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화
관청에서 혹시 모를 청나라군의 우회를 경계하던 철산 도호부사는 조선 지원군 사령관이 보낸 전령을 통해 북쪽에서 이미 교전을 마쳤고,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바로 말을 달렸고.
눈앞에 보이는 들판에 널린 수많은 시체를 보고 잔뜩 흥분해서 옆에 있던 조선 지원군 사령관인 카무이쿠르에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오오! 정말 대단합니다! 천하에서 북미왕국군을 상대할 자가 없다는 이야기가 괜히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로군요! 단 한 번의 전투, 그것도 한 식경도 되지 않는 잠깐의 전투로 거침없이 남하하던 청나라군을 완전히 격파하다니요!”
이런 철산 도호부사의 반응에 카무이쿠르는 쓴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적 지휘관은 저희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오판해 그대로 돌격했고, 덕분에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초반의 돌격이 막힌 후 청나라군은 곧바로 도망쳤기에 청나라군을 완전히 격파했다고 하기도 어렵지요.”
이에 철산 도호부사는 조금 당황했다.
들판에 말과 청나라 병사들의 시체가 가득했기에, 조선 지원군이 의주대로를 따라 남하하던 청나라군을 완전히 격파시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
“그...그렇습니까? 허면 퇴각한 청나라군은 어느 정도 되는 겁니까?”
“대충 절반가량은 살아남아 도망쳤다고 봐도 될 겁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기병대를 추격할 방도도 없고...일단 적들의 남하를 막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터라 무리하게 퇴각하는 청나라군을 쫓지도 않았거든요.”
이미 대열을 이루고 사격 준비를 하는 아이누 경비대를 향해 거침없이 돌격하던 청나라 기병대는 계속되는 북미왕국의 사격에 그 기세를 잃었고,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는지 곧바로 퇴각했다.
그 후 병사들을 보내 확인하니 사망자와 부상자를 합쳐 대략 1600명가량이 이곳에 남겨진 상태였고.
해서 카무이쿠르는 일단 부상자들부터 후송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부상자 중 대다수는 총에 맞아 낙마한 충격과, 뒤따라 달려오는 말에 의해 짓밟힌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아무튼, 병사들이 부상당한 청나라 병사들을 후송하기 시작했을 때, 카무이쿠르는 일부 총 조장들과 논의한 끝에 퇴각한 청나라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정찰병을 보내고, 추격은 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오랫동안 전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조선의 주력군이 지금 의주에 있는 만큼 청군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자신들뿐이라 적을 추격할 수 있는 탐사대와 합류하기 전까지는 병력을 방어적으로 운용하기로 한 것이다.
“아. 그렇지요. 맞습니다. 청나라군을 막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암.”
그리고 카무이쿠르의 이야기에 철산 도호부사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질문을 던졌다.
“헌데 도망친 청나라군이 다시 병력을 정비해 남하하지는 않겠지요?”
“예. 이미 큰 피해를 입은 이상 본대와 합류해 남하하는 편이 나을 테니까요.”
카무이쿠르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철산 도호부사가 앞으로의 일을 물었다.
“휴우. 허면 사령관님께서는 이곳에서 계속 주둔하실 겁니까?”
“아닙니다. 물론 청나라군 본대의 병력 규모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못해도 3만 이상은 될 터인데, 이들이 아직 얼지 않은 압록강을 건너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러니 저들이 용천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최대한 빠르게 북상해야지요.”
“으음...”
카무이쿠르의 대답에 철산 도호부사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었고, 카무이쿠르는 철산 도호부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를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단 오늘 내로 가도에 있는 탐사대가 도착할 테니 이들과 함께 움직인다면 혹시 모를 청나라군의 우회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청나라군이 우회해 이곳을 지나치거나, 혹은 마을을 약탈할 리 없다는 이야기에 철산 도호부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렇다면 다행이로군요.”
그때 굳건한 바위가 밝은 표정으로 카무이쿠르에게 다가왔다.
“사령관님. 정찰병이 돌아왔습니다.”
“그래? 적들의 동향은?”
“병력을 수습한 후로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습니다.”
“휴우. 다행이군. 알겠네. 그럼 전 병력에 숙영지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게.”
“알겠습니다.”
굳건한 바위가 고개를 숙인 후 뒤로 물러나자 카무이쿠르는 청나라군의 퇴각 보고에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철산 도호부사를 바라보고 말했다.
“죄송하지만 부탁을 하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탁이오? 말씀하시지요.”
가능한 한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표정을 짓는 철산 도호부사를 보고 카무이쿠르가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저희가 전장 정리를 해야겠습니다만...저희는 곧바로 숙영지로 돌아가 이동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도호부사께서 이곳의 전장을 정리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전장 정리를요?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철산 도호부사는 놀란 표정으로 카무이쿠르를 바라보았다.
전장 정리는 어떻게 보면 귀찮고 힘든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전리품을 습득할 기회의 장이기도 했다.
