그동안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로 가득 찬 조정을 비판하고 고깝게 보던 지방의 양반들도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지방의 양반들은 공자의 말씀보다는 북미왕국의 교과서를 더 중요시하는, 그리고 도로를 재정비하고 상업을 발전시켜 조선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세수를 걷으려는 조정 관리들이 탐탁지 않았는데 이들은 조선을 조금씩 변화시켜 결국 예전의 치욕을 씻은 셈이었으니.
물론 일부는 조선 지원군의 역할이 더 크지 않겠느냐고 애써 조선군을 폄하하기도 했지만, 이는 극소수였고.
여기까지는 이연이나 개화파들이 북방의 일을 알려 기대한 효과였기에 만족했지만, 이후에는 상황이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북미왕국과 교류한 지도 시일이 꽤 흘렀기에 한양의 양반이든 지방의 양반이든 북미왕국의 교과서를 살펴보지 않은 이가 없었고, 북미왕국의 교과서 중에는 조선 출신을 위한 역사 교과서도 있었으며, 이는 다른 북미왕국의 학문과는 달리 생소하지 않았기에 꽤 즐겨 읽었는데 이 역사 교과서에는 삼국시대에 관한 분량이 꽤 많았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의 땅을 옛 조선 민족의 땅으로 표기해두고 있었다.
그러니 이를 본 양반들 가운데는 요동을 잃어버린 조선 민족의 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으며, 이번에 청나라군이 대패하고 도망쳤고, 청나라 내부는 아직도 혼란스러우니 이 기회에 요동을 되찾아야 한다며 상소를 올렸고.
처음 이 상소가 올라오자 이연과 조정 대신들은 허허거리며 웃었지만, 이러한 상소가 점차 많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당황했다.
분명 청나라군이 극심한 피해를 보고 물러나긴 했지만, 아직 압록강 너머에는 2만에 가까운 병력이 봉황성에 주둔하고 있었을뿐더러, 과연 북미왕국이 자신들을 도와 압록강을 넘어 청나라군을 공격하는 데 동의할지도 의문이었으니.
다만 일부 조정 대신들은 북미왕국이 돕는다면 북벌에 성공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면서 이를 조선 지원군 사령관과 논의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유철의 장계를 보니 북미왕국의 검차라는 무기는 무적에 가까웠고, 북미왕국의 화포는 파괴력이 대단했으니, 이를 앞세운다면 봉황성에 주둔한 청나라군을 물리치고 그대로 북진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청나라도 당황할 테고 화친을 제의할 테니 상소에 올라온 것처럼 요동을 되찾지는 못하더라도 전쟁을 끝낼 수 있어 나쁘지 않다는 주장이었고.
이에 일단 조정에서는 유철에게 현 조정의 상황을 알리고, 조선 지원군 사령관의 대답을 받아왔으면 한다는 연락을 보냈고, 그렇게 유철은 의주에서 용암포로 온 것이며 이러한 사정을 모두 카무이쿠르에게 이야기해주자 카무이쿠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글쎄요. 제가 받은 명령은 조선을 도와 조선을 침공하는 청나라군을 격퇴하라는 거였지 압록강을 넘어 청나라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아니었기에...”
“역시 그렇습니까?”
유철은 카무이쿠르가 말을 흐리자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이런 유철의 반응에 카무이쿠르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 뭐 저도 전략적인 관점에서 압록강을 넘어 청나라군을 공격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만...압록강을 넘어 청나라군의 영토로 진입하는 것은 외교적인 문제까지 고려해야 하는지라 이건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아마 포로나이에 있는 투로시노님도 이를 결정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
“천상 북방항로가 열린 후에나 결정할 수 있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솔직히 압록강 너머가 조선의 옛 고토이기는 하지만 여진족의 발상지이자 고향이기도 하기에 압록강을 넘으면 확전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러니 본국의 명령 없이 제 판단으로 움직이기는 좀...”
카무이쿠르의 말에 유철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허면 조정에서 오해하지 않게 이를 잘 설명하고...”
그때 막사의 문이 확 열리며 조병수가 외쳤다.
“사령관님! 봉황성에 청나라군의 지원군이 당도했습니다!”
“뭐!?”
* * *
포르투갈의 외교관으로 북미왕국을 방문한 휴고는 여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창문을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휴고는 새진주의 명물이라는 관공서 건물과 적당히 떨어진 곳에 아직 건설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 관공서 건물보다 배는 높은 고층 건물을 번갈아 보고 새삼 감탄했다.
“허. 웅장하니 멋지긴 하군. 리스본에도 저런 고층 건물을 건설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겠는데?”
그러다 문득 휴고는 손가락을 들어 두 건물의 높이차를 비교해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한 달 사이에 훨씬 높아졌군. 이것 참...”
교회의 첨탑을 건설하는데 수년에서 수십 년이 걸리는 것을 생각해보면, 참 터무니없는 건설 속도라고 생각하며 휴고가 고개를 젓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겼다.
“일어나셨습니까. 대표님.”
“아. 일어났네.”
휴고의 말에 방문이 열리며 보좌관이 들어와 들고 있던 북미신문을 휴고에게 펼치며 말했다.
