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7화
정성국이 한창 업무를 봐야 할 시간에 씁쓸하고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집무실 한쪽의 창문 근처에서 만물이 생동하기 시작하는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린 후 집무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정평국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성국은 상념을 그만두고 표정을 정리한 후 고개를 돌려 왜 거기 멀뚱히 서 있느냐는 얼굴을 하고 있는 정평국을 보고 슬쩍 웃으며 손짓했다.
“마침 잘 왔다. 이것 좀 보거라.”
그러면서 정성국은 집무실 책상 위에 있던 커다란 종이봉투를 건넸고, 정평국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를 받아들었다.
“뭡니까 이건.”
정평국이 정성국을 보고 물어보았지만, 정성국은 그저 그 봉투를 열어보라는 시늉을 했고, 이에 정평국은 슬쩍 투덜거리며 커다란 종이봉투를 열어 안쪽을 살폈다.
안쪽에는 최근 개발된 최신식 사진기로 찍은 사진들이 수십 장이나 있었기에 이게 뭔가 싶은 정평국은 사진을 꺼내 살폈고.
“맙소사. 끔찍하군요. 이거 아프리카의 노예 시장을 찍은 사진입니까?”
정평국이 확인한 사진들에는 흑인들이 밧줄에 줄줄이 묶여있고 백인들이 무기를 들고 이들을 위협하는 모습이나, 쇠사슬로 묶인 흑인들을 거래하는 백인들의 모습 등, 노예 시장의 여러 모습이 찍혀 있었기에 표정을 찌푸리며 정성국에게 묻자 정성국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노예무역을 반대하는 캐롤라이나의 주민들이 직접 아프리카를 방문해 찍어온 사진이지.”
정성국이 북미 동해안의 캐롤라이나 지역을 방문했을 때, 한 흑인 관리가 캐롤라이나 주민 중 일부는 계속해서 고통받는 고향의 처지가 안타까워 북미왕국이 아프리카에 진출해 노예상인들의 활동을 위축시켜주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렸고, 정성국도 슬슬 나라가 안정되었으니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흑인 관리에게 고향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이들을 모으라고 일렀고.
흑인 관리가 모은 흑인들은 위장 상단의 도움으로 아프리카에 도착할 수 있었고 이들은 북미왕국의 백성들에게 아프리카의 처참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관리에게 받은 최신식 사진기를 이용해 유럽인들이 건설한 아프리카 항구에 존재하는 노예 시장의 풍경이나, 항구 주변의 마을을 약탈하고, 흑인들을 납치하는 모습 등을 찍어 귀환했고, 이들이 찍은 사진은 즉각 정성국에게 보내졌다.
그리고 사진을 확인한 정성국은 흑인들의 처지에 안타까워하며, 이런저런 이유로 그동안 이 문제에 거의 손을 놓고 있었던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이번에 확실히 노예무역을 금지해야겠다고 다짐했고.
하지만 정평국은 오히려 정성국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뜨고 정성국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고성능의 사진기를 캐롤라이나의 주민들이 용케도 구한 모양이군요?”
정평국이 들고 있는 이 사진들은 이번에 개발된 최신식 사진기로 찍어 인화해야 얻을 수 있는 사진들이었고, 이 최신식 사진기는 아직 민간에 풀지 않고 있었기에 정평국은 단순히 캐롤라이나의 주민들이 고향의 처지를 안타까워해 아프리카를 방문해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정성국이 처음부터 직접 이 일에 개입했음을 눈치챈 것이다.
그러한 정평국의 반응에 정성국은 피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짐작대로 내가 그들을 뒤에서 지원했지. 캐롤라이나 관리의 말에 따르면 일부 주민들이 계속해서 유입되는 노예 출신 이주민을 보고 노예상인들에게 파괴된 고향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북미왕국이 아프리카에 진출해 이러한 참상을 막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길래 말이다.”
정성국의 대답에 정평국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짐작하고 입을 열었다.
“흠. 그럼 형님께서는 이 사진들을 북미신문에 실어 노예무역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키울 생각이시군요?”
“그렇지. 그저 노예가 된 이들을 사들여 해방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노예무역을 근절시킬 수 없으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국이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요지의 기사를 실었으면 하는데?”
정성국의 대답에 정평국은 들고 있던 사진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 찍어온 사진도 많으니 노예무역에 관한 연속 기사를 내보내면 백성들도 노예무역의 실상을 알고 이를 멈추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 같긴 합니다만...굳이 이럴 필요 있습니까?”
정평국은 이렇게 번거롭게 사전작업을 할 필요 없이 그냥 외무청을 움직이는 것이 낫지 않나 싶어 묻자 정성국이 고개를 저었다.