무기나 방어구, 가죽옷, 병사가 소지한 패물 등등 돈이 되는 물품들이 많았으니까.
해서 철산 도호부사는 카무이쿠르가 자신에게 전장 정리를 부탁하자 무척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고, 카무이쿠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철산 도호부사는 청나라군을 막기 위해 전리품을 챙길 기회마저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알아듣고 새삼 감동한 표정으로 카무이쿠르를 보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병사들과 백성들을 동원해 이곳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장을 정리하다 발견한 쓸만한 장비들과 패물은 잘 손질해 보관해두고...아! 제가 책임지고 수급을 베어 잘 보관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예? 수급이요? 아...괜찮습니다.”
철산 도호부사의 말에 카무이쿠르가 잠깐 벙찐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지만, 철산 도호부사는 어찌 그러겠느냐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래도 사령관님의 공적을 증명할 수급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수급을 마련해 둘 테니 상부에 보고하시지요.”
그제야 카무이쿠르는 상황을 이해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손을 내저었다.
“아. 아국에서는 지휘관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정확한 보고서를 작성해 올리면 그만이지, 꼭 증거를 첨부할 필요는 없어서 말입니다.”
카무이쿠르의 이야기에 철산 도호부사는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그...그렇습니까? 허면...”
“굳이 망자를 욕보일 것 없이 그냥 적당한 곳에 묻어...아. 겨울이라 땅이 얼어 그게 생각보다 어렵겠군요. 차라리 연료를 지원해 드릴 테니 화장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에 철산 도호부사는 조금 욕심이 나긴 했다.
어차피 자신에게 전장 정리를 맡긴 만큼, 적당히 수급을 빼돌려 자신의 공으로 보고한다면 공을 인정받고 품계를 올릴 수 있었기에.
하지만 조선 지원군에서도 따로 본국과 조선 조정에 장계를 올릴 수도 있다는 것을 떠올린 철산 도호부사는 담담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 젊은 북미왕국의 사령관을 보고 욕심을 접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지요.”
철산 도호부사의 대답에 카무이쿠르는 만족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저들의 장비도 저희는 굳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노획한 물자들도 도호부사께서 알아서 처리해주시길 바랍니다.”
“어?! 그...그래도 되겠습니까?”
“예. 다만 절반 정도는 전장 정리에 동원된 병사들과 백성들에게 나눠주었으면 합니다.”
어차피 냉병기나 방어구 등은 자신들에게 별 필요가 없었고, 이곳에 파견된 조선 지원군 소속 병사들은 따로 특별 수당을 받고 있었으며, 전투에 참여할 때마다 또 생명 수당 등을 받는 만큼 돈이 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만큼 카무이쿠르는 추운 겨울에 전장 정리를 할 조선군과 백성들에게 절반을 나눠주고 절반은 알아서 처리하라고 이야기하자 철산 도호부사의 입이 귓가에 걸렸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 철산 도호부사의 반응에 카무이쿠르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저희가 잡은 포로들이 일부 있습니다. 부상자들이지요. 이들도 조선에서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치료도 부탁드립니다.”
“아. 그거야 쉬운 일이지요. 알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지요.”
* * *
막사 안쪽에 있는 문서들을 정리하고 일부 문서들은 파기하기 위해 화로에 던지던 카무이쿠르가 문득 해가 거의 져 어느덧 어두워진 바깥 풍경을 보고 중얼거렸다.
“으음...벌써 해가 거의 떨어졌고, 탐사대가 모두 상륙을 마치고 이동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오늘 당장 출발하기는 무리겠군.”
아이누 경비대가 숙영지로 돌아왔을 때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아이누 탐사대에 상황을 알리기 위해 가도로 떠났던 조병수가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조병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배를 통해 지금도 계속해서 가도에 있는 병력을 철산 반도 남쪽 해안가에 상륙하고 있으며, 늦어도 해가 지기 전까지는 탐사대의 상륙을 마칠 수 있고, 그 후 2시간이면 충분히 이곳에 도착할 수 있다고 보고했고.
그렇기에 슬슬 상륙을 마친 탐사대가 이곳에 도착할 것을 생각하면 오늘 곧바로 병력을 다시 이동시키긴 어려워 보였기에 카무이쿠르가 중얼거리자 굳건한 바위가 이에 수긍하듯 대꾸했다.
“예. 일단 청나라 선봉대가 물러나긴 했지만, 청나라군의 기동력을 생각하면 야간 행군은 아무래도 위험하지요. 또한, 잠깐의 전투이긴 했습니다만, 첫 실전을 겪은 병사들을 잠깐이나마 쉬게 해줄 필요도 있고요.”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오늘은 일단 쉬고 내일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한 카무이쿠르가 내일 출발 시각을 계산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음. 이곳에서 용암포까지의 거리가 30km가 좀 안 되지?”
“그렇습니다. 그러니 천천히 이동해도 8시간이면 충분히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에 카무이쿠르는 머릿속으로 잠시 시간을 가늠해보다 명령을 내렸다.
