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568화 (568/850)

568화

“전하. 에스파냐와의 영토 협상을 마무리했습니다.”

정성국이 파나마 운하를 방문해 누에바 에스파냐의 안토니오 부왕과 영토매매에 관해 이야기한 후 외무청에서는 안토니오 부왕이 파견한 에스파냐 외교관과 새진주에서 영토 협상을 진행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 협상이 마침내 끝났다는 조용한 곰의 보고에 정성국은 반색했다.

“오! 협상이 드디어 끝난 건가?”

“예. 일전에 전하께서 에스파냐를 너무 몰아붙이지 말라고 하셨기에 웅크린 늑대에게 적당한 수준에서 협상을 마무리 지으라고 이야기했고, 어차피 대략적인 협상은 해둔 상태였기에 웅크린 늑대는 바로 에스파냐 외교관과 협상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에스파냐 대사가 조약문에 최종 서명함으로써 마리아나 제도 전체와 필리핀 지역의 루손 섬 북부의 해안가는 우리 북미왕국의 영토가 된 셈입니다.”

그러면서 조용한 곰이 정성국에게 이번 영토매매 협상에 관련된 상세한 보고서와 조약문을 바치자 정성국은 이를 받아들며 질문을 던졌다.

“얼마에 매입하기로 했나?”

“400만 페소에 매입하기로 했습니다.”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머릿속으로 잠시 계산해보다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400만 페소? 대략 은 100톤 수준인가. 뭐 나쁘지 않네. 비록 이번에 사들인 땅의 면적이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마리아나 제도나 루손 섬의 위치와 이곳들에 제대로 된 항구를 건설해 무역 거점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야 그리 비싼 편은 아니고.”

“그렇지요.”

북미왕국이 청나라와 교역하면서 비단마저 생산해 유럽에 판매하게 되자 유럽의 은 상당수가 일단 북미왕국으로 유입되고 있었기에 은 100톤 정도가 한 번에 빠져나간다 해도 그리 부담될 정도는 아니었다.

더불어, 에스파냐는 은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보다 북미왕국의 교역품을 가져가 유럽에 판매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400만 페소에 해당하는 북미왕국의 교역품을 원하고 있었고, 이에 북미왕국은 2년에 걸쳐 400만 페소에 해당하는 교역품을 내어 주기로 했으니 정성국이 보기엔 헐값에 마리아나 제도와 루손 섬 북부 해안가를 사들인 셈이고.

그렇기에 정성국은 만족하면서도, 이것도 비싸다고 판단해 어떻게든 더 깎으려 들었던 웅크린 늑대를 떠올리고 고개를 흔들며 조용한 곰이 건네준 보고서와 조약문, 그리고 뒷장에 첨부된 지도를 확인했고.

“음? 이건 뭐지? 루손 섬 북부 해안가 인근 땅만 사들인 것이 아닌가?”

지도에는 루손 섬 북부 지역이 꽤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의 요청에 따라 루손 섬 북부 해안가뿐만 아니라 그 내륙의 땅도 구매하기로 했던 만큼, 일종의 분지 형태에 가까운 내륙까지 모두 구매해 이 지역을 북미왕국의 영토로 표기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루손 섬 북쪽에 있는 여러 섬 역시 북미왕국의 영토로 표기되어 있었기에 정성국이 조금 당황해 조용한 곰을 바라보자 조용한 곰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일단 이 섬들도 명목상으론 에스파냐의 영토이긴 한데 에스파냐는 이 섬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해적들이 이 섬들을 이용하기도 한답니다. 해서 웅크린 늑대는 루손 섬 북부 해안가에 건설될 항구의 안전을 위해 주변 섬들을 토벌하고 계속해서 관리할 필요가 있으니 에스파냐에서 이 섬들에 있는 해적들을 토벌하고 관리하던가, 아니면 이 섬들도 이번 협상 대상에 포함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했고, 에스파냐의 외교관은 두말없이 루손 섬 북부의 섬들을 몽땅 영토매매 대상에 포함했다는군요. 해서 이 섬들 역시 이번 조약을 통해 아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거참...”

이번 협상에 포함되어 북미왕국의 영토가 된 루손 섬 북쪽의 섬들은 바부얀 제도와 바티네스 제도의 섬들로 에스파냐 입장에서야 이 섬을 관리할 여력도 없을뿐더러 이 섬들을 징검다리 삼아 배후에 동녕국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해적들이 가끔 남하해 루손 섬을 약탈하기도 하는 만큼, 아예 이 섬들을 북미왕국에 떠넘겨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토매매 대금을 받고, 북쪽에서 남하하는 해적들을 차단할 수도 있으니 웅크린 늑대의 제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해서 에스파냐 외교관이 냉큼 이를 넘겼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과 동시에 이 섬들이 북미왕국의 영토가 되어 좋기는 한데 그만큼 더 많은 관리 인력을 파견해야 했기에 복잡한 얼굴로 혀를 차며 지도를 내려놓고 조약문을 살폈고.