“유럽 각국의 외교관들도 항상 북미신문과 새한성의 동향을 살피고 있으니, 북미신문을 통해 이러한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저들이 알아서 노예무역을 금지할 수도 있고...그게 아니더라도 여론을 명분 삼아 이 문제에 개입한다는 것을 알림으로써 유럽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겠지.”
“흠. 그건 그렇군요.”
“그리고...이렇게 해야 지금 새진주에서 대사관 설립 문제를 놓고 논의하는 포르투갈 외교관을 강하게 압박할 수도 있고 말이지.”
유럽 내의 전쟁에서 신식 소총이 사용된 이후, 유럽 각국은 북미왕국과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기 위해 외교관들을 보냈고, 그중 일부 나라는 대사관 설립에 무척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라 가운데는 포르투갈도 있었다.
그동안 북미왕국과 포르투갈의 관계는 썩 나쁘지 않았다
무역에 집중하는 포르투갈에 북미왕국은 돈이 되는 수많은 상품을 생산하는 매력적인 교역 대상이기도 했고, 남미 대륙 브라질에 광활한 식민지를 건설 중이었기에 괜히 강력한 북미왕국에 밉보여 봐야 좋을 것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북미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하지만 정성국은 포르투갈을 그렇게 좋게 보지는 않았는데, 포르투갈은 처음으로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만들어 팔았고, 다른 유럽 국가들은 돈이나 무기를 위해 아프리카 부족을 공격하고 부족원을 노예로 만드는 아프리카 세력이나 용병들에게 노예를 사서 카리브해로 공급하는 일종의 중계상에 가깝다면 포르투갈은 안정적인 노예 공급을 위해 아프리카 세력을 공격하고 새로운 정복지를 개척해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만드는 노예 공급원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다만 포르투갈과의 교역은 나라에 이득이 되는데 껄끄럽다는 이유로 외교 관계를 맺지 않을 수야 없는 노릇이었기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데면데면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신식 소총이 유럽에 판매되고 이로 무장하는 나라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포르투갈 역시 신식 소총 문제를 논의하면서, 이 기회에 양국의 우호 관계를 위해 대사관을 설립하자고 제의했고, 최근엔 어느 정도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정성국은 여론을 빌미로 포르투갈을 압박하고, 이를 통해 다른 유럽 국가들도 압박할 생각이었고.
“아. 그러고 보면 포르투갈도 노예무역에 종사하는군요. 그럼 여론을 빌미로 포르투갈을 압박하겠다는 건데...포르투갈이 과연 노예무역을 포기하겠습니까? 인구가 적은 포르투갈은 흑인들이 아니라면 식민지인 브라질을 개척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텐데요?”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와 함께 신대륙으로 진출했지만, 에스파냐가 진출한 멕시코 지역과는 다르게 브라질의 경우는 각종 열대우림 덕분에 개발도 어렵고, 귀금속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계륵으로 여기고 인도와의 무역, 그리고 아시아 무역에 더욱 집중했고.
하지만 브라질로 이주한 일부 농장주들이 마데이라 제도에서 재배하던 사탕수수를 브라질에 도입하고 플랜테이션을 시작하면서 쓸모없이 넓기만 했던 브라질은 가치 있는 땅으로 변모했다.
문제라면 기존의 원주민들의 수가 많지 않을뿐더러, 서양인들이 가져온 각종 질병과 농장주들이 원주민들을 강제로 잡아 제대로 먹이지도 않고 가혹한 노동을 시키면서 죽어갔기에 브라질의 인구가 수직으로 낙하하고 일을 시킬 사람이 없었기에 포르투갈은 자연스레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데려와 브라질을 개척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북미왕국이 노예무역을 금지하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브라질 개척을 포기한다는 뜻과도 같다고 생각한 정평국이 포르투갈이 과연 이를 받아들이겠냐고 묻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왜 불가능해. 농장에서 일할 계약 노동자들을 구하면 되지. 물론 농장주들은 노동자들에게 줘야 할 돈이 아까워서 노예를 고집하고는 있지만, 노예는 비쌀뿐더러 그저 감독관에게 맞지 않을 정도로만 일하는 만큼, 썩 효율적이지도 않지.”
노예 제도가 결국 사라진 것은 효율 문제였고, 노예를 사용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은 유럽의 지식인들도 알고 있었기에 정성국이 생각하기에 브라질 개척 문제보다는 노예무역을 통해 얻는 이득과 북미왕국과의 교역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비교해 결정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포르투갈에서 거절해도 상관없어. 곧바로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새한성에 있는 대사들에게 이를 통보할 생각이니.”
포르투갈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다른 유럽 국가들을 압박하겠다는 정성국의 말에 정평국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대사들이 기겁하겠군요. 알겠습니다. 바로 기사를 작성해서 북미신문에 싣도록 재촉하겠습니다.”
* * *
가족들과의 오붓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거실로 이동한 정성국이 커피를 내리고 있을 때 전아라가 정성국에게 말을 걸었다.