“이걸 보시지요. 대표님.”
“으음. 이건...”
보좌관이 펼친 북미신문에는 큼지막한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아프리카 노예 시장을 찍은 사진 같았기에 휴고는 신음을 흘리며 보좌관이 들고 있던 북미신문을 빼앗아 읽기 시작했고, 그러는 휴고의 귓가에 보좌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앙골라의 사진 같습니다. 예전에 이곳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제 기억 속의 풍경과 똑같더군요.”
“북미왕국이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던가?”
“글쎄요.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만...아마 이 북미신문의 기사를 쓰는 기자가 유럽의 배를 타고 아프리카를 방문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새진주에 있는 에스파냐 외교관에게 듣기로, 북미신문은 가끔 유럽을 방문한 기자들이 쓰는 일종의 기행기를 싣기도 했다니까요.”
휴고는 보좌관의 말을 들으며 계속 기사를 읽었는데, 기사는 아프리카에 만연한 노예 시장과 이곳에서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상세히 쓰여있어, 휴고가 표정을 찌푸렸다.
“흠. 한 2주 전부터 이렇게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인들에 의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꾸준히 올라오는 것이 조금 걸리는군.”
어쩌다 한 번 기사가 올라오는 것이야 몰라도 2주 넘게 북미신문에서 아프리카에 만연한 노예무역과 관련된 기사를 내보내니 실제로 노예무역을 하고 있는 포르투갈의 외교관인 휴고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꺼림칙했기에 이를 언급하자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특히 이 북미신문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대단해서...듣자니 바깥은 이 아프리카 지역에 관한 기사가 실린 이후로 말이 많답니다.”
“그래?”
2주 전에 이러한 기사를 읽긴 했지만, 어차피 이곳은 외국인 거주 구역이라 태반은 유럽인이라 별다른 반응이 없었는데, 외국인 거주 구역 바깥, 그러니까 북미왕국 백성들 사이에선 반응이 있다고 하니 휴고가 보좌관을 바라보며 더 이야기해보라는 눈치를 주었고, 보좌관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예. 북미왕국의 백성들은 현재 아프리카의 상황과 아프리카인들이 받는 고통에 안타까워하면서, 또 공감하는 모양입니다. 뭐 대부분은 태평양을 넘어 이 북미대륙으로 이주해 나라를 건국한 북미왕국의 국왕이 아니었다면 아프리카인들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을 수 있으니...”
“으음...”
북미왕국의 백성들이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게 자신들에게는 썩 좋을 것 같지 않아 휴고가 안색을 흐렸고.
“그래서인지 일부는 과격한 주장을 하기도 한답니다.”
보좌관의 말에 휴고가 긴장한 표정으로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과격한 주장?”
“그동안 북미왕국은 다른 지역의 원주민들을 많이 돕지 않았습니까. 러시아인들에게 고통받는 시베리아 원주민들 도와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만들기도 했고, 호주나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있으며 북미왕국의 백성들도 이러한 북미왕국의 대외정책에 자부심을 품고 있지요. 그렇기에 일부는 북미왕국이 아프리카에 진출해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답니다.”
“허. 말이 진출이지 그건...”
휴고가 기겁해 말을 흐리자 보좌관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노예무역에 종사하는 유럽 국가와 전쟁을 벌이자는 소리지요. 그리고 이러한 기사가 계속 올라온다면 그 목소리는 더욱 커질 테고...이것 때문에 다른 나라들도 고민이 많답니다. 이러한 기사들로 북미왕국의 백성들은 유럽 국가나 유럽인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테니까요.”
“아무래도 그럴 테지.”
노예무역의 큰손은 포르투갈이었지만,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 식민지를 운영하는 나라들은 모두 노예무역을 이용해 식민지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기사가 계속 나온다면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도 내심 불편할 수밖에 없었기에 휴고가 수긍했고.
그런 휴고를 보고 보좌관은 아까 만난 에스파냐 외교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걱정하던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동안 북미왕국은 노예 제도를 반대해 왔고, 북미왕국의 국왕 역시 노예 제도를 혐오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는 것에는 부담을 느껴 그동안 북미왕국은 암암리에 아프리카 노예들을 사서 해방하는 소극적인 행동을 취했습니다만...북미신문에 이런 기사가 계속해서 나온다는 뜻은 더는 이를 방치하지는 않겠다는 북미왕국의 선언이나 다름없다고 하더군요.”
북미신문을 운영하는 이가 왕실의 일원인 정평화였으니 북미신문의 뒤에 왕실이 있다는 것을 대사들도 잘 알고 있었다.
헌데 어떻게 보면 유럽 각국과의 관계가 어그러질 수도 있는 이런 민감한 내용의 기사가 연속해서 나오는 것은 왕실의, 정확히는 정성국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되었기에, 북미왕국이 북미신문을 빌려 앞으로의 외교 정책을 밝히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대사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더욱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설명에 휴고는 오늘 오후에 있을 웅크린 늑대와의 협상을 떠올리며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 문제가 이번 협상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도 있겠군.”
이에 보좌관은 어두운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휴고는 그동안 해왔던 협상이 어그러질 수도 있다는 걱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