“흠. 마리아나 제도에 에스파냐의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하나 개방해야 한다라...”

조약문에 쓰여 있는 조항 중 하나를 보고 정성국이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일단 마리아나 제도의 위치가 위치인지라 에스파냐가 저희에게 마리아나 제도를 판매하면 태평양을 횡단하던 마닐라 갤리온들이 중간에 정박할 수 있는 장소가 사라지게 되는 셈이지요. 그 때문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중간에 정박할 수 있는 보급항을 하나 개방해달라고 요청했고, 교역 거점이 아닌 단순한 보급항을 하나 개방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뿐더러 파나마 운하가 개통된 이상 태평양을 횡단하는 유럽의 배가 늘어날 테니 이들을 상대로 소소한 이득을 챙길 수 있어 웅크린 늑대가 허락했다고 하더군요.”

이러한 설명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웅크린 늑대의 판단에 동의했다.

“나쁘지 않네. 웅크린 늑대의 생각처럼 단순히 보급항을 하나 개방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고...이 마리아나 제도에 보급항을 건설하고 개방함으로써 태평양을 횡단하는 유럽 배들의 항로를 강제할 수 있겠어.”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태평양은 무척 광활한 만큼, 중간에 정박하고 항해의 피로를 풀고 신선한 식량과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보급항이 존재한다면 대부분의 배는 마리아나 제도를 지나치는 항로로 이동할 수밖에 없겠지요.”

예전보다 못하지만, 아직 아시아 무역은 돈이 되는 편이었고,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었다는 것이 유럽에 알려지게 된다면 아시아로 향하는 배 중 상당수는 기존의 항로가 아니라 파나마 운하를 경유해 태평양을 횡단하는 항로를 이용하려 들 것이 뻔했다.

기존의 항로는 해적이 들끓어 위험하기 짝이 없는 터라 이 새로운 항로의 가치는 생각보다 컸으니까.

그러니 유럽의 배들이 태평양을 드나들 텐데 북미왕국이 태평양 전역을 모두 감시할 수는 없는 터라 이 배들 일부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고.

하지만 마리아나 제도에 보급항을 만들어 개방한다면 유럽의 배들은 자연스레 마리아나 제도를 향해 항해할 수밖에 없으니 항로가 제한되고 태평양을 관리하는 것도 수월하리라 판단해 조용한 곰이 정성국의 말에 동의했다.

또한, 조용한 곰은 정성국에게 마리아나 제도에 보급항을 건설하고 개방하는 김에 하와이 제도의 항구도 유럽에 개방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마리아나 제도의 경우 아시아 쪽에 치우쳐 있는 만큼, 마리아나 제도와 파나마 운하 사이에 하와이 제도의 항구를 개방한다면 유럽의 배들은 모두 하와이 제도, 마리아나 제도를 거쳐 아시아로 이동할 테고, 하와이 제도는 5함대의 모항이니 유럽의 배들이 감히 문제를 일으키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정성국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것 괜찮네. 유럽의 배들이 남태평양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려면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일단 하와이 제도를 개방하는 문제도 고려하지. 그보다 마리아나 제도와 루손 섬 북부 해안가가 우리 북미왕국의 영토가 된 이상 이곳에 항구를 건설하고 적당히 개발하려면 인구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할 텐데...두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의 수가 많다던가?”

북미 대륙에도 인구가 적은 판에 본국의 백성을 마리아나 제도나 루손 섬에 보내 정착시킬 수야 없었다.

거기에 두 지역은 모두 열대 지역이라 이 지역 특유의 전염병이나 풍토병들까지 고려해야 했으니, 이 지역의 발전은 원주민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져야 했고.

해서 정성국이 질문을 던지자 조용한 곰이 답했다.

“일단 마리아나 제도의 일부 섬은 무인도에 가깝지만, 일부 섬은 차모로 족이라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답니다. 그리고 이들의 수가 적진 않다고 하더군요.”

“호오. 그래? 그거 다행이군. 에스파냐의 배들이 태평양을 횡단하면서 기착하는 곳이다 보니 각종 전염병에 의해 인구가 꽤 줄어든 것이 아닐까 걱정했더니만.”

정성국이 기억하기로 마리아나 제도는 외부와 별다른 교류 없이 고립되어 살다가 1521년 3월 마젤란이 태평양을 횡단하다 마리아나 제도에 도착하며 외부와 교류하기 시작했다고 알고 있었고, 외부와 오랫동안 고립된 지역의 경우 외부인들이 가져온 각종 전염병과 질병에 무력했으며, 서인도제도의 몇몇 섬들도 이 때문에 무인도가 되었기에 걱정했는데 원주민들의 수가 꽤 많다고 하니 안도했다.

“에스파냐의 배들이 드나들긴 하는데 보통은 아카풀코에서 마닐라로 이동할 때 이용하는지라 1년에 한 차례에 불과하고 배도 몇 척 안 되어서 피해가 적은 모양입니다.”