“오라버니.”
“응?”
“오늘 자 북미신문. 보셨어요?”
그러면서 전아라는 거실 한쪽에 있는 북미신문을 가리켰고, 오늘 자 북미신문에는 정성국이 명령한 대로 참혹한 아프리카의 상황을 알리는 기사가 실려 있었기에 정성국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긴 했지. 헌데 왜?”
“정말 유럽인들이 흑인들을 인간이 아닌 가축으로 대우하나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에 정성국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조금 고민했다.
거실에는 아이들도 있었으니까.
다만 눈치를 보니 아이들도 북미신문을 이미 읽은 듯했고,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정성국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잠깐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가축이라...가축도 아니야. 그냥 상품으로 생각하는 거지. 그러니 아프리카인들을 납치해 노예선에 실어...아니. 적재해 운반하는 거지. 제대로 먹이지도 않고.”
“맙소사...”
적나라한 정성국의 대답에 전아라나 하얀 들꽃, 그리고 아이들도 모두 충격을 받은 눈치였고, 그때 하얀 들꽃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캐롤라이나 지역의 주민들도 다 그렇게 납치된 건가요? 저희의 방문에 환영하며 열심히 손을 흔들어주던 주민들이 전부?”
“으음...한 절반 정도는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그나마 캐롤라이나 지역의 성비를 맞추기 위해 사들인 흑인 여성이나, 위장 상단에서 노예상인과 직접 계약해 사들인 흑인들의 경우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다.
최소한 다른 노예들처럼 층층이 쌓여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못하고 가만히 누워 이동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카리브해에서 악덕 농장주에게 팔리기 직전 위장 상단이 웃돈을 주고 사들여 해방하는 노예도 꽤 많았기에 정성국이 그렇게 대답했고.
이에 캐롤라이나 지역에서 자신들을 보고 열렬히 환호하던 흑인들을 떠올린 하얀 들꽃은 몹시 충격을 받은 눈치로 힘없이 의자에 등을 기댔고, 정나리는 그런 하얀 들꽃의 곁으로 이동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리고 정안문은 꽤 분노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국이 나설 수는 없는 겁니까?”
이에 정성국은 정안문을 바라보고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팔아 돈을 벌고 있단다. 헌데 아국이 그들에게 노예무역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들 유럽인들이 이를 듣겠느냐.”
정성국은 정안문이나 정나리의 교육에도 많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잘못된 지도자가 나라를 말아먹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정성국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정성국은 세심하게 정안문과 정나리를 교육했고, 정나리가 12살이 된 작년부터는 저녁 후 이렇게 다과를 먹는 시간에 잠깐씩 북미신문에 나온 기사를 읽고 의견을 나누거나, 어떤 주제를 정하고 토론을 나누기 시작했고.
그렇기에 정안문은 정성국의 얼굴을 보고 정성국이 이를 일종의 토론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화를 애써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유럽인들은 아국의 힘을 두려워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는다면, 피부색이 다른 이들에게 노예가 될 수도 있음을 강하게 경고하면 아국을 두려워하는 유럽인들은 바로 노예무역을 그만두지 않을까요?”
“호오. 노예무역을 근절시키기 위해 전쟁까지 생각하라는 뜻이냐?”
정안문의 대답은 생각보다 과격했기에 정성국이 흥미를 보이며 묻자 정안문은 손을 내저었다.
“아. 물론 아프리카인들의 처지가 몹시 안타깝긴 하지만, 그들을 돕자고 자칫하면 아국의 백성들이 피를 흘릴 수도 있는 전쟁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국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 정도로 강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그때 하얀 들꽃의 옆에 있던 정나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 어차피 유럽인들이 노예무역에 열을 오리는 것은 결국 돈 때문이니 돈으로 위협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어떤 식으로 위협한다는 게냐?”
정나리의 대답에 정성국이 눈을 빛내며 묻자 정나리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간단하죠. 노예무역을 금지하지 않는 나라와는 거래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 그만이잖아요? 그럼 그동안 우리 북미왕국과의 교역을 통해 큰돈을 벌고 있던 유럽 각국은 바로 노예무역을 금지할 것 같은데요?”
정나리의 대답에 정안문이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네. 네가 말한 방법이 더 효과적일 수 있겠다.”
확실히 정나리는 생각이 깊었고, 정안문은 동생의 말이라도 옳다고 여기면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큰 거부감이 없는 것이 만족스러웠던 정성국은 웃음을 터트리며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하하. 그래. 노예무역을 금지하지 않는다면 공격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노예무역을 하는 자들과는 계속 거래하긴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유럽 각국의 경계심이나 반발을 더 줄일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럼 제 말대로 하실 거에요?”
이에 정나리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정성국은 씩 웃으며 정나리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