“그럼 이동 준비가 모두 끝나면 병사들을 취침시키게. 그리고 6시에 기상시켜 7시부터 이동하면 되겠지.”
“알겠습니다. 다만 병사들의 안정을 위해 술 일부를 풀었으면 합니다만...”
아이누 경비대원들은 이번이 첫 실전이었고, 첫 살인을 경험한 만큼, 아무래도 잡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카무이쿠르도 짐작했기에 딴생각을 못 하도록 복귀한 후 병사들에게 계속 작업을 시켰기에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얼굴을 하는 굳건한 바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알겠네. 다만 병사 한 명당 딱 한 잔씩만 허용하지. 그리고 경계는 곧 도착할 탐사대원들에게 맡기도록 하고.”
이에 굳건한 바위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막사의 문이 활짝 열리며 한 경비대원이 소리쳤다.
“사령관님! 의주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의주에서? 당장 불러오게.”
곧 막사로 조선의 복식을 한 전령이 도착했고, 그동안 가끔 이곳을 드나든 전령임을 알아본 카무이쿠르가 곧바로 의주 상황을 묻자 전령이 대답해주기 시작했다.
“음...지금껏 봉황성에서 주둔 중이던 청나라군이 남하해 도하 준비가 한창이다? 역시 지금 용암포에 상륙 중인 청나라군은 봉황성의 병력이 아니었군.”
“그렇습니다. 아마 청나라군의 본대로 추정됩니다. 해서 훈련대장께서는 병력 일부를 의주에 남겨둔 후 곧바로 남하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조선 지원군도 곧바로 북진해달라고 요청하셨고요.”
이에 카무이쿠르는 대답에 앞서 급히 질문을 던졌다.
자칫하면 각개격파를 당할 수도 있었기에.
“허면 조선의 주력군은 곧바로 남하한 건가?”
“그렇습니다. 제가 막 진영을 떠날 때 훈련도감 병사들과 어영청 병사들이 이동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준비가 끝나자마자 남하하겠다고 하셨으니까요.”
“어? 병사 일부를 의주에 남겨놓겠다더니 훈련도감과 어영청을 모두 움직이는 건가?”
설마 압록강의 청나라군을 지방군만으로 상대할 생각인가 싶어 급히 묻자 전령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게...”
지방군의 전투력을 너무 기대하기는 어려웠고, 거기에 주변의 산성에 들어가 봐야 청나라군이 이를 무시할 거라는 것은 유혁연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군의 본대가 의주 남쪽의 용천에 상륙하고 있는데 이를 그냥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영대장과 상의해 어영청의 병사 3천 명과 지방군 5천 명을 어영대장이 맡아 저들이 도하하는 것을 최대한 막아보기로 했고.
전령이 이런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자 카무이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허면 훈련도감과 어영청 병사들을 합쳐 총 1만 2천 명이 남하한다는 소리군.”
“그렇습니다.”
청나라군 본대의 규모가 얼마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조선군과 조선 지원군을 합치면 2만 명에 달하는 병사이니만큼, 잘하면 청나라군의 본대를 용천에서 격파할 수도 있을 것 같았기에 카무이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알겠네.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도 바로 북진해야겠지. 허면 자네는 곧바로 돌아갈 건가?”
당연히 조선 지원군이 도와주리라 확신하고 있었지만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던 전령은 미적거리지 않고 곧바로 북진하겠다고 대답하는 카무이쿠르를 보고 환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의주로 올라가 훈련대장님께 합류할 생각입니다.”
“그럼 가서 훈련대장님께 전하게. 우리는 별일 없다면 내일 오후 3시까지는 용암포에 도착하겠다고. 그러니 조선군도 이에 맞춰 이동 속도를 조절하라고 하게.”
카무이쿠르가 조선군이 먼저 도착했다가 용천에 주둔 중인 청나라군의 거센 공세를 홀로 받을까 우려해 이야기하자 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그리고 우리가 아까 의주대로를 따라 남하하던 청나라 선봉대와 교전했기에 청나라에서도 신식 소총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도 전하게.”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왔었던 전령은 화들짝 놀라 급히 질문을 던졌다.
“예!? 청나라군의 일부가 벌써 남하한 겁니까?”
“그렇네. 그리 많은 병력은 아니었고 잠깐의 교전 끝에 적들을 물러나게 했지. 그리고 이들이 퇴각해 용암포로 돌아갔으니 용암포에 있는 청나라군은 절대 정면에서 돌격하지는 않을 거야. 어떻게든 우회하거나 수의 우위를 최대한 이용하려 들겠지. 그러니 안전하게 남하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전하게. 만약 저들이 또 남하한다면 우리가 북진하면서 막으면 그만이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하는 카무이쿠르를 보고 전령은 유혁연이 왜 북미왕국이 자신들을 돕는다면 청나라군과의 전쟁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지 깨닫고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선 지원군의 승전 소식도 함께 전하겠습니다!”