“흠. 그런가. 그럼 루손 섬 북부 해안가는?”

“일단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의 요청도 있고 해서 루손 섬 북부 해안가에서 내륙으로 약 35km 정도 안쪽까지 모두 사들였고, 에스파냐 외교관의 이야기로는 이 지역에 원주민들이 꽤 있을 거랍니다. 다만...”

“다만?”

“에스파냐는 직접 통치하는 마닐라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는 별다른 관심도 없고, 특히 북부 해안가의 경우는 마닐라에서도 먼 편이라 현지 사정을 거의 모르는 것이 문제지요.”

조용한 곰의 보고에 정성국은 속으로 에스파냐를 욕하면서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끙...그럼 우리가 사들인 땅에 사는 원주민의 수가 적거나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그렇습니다. 해서 웅크린 늑대는 이 점을 지적하며 루손 섬의 원주민들을 무제한으로 고용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요청했고, 에스파냐는 북위 16도를 기준으로 북쪽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고용할 수 있는 권리를 내어주었습니다.”

에스파냐는 북미왕국이 원주민들을 무척 후하게 대우해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만큼 일꾼을 고용하는 조건도 후할 것이 분명했는데 무제한으로 이를 허용하게 되면 당장 자신들이 부릴 원주민들도 모두 북쪽으로 이동할 것이 뻔했다.

다만 북미왕국에 인구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에스파냐도 잘 알고 있는 터라 이를 거절하면 북미왕국도 굳이 내륙 지역까지 사들이지 않겠다고 나올 것이 분명했고.

해서 에스파냐 외교관은 고민 끝에 북위 16도를 기준으로 그 북쪽에 거주하는 원주민만 고용할 수 있는 권리를 내어주었고 이러한 설명에 정성국은 다시 지도를 확인하고 북위 16도가 루손 섬 중간에 그어져 있었기에 반색했다.

“오! 그럼...”

정성국이 대량의 원주민을 고용해 빠르게 루손 섬 북부 지역을 개발할 수 있다는 기대에 차 있자 조용한 곰이 급히 말했다.

“다만 방금도 이야기한 것처럼 에스파냐는 마닐라를 제외하면 직접 통치하지 않는 터라 에스파냐가 이를 허락한다고 해도 해당 지역의 유력자들이 아국에 협조하지 않으면 원주민들을 고용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에스파냐는 루손 섬의 마닐라 왕국을 멸망시키며 필리핀 제도의 주도권을 가져가긴 하지만, 루손 섬 전체를 장악하기에는 병력과 행정력이 무척 부족했다.

더불어 에스파냐는 필리핀 제도를 점령해 이곳에서 각종 향신료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이 필리핀 제도에는 향신료가 없었고, 그나마 마닐라의 경우 교역 거점으로서 가치가 있었지만, 다른 지역은 별다른 가치가 없다 보니 에스파냐로서는 힘들게 이 지역을 장악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해서 에스파냐는 기존의 토착 왕가, 부족장들에게 세금면제와 자치권을 부여하며 명목상으로 에스파냐의 영토를 만들어 버리고 손을 떼버렸고.

그러니 에스파냐가 루손 섬 북부의 원주민들을 고용할 권리를 내어주었다고 한들 북미왕국 마음대로 원주민들을 고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정성국이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지도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흠. 뭐 그야 그렇겠지. 다만 외무청에서 그들을 잘 설득하면 되지 않겠나. 유력자라면 나름 정보에 밝을 테니 섣불리 우리 북미왕국을 적대시하지는 못할 테고.”

비록 북미왕국이 아직 동남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지는 않았지만, 유력자들이라면 최소한 마닐라에 이런저런 연줄은 있을 테고, 이를 통해 북미왕국의 존재를 파악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무리 유력자라 하더라도 비교적 북미왕국에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겠느냐는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긴 하지요. 알겠습니다. 외무청 관리들을 파견해 유력자들을 설득해 저들이 우리 북미왕국에 협조하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래. 외무청 관리들을 파견하는 김에 개발청, 행정청, 교육청 관리들도 함께 파견하도록 하고.”

이미 수많은 영토를 확장하고 개발해 왔기에 조용한 곰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요. 다만 이곳의 상황을 생각하면 관리들을 파견할 때 이를 호위할 병력도 함께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마리아나 제도는 몰라도 루손 섬 북부 지역은 간간이 해적들이 활동한다고 하니 관리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병력을 파견할 필요성이 있었다.

다만 열대 지역에 병력을 파견하는 것이 생각보다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아는 정성국은 한숨을 내쉬며 고민하다 말했다.

“끙...마리아나 제도도 그렇지만, 루손 섬 북부 역시 열대 지방이라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기가 좀 그렇고...일단은 인급 전선 한 척씩만 파견하도록 하자고. 내가 군사청장에게 따로 이야기해두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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